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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의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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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의 핵개발
2. 프랑스의 핵개발
3. 같이 보기


1. 영국의 핵개발[편집]


영국은 원래 핵개발을 가장 먼저 시도한 국가 중 하나였다. 1940년에 영국은 독일에서 핵 관련 연구를 계획했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만약 독일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경우 큰일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핵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트윈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twin tube alloy project)이다.

하지만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는 전쟁이 진행되며 고착된다.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끝없는 영국의 소모전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터져버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사막의 여우라는 롬멜이 영국군을 이집트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대서양 전투가 터지면서 한 달에 70만 톤 가량의 수송선이 독일의 U보트에 의해 가라앉는 상황이 벌어지며[1] 영국은 재정난과 자원고갈에 시달리느라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이 때 영국을 구원해줄 구원투수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영국을 U보트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주고 독일을 굴복시키기 위해 플레처급 구축함이나 리버티급 수송선 등의 각종 수송선박 및 호위함정을 대량으로 건조, 영국에게 보내는 물자의 양을 대폭 늘렸다. 그러나 독일의 잠수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 '북소리 작전'을 입안시켜 U보트를 미국 연안까지 침투시켜서 항구와 수송선들을 강습하는 한편 훈련이 덜 된 미국의 호위선들을 공격한다. 이로서 U보트가 올리는 전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고 미국은 엄청난 수의 수송선을 대서양에서 상실했다.

빨리 대서양으로 와서 수송을 호위해줘야 할 미국의 해군도 태평양 전쟁에서 과달카날 전역사보섬 해전 등에서 일본 제국 상대로 고착과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 제국의 항모기동부대를 격멸하기는 했으나 태평양 전 지역을 석권한 일본 해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심지어 미국령이었던 알래스카알류샨 열도에서 14개월간이나 미국 상륙부대의 발을 묶어놓는 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처칠은 당장 한 척의 호위함도 아까운 판국에 저 많은 군함이 태평양에 쏠려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당장 유토브 상대의 대서양 전쟁만 치르기도 버거운 판국에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 때문에 대량의 전차를 소련에게 랜드리스로 가져다줘야 했고[2], 이전에 일본 제국이 벌였던 남방작전 때문에 자원의 보고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를 잃어버린 상태였으며, 원래 영국에게 자원을 공급해줘야 할 인도는 이제 일본 제국 견제를 위해서 본토의 자원과 무기를 빨아먹는 골치아픈 존재가 됐다.

이러던 와중, 1943년 퀘벡에서 영국과 미국, 캐나다가 회담을 가진다.[3] 처칠은 큰맘먹고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의 모든 정보를 미국에게 넘기겠다고 밝혔으며, 핵개발에 성공하면 일본 제국에 투하시켜 빨리 태평양을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다.[4] 그리고 이로서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의 200개 이상 서류가 고스란히 미국에 넘어갔고 이것은 맨해튼 계획의 귀중한 기반자료가 된다.

1944년, 미국은 영국과 하이드 파크 협정이라는 비밀협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영국에게 핵무기 관련 기술 지원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전쟁이 끝이 보이는 1945년 7월경 영국은 하이드 파크 협정을 거론하며 핵무기 기술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에는 협정문의 사본이 있지만 미국에는 없다는 기묘한 상황을 맞이했고. 1946년 미국은 맥마흔 법안[5]을 통과시켜 핵물질 및 핵기술의 국외 이전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면서 영국에게 엿을 먹였다.[6]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의 엄청난 자료를 주고도 핵무기 최종기술이라는 자료 대금을 떼먹힌(...) 영국은 매우 분노했고[7] 그 해 마침내 호주의 협조 아래 독자 핵개발을 시작하기로 결의한다.

