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프라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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วัดพระแก้ว
Wat Phra Kaew
1. 개요[편집]
태국 방콕의 절(불교). 정식 이름은 왓 프라스리라따나사사다람[1] 으로, '에메랄드 불상의 사원', 혹은 '에메랄드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태국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에메랄드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 태국 전역에서 가장 신성한 사찰이기도 하다.
왓 프라깨오는 짜끄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시절인 1783년 처음 지어졌다. 그 이래로 모든 태국 국왕들은 왓 프라깨오를 증축하면서 높이 받들었고, 이는 현재 국왕인 라마 10세 시기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덕분에 왓 프라깨오는 거의 태국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통한다. 현재는 방콕 왕궁, 왓 포 등과 함께 방콕 최고 관광지들 중 하나로 매년 8백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찾는다.
2. 역사[편집]
톤부리 왕조 딱신 왕 휘하의 장군이었던 라마 1세는 딱신 왕의 광기가 점차 심해지자 쿠데타를 일으켜 딱신 왕을 몰아내고 짜끄리 왕조를 개창했다. 라마 1세는 딱신 왕의 영향력이 강했던 톤부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였거니와, 수도 톤부리에 있는 옛 왕궁은 거대한 사찰 두 곳 사이에 끼어서 매우 협소했다. 그리하여 라마 1세는 1782년 4월 수도를 방콕으로 천도했다.[2]
라마 1세는 방콕을 완전히 새로운 신수도로 지었다. 짜오프라야 강 동안에 왕궁을 세웠고 그 바로 옆에 거대한 사찰을 세웠다. 원래 태국에서는 왕궁 바로 옆에 왕족 전용 불교 사찰을 세움이 관습이었고 라마 1세 역시 이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왕실 전용이었기에 새롭게 지어진 사찰은 승려 거주구역이 없음을 제외하면[3] 모든 면에서 다른 사찰들과 비슷했다. 1783년 새로운 사찰의 첫 삽을 펐고 라마 1세는 이 사찰의 이름을 '왓 프라 씨 라타나 쌋사다람', 즉 '신성한 스승의 사원의 보석을 보관한 사찰'이라고 지었다. 태국은 전통적인 남방불교국가이거니와, 왕권을 담마라자(Dhammaraja), 즉 호법의 군주리는 데서 찾을 정도로 왕실과 불교의 관계가 깊다. 따라서 이 사찰에 많은 신경을 쏟았고, 심지어 당시 왕궁도 아직 임시로 목재로 만든 반면 이 사찰은 석재로 지었을 정도였다.
1784년 3월 22일에는 마침내 톤부리의 왓 아룬에 안치되었던 에메랄드 불상을 성대한 예식과 함께 방콕의 왓 프라깨오로 이운하였다. 1786년에 라마 1세는 새로운 수도의 정식 이름을 '끄룽 텝 마하나콘 아몬 라따나꼬신 마힌타라 유타야 마하딜록 폽 노파랏 랏차타니 부리롬 우돔랏차니웻 마하사탄 아몬 피만 아와딴 사팃 사카타띠야 윗사누깜 쁘라싯(กรุงเทพมหานคร อมรรัตนโกสินทร์ มหินทรายุธยา มหาดิลกภพ นพรัตน์ราชธานีบุรีรมย์ อุดมราชนิเวศน์มหาสถาน อมรพิมานอวตารสถิต สักกะทัตติยะวิษณุกรรมประสิทธิ์)'으로 지었다. 해석하면, 천사의 도시, 위대한 도시, 영원한 보석의 도시, 인드라 신의 난공불락의 도시, 9개의 고귀한 보석을 지닌 장대한 세계의 수도, 환생한 신이 다스리는 하늘 위의 땅의 집을 닮은 왕궁으로 가득한 기쁨의 도시, 인드라가 내리고 비슈바카르만(विश्वकर्मा)이 세운 도시' 정도가 된다.
