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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하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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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산둥성의 가장 동쪽 항구이고 황해에 접해 있다. 인구는 약 249만 명, 면적은 5,436km2이다. 과거 명칭은 위해위(威海衞, 웨이하이웨이) 였고, 1949년 10월에 현 중국 정부가 수립된 후 웨이하이로 바뀐다.
본래 작은 어촌에 불과하다가 1398년 홍무제의 치세에 왜구를 대비하기 위한 해안 방어 진지인 위 (衞)가 설치된 것에서 위해위(威海衞) 지명이 생겼고, 그중 앞의 '위해(威海)'만이 남은 것에서 현 지명이 비롯되었다. 19세기 후반 청나라 북양함대의 거점이 되며 본격적으로 도시가 세워졌다. 다만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는 일본 해군에게 대패하며 괴멸되었고, 1895년 1-2월 일본군은 격전 끝에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하였다. (위해위 전투) 그후 일본군이 군정을 펼치다가 1898년 5월 철수하였고, 같은해 8월 영국이 조차하였다. (영국령 웨이하이웨이)
이어진 영국 지배기에 도심부는 포트 에드워드라 명명되었고, 근해의 류쿵타오 섬에 영국 해군 기지가 세워졌다. 1930년 10월 영국은 웨이하이를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는데, 류쿵타오 해군 기지는 영국의 조차지로 남아 1940년 일본군에게 점령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중일전쟁기 웨이하이는 1938년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가 1945년 5월 10일 해방되었다. 그리고 1949년 인민해방군이 점령한 후 현재의 지명으로 개칭되었다. 2003년 웨이하이에는 북양함대의 주력함인 정원 (팅위안)호의 복제품이 건조되어 청일전쟁의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겨울철에 대륙고기압이 우세하여 눈은커녕 사막처럼 해 쨍쨍한 날이 일상인 중국에서 몇 안되는 다설지에 속한다. 겨울철 북서계절풍이 보하이 만을 건너며 해기차로 인한 눈구름대를 형성하기 때문인데, 산둥반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덕분에 이 눈구름대가 중간에 웨이하이에 한 번 걸린 후 서해로 빠져나가서 우리나라 서해안에 폭설을 뿌린다. 인근 도시 옌타이도 영향을 받긴 하나 웨이하이보단 적은 편이다.
윗 사진은 비교적 최근인 2020년 12월 30일 웨이하이에 내린 눈이다. 우리나라 강원영동이나 심지어 일본 서해안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양의 눈인데, 최고 40~50cm에 달하는 눈이 1~2년에 한 번 정도 쏟아진다.
웨이하이는 농담 반 진담 반 한국인이 만든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인천광역시에서 최단거리에 있는 중국 도시이기 때문.[1] 실제로 1992년 한중수교 이전에는 별볼일 없던촌동네였다. 그래서 길거리엔 한글 간판들이 제법 있는 편이고, 한국인과 조선족들도 많이 거주하는 편이다.[2] 덕분에 우스갯소리로 인천광역시 위해(웨이하이)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3] 그 덕택에 웨이하이는 중국 내에서 꽤 부유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롯데백화점도 진출해 있었다.[4]
의외로 골프매니아들에게도 잘 알려진 도시인데 웨이하이 포인트라 불리는 해안 절벽을 끼고 만들어진 골프장이 유명하다. 워낙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골프장이고 한국과 매우 가깝다보니 기업 고위간부 접대용으로 많이 찾기 때문에 무려 한국 직항 항공편이 개설되어있으며 높으신 분들이 많이 오는 만큼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웨이하이 지점장은 요직 중의 요직이라고.
2014년 통계에 따르면 웨이하이시 전체 대외교역액 171억 5,000만 달러 중 대한민국 상대 교역액이 52억 2,600만 달러로 전체의 30.5%를 점유했다. 유럽(12.2%), 일본(11.1%)간 교역액을 훨씬 웃도는 수준. 웨이하이시 세수의 상당 부분도 대한민국 기업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웃 옌타이시와 함께 인천항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에 한국의 배송대행 업체들의 현지 사무소가 몰려 있기도 하다.
항공편의 경우 웨이하이 다수이보 국제공항(威海大水泊国际机场)이 관내에 존재한다. 일반철도의 경우 다음과 같은 주요역과 노선이 있다.
인천 - 웨이하이 직항 항공편도 있고, 웨이하이와 평택을 오가는 정기 화객선도 있다. 이 화객선은 알리익스프레스의 선편배송에도 이용 중인데, 웨이하이항에서 출항하지 않는 날에는 평택행 화객선의 출항일에 맞춰서 웨이하이시 산하 룽청시의 룽옌항이나 웨이하이 옆동네인 옌타이로 보내기도 한다.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북해함대가 이 곳에 수경구를 두고 1개 호위함 지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북부전구공군 예하 34여단이 이 곳에 주둔한다.
대한민국에서 교육 완수를 인정받는 로컬 고등학교는 웨이하이시 제1중학교(威海一中)와 웨이하이시 제2중학교(威海二中)가 있으며 재 중국 한국 학교로는 위해대광화국제학교와 웨이하이한국학교가 있다.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동북아전쟁을 거치고 미국령이 된다.
2015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사기꾼 조희팔이 가짜 장례식을 치르고 은신해 있을 확률이 있는 도시로 지목하기도 했다. 웨이하이를 선택한 이유는 단기간에 발전한 도시다 보니 익명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표창원 교수는 분석했다.
2017년 5월 9일 웨이하이시 환추이구 타오쟈쾅 터널에서 한국인 유치원생 10명이 탄 버스에 화재가 발생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웨이하이 터널 한국 유치원 버스 화재 사고 항목 참조.