1946년, 영국 정부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존 콕크로프트가 요청하여 설립한 원자력 연구 기관(Atomic Energy Research Establishment, AERE)에서 핵무기 연구를 하기 시작했으며,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영국인들을 모두 귀국시키는 강수를 둠과 동시에 타 국적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을 뒷구멍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소련의 스파이인 클라우스 푹스도 참가해서 결과적으로 영국의 핵개발 상황을 소련에 유출하게 되지만, 푹스가 영국에 유출해줬던 팻 맨폭축렌즈 설계도, 핵실험 데이터, 우라늄 생산법은 영국의 핵무장에 상당한 도움이 됐었다. 1947년 군사용 원자로에서 뽑은 핵연료를 재처리하기 위해 셀라필드 원자력 단지를 건설하였다. 그후 1946년부터 윌리엄 페니경[8]의 감독하에 Atomic Weapons Establishment를 운영하게 된다. 1948년 영국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시인하고, 1952년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7년에 수소폭탄의 실험에 성공하면서 영국은 성공적으로 핵클럽에 가입, 소련보다는 늦긴 했지만 영국도 세번째 핵 보유국이 되면서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외교를 할 위치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호주에게서 핵무기 원료 물질들을 대량 확보했으며, 호주 정부로 부터 광활한 면적의 핵실험지와 핵실험 재료[9]들을 빌릴 수 있었다.[10] 대표적인 핵실험 장소로는 마랄링가, 에뮤 필드, 몰든 섬, 크리스마스 섬[11], 몬테벨로 섬 등이 있다. 호주 땅에서 핵실험을 진행하다가 1958년 영국과 미국이 상호 핵무기 개발 조약을 맺고 미국 땅에서 핵실험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 후 이 관계는 매우 돈독해져, 1960년대 미국의 폴라리스 미사일을 구입하게 되고, 현재는 폴라리스의 개량판인 트라이던트 II 미사일을 굴리고 있다.

영국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할 것.


2. 프랑스의 핵개발[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과학자들도 맨해튼 계획에 참가했으나, 영국과 미국 과학자들과는 달리 프랑스 과학자들은 2류도 아닌3류 취급을 받으며[12] 중수로 건설과 플루토늄 분리 작업에만 부분적으로 참가하는데에 그쳤다. 다만 프랑스 과학자들도 핵폭탄의 중요성을 알고 어떻게든 자국(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자유 프랑스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려 했다. 특히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프랑스가 해방되면서 맨해튼 계획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프랑스 과학자들은 어떻게서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미국은 이걸 막으려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해방된 프랑스로 돌아가는데 성공하였고 샤를 드 골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드 골의 측근에게 말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원자폭탄의 존재에 대해 알리게 된다. 얼마 뒤 그 과학자들과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드 골은 그들에게 "아주 잘 알아들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샤를 드 골은 전쟁이 끝난지 몇 달도 안 되었던 1945년 10월, 핵폭탄의 개발을 비밀리에 명하고,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하였다. 드 골은 곧 물러났지만,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핵개발 의지를 알고 있었던 미국·영국·캐나다는 우라늄공급통제조약을 맺어 프랑스를 방해하려 했지만, 다행히(?) 프랑스 남부 부르고뉴의 중앙 고원지대인 massif central에서 대규모의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는 행운으로 문제는 해결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독자 핵개발 의지를 더욱 굳혀준 사건이 1956년에 있었는데, 제2차 중동전쟁이 그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작전은 이스라엘의 주도 아래 잘 진행되었으나, 소련이 개입해 '이집트에서 얌전히 철수하기 vs 핵로켓 쳐맞고 개털리기'라는 조건을 들이댔고 미국까지 소련에 동조하자 결국 프랑스와 영국은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13]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미국이 영불 양국의 안보에 대해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자 양국은 동맹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나마 핵개발 시점에서 영국은 그 당시 원폭과 수폭의 개발이 거의 끝나가 양산체제에 돌입한 상태였지만, 프랑스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점점 뒤쳐지고 있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정신이 프랑스에 팽배했고, 결국 일을 내고 만다.

결국 프랑스는 겨우 십수년 전에 자기네 땅을 강점했던 적국이자 웬수였던 서독에게 핵무기 공동 개발을 제의하기에 이르고, 비자금 20억 마르크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에서 서독이 프랑스에게 비밀리에[14] 핵 기술과 돈을 지원한다면 핵개발후 프랑스의 핵 전력에 대한 서독의 지분을 인정한다는 계약이 성사되려는 찰나, 알제리 독립전쟁을 계기로 집권한 드 골 장군이 그 계획을 취소시킴으로서 프랑스의 단독 프로젝트로 남게 된다.