왓 프라깨오는 라마 3세, 라마 4세 시절에 증축 작업을 거쳤다. 라마 3세는 1831년 방콕 천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사찰을 대폭 개보수했고, 라마 4세 역시 거대한 증축 공사를 벌이면서 왓 프라깨오에 굉장히 많은 신경을 쏟았다.[4] 또한 1932년 방콕 천도 150주년 기념으로 라마 7세가 복구 작업을 벌였고 1982년에는 라마 9세 대왕이 또다시 방콕 천도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또다시 왓 프라깨오에 대대적인 손질을 했다. 그이래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손질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재는 매 시즌마다 국왕이 직접 불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행사를 여는 등 태국 최고 사찰의 위상을 여지없이 뽐내고 있다. 그외에도 왓 프라깨오는 현대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들 중 하나이며, 2016년 기준으로 80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을 받아들이며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5]
3. 내부[편집]
4. 에메랄드 불상[편집]
에메랄드 불상은 녹색 벽옥으로 만들어졌다.[33] 다만 태국 왕실 쪽에서 워낙 철저하게 불상을 지키고 있다보니 과학자들이 자세한 성분이나 재료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한 적은 없다고. 불상은 무릎 쪽 너비가 48cm, 높이는 66cm이며 전형적인 앉아있는 모습을 한 좌불이다.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 위로 올라가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불상의 형태를 토대로 15세기 이전 치앙마이 지역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라고 추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불상의 명상 자세가 동남아시아보다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와 비슷한 탓에 인도에서 유래한 불상이라는 설도 있다.
4.1. 기원[편집]
태국 내에서 최고로 신성하고 격이 높은 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치앙마이 인근에 있는 한 사원에 벼락이 떨어졌고, 벼락이 사원의 탑을 쪼개면서 그 속에 있던 스투코 덩어리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원의 주지스님은 이 덩어리를 신비롭게 여겨 자신의 거처에 가져다 놓았는데, 어느 날 스투코 덩어리가 깨지면서 그 속에 있는 찬란한 녹색 빛이 휘황찬란하게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놀란 스님은 스투코 덩어리를 깨어냈고, 깨진 스투코 덩어리 내부에는 아름다운 녹색 벽옥으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고.[34]
이 불상에 대한 신비로운 전설들은 굉장히 많다. 란나 왕국의 왕은 이 불상을 자신의 궁전으로 모셔가고 싶어 불상을 코끼리에 실어 옮기려 들었다. 그러나 코끼리는 절대 궁전으로 향하지 않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람팡 지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은 이를 상서로운 징조로 받아들여 람팡 지역에 왓 프라깨오 돈 타오 사원을 지어 불상을 모셨다. 1468년에는 마침내 불상이 치앙마이로 옮겨졌으며 치앙마이의 왕들은 이 신성한 불상을 고이고이 모시며 왕가의 보물로 여겼다. 이후 불상은 1552년 란쌍 왕국의 수도 루앙프라방으로 옮겨졌다. 1564년 란쌍 왕국의 쎄티타랏 왕은 미얀마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천도했고, 이와 함께 에메랄드 불상도 함께 가지고 갔다.
1779년 당시 태국 출신 장군이었던 라마 1세가 라오스를 침공하고 비엔티안을 함락했다. 이때 라마 1세는 비엔티엔을 함락하고 불상을 태국으로 가지고 왔고, 당시 수도였던 톤부리에 왓 아룬을 지어 불상을 그 곳에 안치했다. 이후 라마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딱신 왕을 몰아내고 짜끄리 왕조를 개창하자 불상은 짜끄리 왕실과 태국의 상징이 되었고, 그 이래로 지금까지 태국의 명실상부한 상징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라마 1세는 에메랄드 불상을 보관하기 위해 왕궁 인근에 왓 프라깨오를 1784년 축성했고, 에메랄드 불상은 그해 3월 22일 성대한 의식과 함께 왓 프라깨오의 프라 우보솟에 안치되어 현대에 이른다.
