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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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 레오폴트 2세의 손녀.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결혼해 움베르토 1세와 아마데오 1세를 낳았다. 이탈리아 왕국이 출범하기 전에 사망해 이탈리아의 초대 왕비가 되지 못했다.
2. 생애[편집]
레오폴트 2세의 아들 오스트리아 대공 라이너의 차녀로 태어났다. '아델'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아델하이트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답게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며, 흰 피부의 미인으로 성장했다.
1840년 8월, 선자리에서 피에몬테 공[1]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처음 만난 아델하이트는 그에게 반해 편지를 주고 받았다. 사보이아와 합스부르크 간의 긴 결혼 협상 끝에 두 사람은 1842년 스투피니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서 아델하이트는 아델라이데 또는 마리아 아델라이데로 불렸다. 부부는 슬하에 8명의 자식을 두었다. 많은 아이를 낳으며 아델라이데는 몸이 약해졌다.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여러 애인과 사생아를 만들었고, 아델라이데는 인내해야 했다.
1849년 시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가 퇴위하고 남편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로 즉위했다. 왕비가 되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을 경계하는 분위기와 시어머니 토스카나의 마리아 테레사의 영향력으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1855년 1월 16일, 시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급성 위장염에 걸렸다. 아델라이데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는데 당시 왕비의 앓는 소리가 궁 밖에 있는 광장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아델라이데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가 빠지더니 제대로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장례식으로부터 4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토리노의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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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보이아 가문의 계승자에게 주어지던 작위.[2] 아우구스트 3세의 손녀이다.[3] 장남 빅토르 보나파르트의 후손들이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 지위를 잇고 있다.[4]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5]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등[6]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자녀들 중 가장 똑똑했으나 부모의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질환이 있어 왜소증을 앓았고 그 여파로 일찍 죽었다. 건강 때문에 제노바에서 살았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노바의 그리스 로마 유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으며, 제노바 지역 학자들도 그의 학식에 감탄했다고 한다.[7] 카를루스 1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