계약이 취소되자 당시 서독의 국방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힘은 군사력이며, 군사력은 오늘날 곧 핵력이다. 핵무장 없는 서독은 다른 동맹국의 군대를 위한 취사병이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독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판날 것이다." 하지만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 독일의 독자 핵개발은 용납되기 어려웠고, 대신 서독은 미국의 단거리 전술핵과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대량배치하고 훗날 핵개발에 성공한 프랑스로부터 핵우산을 제공받는 것으로 이를 해결해야 했다.[15]

한편 프랑스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드 골은 NATO를 미국-프랑스-영국의 3강 체제로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프랑스가 핵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또한 드골의 집권 초기인 1958년에는 NATO 사령관(미군 대장)을 접견해서 프랑스 영토에 배치된 미군 핵무기의 위치를 보고하라고 요청하자 사령관은 "다른 각료들이 동석한 자리에서는 곤란하다"며 망설였고, 이에 드골은 각료들에게 잠시 나가도록 지시한 후 단 둘이만 남은 상태에서 "자, 이제 말해보시오"라고 재차 요구했다. 하지만 NATO 사령관은 "죄송합니다. 제 직책상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의 일화

이러한 일들을 겪은 드 골은 그 어떤 수단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독자적인 핵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드 골은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핵개발을 주장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명백한 점은 우리 프랑스는 전적으로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 즉 독자적 핵타격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수년 내에 반드시 달성하여야 한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한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핵우산을 제공하려는 미국에 대해) 미국은 파리를 위해 뉴욕을 희생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프랑스가 공개적으로 핵개발을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유엔, 미국, 소련 등이 반발하며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프랑스의 핵개발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지만, 핵개발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나라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국제정치판의 법칙은 이번에도 맞아 떨어졌다. 후대의 북한, 이란, 이스라엘, 인도, 중국, 파키스탄에서 그 예를 알 수 있다. 거기에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대불 외교/경제 고립 전략은 프랑스의 핵무장과 자국에 대한 프랑스의 핵우산 제공을 바라던 이탈리아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경제 공동체 국가들, 특히 서독이 프랑스의 편에 남아 직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면서 무력화됐다. 결국 프랑스는 1960년 2월 알제리(당시 프랑스 영토)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작전 암호명은 푸른 날쥐(Gerboise Bleue).

핵실험 직후 드 골이 말하길 "위대한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국력, 물량을 비추어 보았을 때 소련이나 미국에 맞먹는 핵전력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비례억지전략이라는 핵전략을 채택했다. 일단 어떤 국가가 프랑스와의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 프랑스가 핵공격을 받는다면) 프랑스 국민들의 몰살은 기정사실이지만, 그렇게 되면 프랑스는 상대국가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핵을 쏟아부어 '최대한 많은 적국의 인간을 길동무로 끌고 가겠다'는 식의 무서운 전략이다.[16] 이는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최종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이 높기에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전략이었으나, 이 전략을 세운 당사자인 프랑스나 제3차 세계 대전 발발시 주 전장이 될 서독으로서는, 핵무기가 일단 사용되기 시작하면 인류문명이 멸망할 전면적 핵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미국-소련 양 초강대국에 강요함으로서 이들이 유럽전선을 무대로 핵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제안한 유연반응전략을 채택하면서 프랑스의 핵전략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맥나마라도 "유연한 대응 그딴 거 없고 그냥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유연반응전략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유럽전선에서 소련이 전술핵을 한 발 사용하면 미국도 한 발 사용한다. 소련이 두 발 사용하면 미국도 두 발 사용한다. 소련 서기장도 미국 대통령도 사람이기에 죽고 싶지 않으므로, 이러한 핵전략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을 직접적으로 겨누고 있는 장거리 전략핵의 사용가능성을 줄여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 허나 동시에, 이는 미국-소련 수뇌부가 전술핵사용을 결단하는데 따르는 부담감을 크게 낮춰주는 부작용이 있다. '핵을 사용하면 미국과 소련도 끝장이야. 그러니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핵은 최대한 자제해야지'가 아니라 '핵무기 사용을 '안전한' 유럽전선에 국한시킬 수 있다면, 전술핵 몇 발 쯤은 사용해도 괜찮지 않겠나?'로 상황이 바뀐다는 것.

당연하게도 이는 유럽국가인 프랑스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드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17]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미군 장성이 지휘권을 행사하는 NATO에서 탈퇴하고[18] 드골의 핵개발에 반발한 미국이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서 사실상의 독자노선을 취하게 된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유럽에서 걷어내고, '위대한 프랑스'의 휘광 아래에 전 유럽을 보듬으려는 드 골의 야심과도 일맥상통하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현재에도 프랑스의 외교노선 방향과 일치한다.