1. 개요[편집]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산둥성의 가장 동쪽 항구이고 황해에 접해 있다. 인구는 약 249만 명, 면적은 5,436km2이다. 과거 명칭은 위해위(威海衞, 웨이하이웨이) 였고, 1949년 10월에 현 중국 정부가 수립된 후 웨이하이로 바뀐다.
2. 역사[편집]
본래 작은 어촌에 불과하다가 1398년 홍무제의 치세에 왜구를 대비하기 위한 해안 방어 진지인 위 (衞)가 설치된 것에서 위해위(威海衞) 지명이 생겼고, 그중 앞의 '위해(威海)'만이 남은 것에서 현 지명이 비롯되었다. 19세기 후반 청나라 북양함대의 거점이 되며 본격적으로 도시가 세워졌다. 다만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는 일본 해군에게 대패하며 괴멸되었고, 1895년 1-2월 일본군은 격전 끝에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하였다. (위해위 전투) 그후 일본군이 군정을 펼치다가 1898년 5월 철수하였고, 같은해 8월 영국이 조차하였다. (영국령 웨이하이웨이)
이어진 영국 지배기에 도심부는 포트 에드워드라 명명되었고, 근해의 류쿵타오 섬에 영국 해군 기지가 세워졌다. 1930년 10월 영국은 웨이하이를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는데, 류쿵타오 해군 기지는 영국의 조차지로 남아 1940년 일본군에게 점령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중일전쟁기 웨이하이는 1938년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가 1945년 5월 10일 해방되었다. 그리고 1949년 인민해방군이 점령한 후 현재의 지명으로 개칭되었다. 2003년 웨이하이에는 북양함대의 주력함인 정원 (팅위안)호의 복제품이 건조되어 청일전쟁의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3. 기후[편집]
겨울철에 대륙고기압이 우세하여 눈은커녕 사막처럼 해 쨍쨍한 날이 일상인 중국에서 몇 안되는 다설지에 속한다. 겨울철 북서계절풍이 보하이 만을 건너며 해기차로 인한 눈구름대를 형성하기 때문인데, 산둥반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덕분에 이 눈구름대가 중간에 웨이하이에 한 번 걸린 후 서해로 빠져나가서 우리나라 서해안에 폭설을 뿌린다. 인근 도시 옌타이도 영향을 받긴 하나 웨이하이보단 적은 편이다.
윗 사진은 비교적 최근인 2020년 12월 30일 웨이하이에 내린 눈이다. 우리나라 강원영동이나 심지어 일본 서해안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양의 눈인데, 최고 40~50cm에 달하는 눈이 1~2년에 한 번 정도 쏟아진다.
4. 한국과의 인연[편집]
웨이하이는 농담 반 진담 반 한국인이 만든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인천광역시에서 최단거리에 있는 중국 도시이기 때문.[1] 실제로 1992년 한중수교 이전에는 별볼일 없던
의외로 골프매니아들에게도 잘 알려진 도시인데 웨이하이 포인트라 불리는 해안 절벽을 끼고 만들어진 골프장이 유명하다. 워낙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골프장이고 한국과 매우 가깝다보니 기업 고위간부 접대용으로 많이 찾기 때문에 무려 한국 직항 항공편이 개설되어있으며 높으신 분들이 많이 오는 만큼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웨이하이 지점장은 요직 중의 요직이라고.
4.1. 대한 경제교류[편집]
2014년 통계에 따르면 웨이하이시 전체 대외교역액 171억 5,000만 달러 중 대한민국 상대 교역액이 52억 2,600만 달러로 전체의 30.5%를 점유했다. 유럽(12.2%), 일본(11.1%)간 교역액을 훨씬 웃도는 수준. 웨이하이시 세수의 상당 부분도 대한민국 기업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웃 옌타이시와 함께 인천항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에 한국의 배송대행 업체들의 현지 사무소가 몰려 있기도 하다.
5. 교통[편집]
항공편의 경우 웨이하이 다수이보 국제공항(威海大水泊国际机场)이 관내에 존재한다. 일반철도의 경우 다음과 같은 주요역과 노선이 있다.
- 웨이하이역(威海站): 타오웨이철도(桃威铁路), 칭룽고속철도(青荣城际铁路)
- 웨이하이역(威海北站): 칭룽고속철도(青荣城际铁路)
5.1. 한국행 교통편[편집]
인천 - 웨이하이 직항 항공편도 있고, 웨이하이와 평택을 오가는 정기 화객선도 있다. 이 화객선은 알리익스프레스의 선편배송에도 이용 중인데, 웨이하이항에서 출항하지 않는 날에는 평택행 화객선의 출항일에 맞춰서 웨이하이시 산하 룽청시의 룽옌항이나 웨이하이 옆동네인 옌타이로 보내기도 한다.
6. 군사[편집]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북해함대가 이 곳에 수경구를 두고 1개 호위함 지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북부전구공군 예하 34여단이 이 곳에 주둔한다.
7. 여담[편집]
대한민국에서 교육 완수를 인정받는 로컬 고등학교는 웨이하이시 제1중학교(威海一中)와 웨이하이시 제2중학교(威海二中)가 있으며 재 중국 한국 학교로는 위해대광화국제학교와 웨이하이한국학교가 있다.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동북아전쟁을 거치고 미국령이 된다.
2015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사기꾼 조희팔이 가짜 장례식을 치르고 은신해 있을 확률이 있는 도시로 지목하기도 했다. 웨이하이를 선택한 이유는 단기간에 발전한 도시다 보니 익명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표창원 교수는 분석했다.
2017년 5월 9일 웨이하이시 환추이구 타오쟈쾅 터널에서 한국인 유치원생 10명이 탄 버스에 화재가 발생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웨이하이 터널 한국 유치원 버스 화재 사고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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