이오시프 구사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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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의 군인.
2. 생애[편집]
가난한 벨라루스인 농민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구간, 어머니는 도시 외곽 농장에서 일했으며 구사콥스키는 시골 학교 졸업 후 어머니를 도와 노동자로 근무했다. 1928년 10월 노농적군에 자원입대해 1931년 레닌그라드 고등기병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5월부터 북캅카스 군관구 제12기병사단 제12기계화연대 부연대장을 역임했다.
2.1. 대숙청[편집]
1937년 5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추방돼 6월경 반공 가문 출신이란 누명을 썼다. 다행히 NKVD에 체포되진 않고 외딴 지역의 노동조합 내 비서로 좌천되는 선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탄광에서 안전감독관으로 근무하다 1938년 7월 다시 군복을 입게 됐다. 1941년 4월부터 북캅카스 군관구 제103차량화사단 제147전차연대에서 복무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편집]
2.2.1. 독소전쟁[편집]
1941년 11월, 제50군 제131전차대대 참모장으로 임명돼 스몰렌스크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3년 8월 12일 쿠르스크 전투 당시 독일 육군이 가한 포격으로 인해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퇴원 후 1943년 9월 20일 제11근위전차군단 제112전차여단장으로 임명됐다. 1943년 초 구사콥스키는 몽골 인민공화국 국민들의 헌금으로 생산된 전차 53대를 받았다.[3] 1944년 9월 23일,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레닌훈장,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필리카강을 건너 교두보를 빠르게 점령해 5일 만에 워비치 탈환했다. 구사콥스키의 부대는 다른 기갑부대보다 300km 정도 앞서 전선의 선봉에 섰다. 4개의 대도시를 탈환한 뒤 250개의 소규모 진지, 전차 10대, 자주포 12문, 장갑차 59대, 야포 43문, 병사 및 장교 4천여 명을 사살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4월 6일 두 번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2.3. 전후[편집]
1995년 2월 20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노보데비치 묘지에 매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