열혈 프랑스 민족주의자 드 골은 또 다시 말하길(…)

"NATO는 프랑스의 독립과 국익에 배치된다. 우리가 NATO 회원국이 된 것은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소련이 공격해 올 것으로 믿지 않는다. … NATO는 이제 더 이상 동맹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종속체제이다. 프랑스가 독립성을 회복한 이후에 가서는 프랑스가 서방국가들의 어떤 동맹에 참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책임져주는 미국과 같은 상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드 골의 고집은 좀 다른 방향으로도 영향을 주었는데, 바로 독일(서독)과의 관계 개선. 드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협력 국가가 필요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독일이 된 것이다. 이 부분은 프랑스-독일 관계 문서에 나와 있다.

결국 이 팽팽한 갈등은 미국 민주당 정권과 프랑스 드 골 정권이 모두 끝난 1969년에 끝난다. 정권을 잡은 공화당(미국) 리처드 닉슨 정권은 프랑스의 그 고집에 질려서(…) 결국 프랑스에게 기술지원을 해주기에 이른다. 어차피 프랑스가 독자적인 핵무장에 성공한 이상, 차라리 도와주고 관계개선을 시도하려고 한 것. 대신 나토 들어와 당시 프랑스는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하나의 목표를 맞출 수 있는 여러 개의 핵탄두"[19](MRV)를 탑재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미국이 이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맥마흔 법에 의해 기술의 해외이전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미국은 Negative Guidance라는 편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프랑스 기술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러면 미국 기술자는 그게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만 짚어주는 것이다. 스무고개 수수께끼 그렇게 하여 미국측 기술자가 범법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프랑스는 미국에게 이전받은 MRV기술을 바탕으로 한단계 더 높은 기술을 요구하는 MIRV(다탄두 각개목표설정 재돌입 비행체기술)은 자체적으로 개발해 1985년에 실전배치된 M4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미국은 네바다 핵실험장에 프랑스가 자신들의 측정장치를 가져다 놓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핵실험 회수를 줄여 개발비를 절약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아예 핵탄두를 들고 와서 직접 핵실험을 하라고까지 제안했으나, 무슨 생각인지 이건 또 거절했다. 대신 미국은 과학자들을 파견해 프랑스의 무루루아 섬 핵실험장의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미국은 프랑스에 여러가지 지원을 했지만, 끝까지 전략핵잠수함에 대한 기술은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해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전략핵잠은 해군의 보물이니까요. 결국 프랑스는 이 분야에서도 외부 지원 없이 자체개발에 성공한다.

당시 프랑스의 한 관계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핵무기 관계자들은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이 프랑스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아 핵무기를 발전시켰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게 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영국-캐나다 3국의 우라늄공급통제협정으로 핵개발을 저지당할 뻔 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프랑스는 미국에게 지원을 받은 이후로도 1970년대 독자적인 핵개발을 추진하던 한국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판매하려 시도하고, 이후 이라크에 핵발전소와 재처리시설을 수출하는 등 미국의 핵비확산 정책에 대해 불쾌한 입장을 표명하곤 했다.[20]

그 외에 이스라엘의 핵개발도 프랑스의 핵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국내외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21]

미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대신, 프랑스는 미국이 유럽 땅에 자신들의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지지했고, NATO군에서는 탈퇴했으나 유사시 프랑스군이 NATO 산하에 들어가는 것을 비밀리에 허락했다.

프랑스의 100% 순수 프랑스 기술로 만들어진 force de frappe(핵타격군)은 강하고 위대한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MRV개발과 몇몇 부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엄연히 자체기술로 핵실험에 성공했고 지상/수중배치 핵탄두와 그 발사체까지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가 만든 핵 우리가 쏘자 반면 영국은 SLBM체계 개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결국 미국의 폴라리스, 트라이던트 II 미사일을 구입해서 운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틀어졌고 미국은 프랑스에게 굴복을 강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때 프랑스의 핵개발 예산은 한 때 국방예산의 25%에 이르렀을 정도이며 여당이건 야당이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한 목소리로 조국의 핵무장을 외쳤다.[22] 그 대가로 프랑스군의 재래식 전력은 정체 일변도의 길을 걸었다. 리비아 내전에선 니콜라 사르코지가 폭격 좀 놨지만.현실은 폭탄 없어서 미국 혼자 캐리...

미국의 지원으로 프랑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프랑스는 미국을 위해 자국의 핵전략도 고쳐주었으며, 그외에도 미군의 유럽 배치를 허락하는 등 많은 걸 양보했다.

냉전은 끝났고, 비밀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정식으로 NATO에 복귀했고 이 비밀을 마침내 발견한 언론들에게 짧은 성명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으나, 이는 곧 묻혔다.