4.2. 행사[편집]
에메랄드 불상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국왕이 직접 옷을 갈아입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름과 우기에 불상이 착용하는 의상은 라마 1세 시절에 만들어졌고, 겨울에 착용하는 의상은 라마 3세 시절에 만들어졌다. 역대 태국 군주들은 이때 만들어진 의상들은 200년 가까이 매년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흐르며 의상이 훼손될 수 있단 우려가 제기되자 1996년에 라마 9세의 골든 주빌리를 맞아 태국 왕실청에서 옛 의상과 똑같이 새 의상을 복제해 만들었다. 이 새 의상을 만드는 모든 자금은 순전히 기부금으로 충당되었고, 태국 국민들이 열성적으로 기부에 참여해준 덕택에 에메랄드 불상은 거의 200년 만에 새 옷을 입을 수 있었다.[36]
보통 3월과 8월, 11월에 한 번씩 왕이나 그에 준하는 고위 왕족이 직접 불상의 옷을 갈아입힘이 관례로 거의 연례행사처럼 열린다. 3월부터 8월까지인 건기와 여름에는 뾰족뾰족한 태국 전통식 왕관과 황금 가슴 장식, 목걸이, 팔찌 및 수많은 보석류를 입힌다. 참고로 불상이 착용하는 모든 장신구들은 국왕과 격이 같은 것들을 사용한다고 한다. 8월부터 11월까지인 우기에는 사파이어를 박아넣은 황금 왕관과 한쪽 어깨에 걸치는 숄을 입고, 11월부터 3월까지인 겨울에는 다이아몬드를 박은 황금 숄을 몸 전체에 빙빙 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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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วัดพระศรีรัตนศาสดาราม[2] 그래 봤자 톤부리와 새로운 수도 사이는 굉장히 가까워 강 건너편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 톤부리 지역은 아예 방콕 시내에 포함된다.[3] 국왕의 경호를 위해 함부로 승려들을 사찰에 들이지 않았다. 대신 인근 사찰의 고승들이 잠깐 다녀가면서 재를 지내고 돌아갔다.[4] 라마 4세가 벌려놓은 공사가 워낙 컸기에 이 공사는 후대 라마 5세 시절에야 끝난다.[5] 참고로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매년 920만 명 정도가 방문한다. 태국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6] 태국어로는 'พระอุโบสถ'라고 쓴다.[7] 13번 건물 참조[8] 살라 안쪽에는 각각 하나씩 금잎사귀로 장식된 표지석이 있다. 불교에서 속세와 사찰을 구분하는 경계를 구분하는 셈.[9] 내부가 워낙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에어컨이 없어 꽤나 후덥하기 때문에 대부분 벽화를 자세히 보지 못하고 빨리 나온다.[10] 태국어로는 'ปราสาทพระเทพบิดร'라고 쓴다.[11] 라마 4세는 공사가 완공되기 전에 사망했다.[12] 원래 쁘랑 8기 모두가 사찰의 벽 바깥에 있었으나 라마 4세가 사찰을 확장하면서 8개 중 2개가 사찰의 담장 안으로 들어왔다.[13] 출가한 남성 승려를 이르는 말. 여성의 경우 비구니라고 한다.[14] 다른 이에게 설법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진리를 깨달은 부처. 벽지불(辟支佛) 또는 독각(獨覺)이라고도 한다.[15] 태국어로는 'หอมณเฑียรธรรม'라고 쓴다.[16] 하누만은 마하 수라 싱하낫 총독의 상징이었다.[17] 태국어로는 'พระมณฑป'라고 쓴다.[18] 태국 전통의 지붕 양식. 굉장히 정교한 건축방식으로, 모서리가 많고 층을 겹겹이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19] 태국어로는 'พระเศวตกุฏาคารวิหารยอด'라고 쓴다.[20] 태국어로는 'พระระเบียง'라고 쓴다.[21] 태국어로는 'หอพระนาก'라고 쓴다.[22] 참고로 당연히 캄보디아 정부는 이를 문화재 훔치기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태국 정부는 씹고 있다.[23] 태국 정부는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캄보디아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24] 태국어로는 'พระศรีรัตนเจดีย์'라고 쓴다.[25] 참고로 이 타일들은 라마 5세가 직접 이탈리아에서 공수해온 것이다.[26]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우산[27]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놀랄 정도.[28] 이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특색이 있게 생겼으며 왕관이나 복장들도 미묘하게 다르다.[29] 태국어로는 'ศาลาราย'라고 쓴다.[30] 태국어로는 'พระแก้วมรกต'라고 쓴다. 정식 이름은 '프라 푸타 마하 마니 랏타나 파티마꼰'(พระพุทธมหามณีรัตนปฏิมากร)이다.[31] 태국에서는 계절마다 불상의 옷을 갈아입힌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여름, 우기, 겨울에 불상의 모습이다.[32] 프라 우보솟 내부에 들어가면 에메랄드 불상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거의 연두색 점처럼 보인다. 게다가 워낙 사람들이 뒤에서 많이 몰려오다보니 안에 들어갔다가도 몇 분만에 제대로 불상을 보지도 못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상당수.[33] '에메랄드' 불상이라고 해서 에메랄드로 만들어졌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절대 아니다.[34]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불상은 15세기 란나 왕국의 불상 양식과 흡사하다고 한다. 따라서 란나 왕국 시기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35] 2017년 11월 19일에 치러진 예식이다.[36] 옛날 의상은 왕궁 내부의 박물관에 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