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

하지만 미국 내의 불쾌한 여론이 반영되었는지 미국판 고질라는 90년대 프랑스의 핵 실험 때문에 도마뱀이 변이되어 생기는 것으로 나온다. 일본 원작 고지라의 출처가 암묵적으로 미국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남쪽에서 왔다는 설정) 조금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

프랑스 뉴스 웹사이트 익스포저와 프린스턴대 등의 공동 연구 결과, 1960∼90년대 남태평양에서 진행한 핵실험으로 약 11만명의 현지 주민이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됐다고 보고했다. #

3. 같이 보기[편집]



[1] 식량, 석유, 무기 등을 캐나다와 인도에서 실어와야 하는 영국 입장에서는 이거야말로 치명타였다.[2] 소련이 넘어가면 그 시점부터 영국은 답이 없어진다. 더 이상 유럽에서 독일을 견제해 줄 세력이 없기 때문.[3] 5개의 눈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4] 여기서 핵투발 대상으로 독일이 논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근래까지는 "같은 유럽에는 핵을 안 쓰려고 했다"는 식의 인종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했으나, 최근에는 영국 입장에서는 포위해서 굶겨죽이면 그만인 일본과 직접 상륙해야 하는 독일의 차이, 빨리 태평양을 정리한 미국이 대서양으로 오기를 원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당시의 누구도 일본 제국이 독일보다 오래 버틸 줄 몰랐다(...)는 사실 등이 감안되어 그런 해석은 입지가 줄어든 추세다. 실제로도 독일이 아르덴 대공세자기 패망을 6개월~8개월까지 앞당기기도 했고.[5] 비밀리에 진행된 맨해튼 계획이 있는 줄도 몰랐던 미국 의회가 원자폭탄이 존재함을 알게 되자, "아니, 이렇게 좋은 무기를 왜 다른 놈들하고 나눠가져? 이건 오로지 미국만 가져야 함!"이라고 외치며 만든 법이다. 즉, 외교 관계 따위는 싹 말아먹고 의원님네들의 근시안만으로 만들어진 법. 하지만 당시의 반공 분위기도 한몫했다. 사실 소련에게 넘어가는 걸 더 우려한 법안이라... 그리고 이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6] 반면 영국에 핵기술을 넘기지 않은 이 조치가 공산주의 진영으로 핵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지연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이미 영국은 구식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원심식 제트엔진을 기술제휴랍시고 소련에 넘겨준 사례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롤스로이스가 자신들의 제트엔진을 소련에 팔아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처칠에 비하면 소련에 온건한 입장이었고 소련의 기술적 역량을 과소평가했던 애틀리 정부가 이를 승인했던 것이다 . 그런데 소련은 그렇게 엔진을 받아서 라이센스한 다음 라이센스 비용을 그대로 떼먹었다(...). 물론 비군사용으로 넘겼다고는 하지만 어떤 바보가 제트엔진이나 되는 물건을 비군사용으로만 놀리겠는가? 덕분에 2차 대전 당시의 Me-262 수준에서 놀던 소련 공군기들은 단숨에 MiG-15라는 괴물이 되어 많은 미군기를 바닥에 쳐박았다.[7] 학자들은 1940년부터 2010년까지 아마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이렇게 험악해진 것은 이때가 유일하리라고 평한다.[8] William Penney. 영국 물리학자로, 영국의 핵무장에 매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인해 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9] 대표적으로 핵 피폭시 전차의 생존성을 알아보기 위해 호주군 소속 센추리온 전차를 핵실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당시 센추리온 전차는 핵실험에서 생존했으며, 이후 제독 과정을 거쳐 1980년대까지 현역으로 사용되다 퇴역 후 보관 중이다.[10] 물론, 알더마스턴의 핵무기 연구소 과학자들이 본토 안에서 자리를 찾아보니, 요크셔 스킵시(Skipsea)가 최적이어서 2차 원폭 실험을 하려 했지만, 근처 방갈로 등에 피해간다고 결국 계획이 취소된다.[11] 현재는 키리바시의 키리스마스섬(Kiritimati)으로 불린다. 나중에 미국도 여기서 핵실험을 해준다.[12] 애초에 핵심 인력과 장비들을 가지고 있던 미국, 영국과 달리 국외로 망명한 자유 프랑스는 이런 것이 있을리가 없었으며 상임이사국이라고는 하나 2차 대전 당시의 활약도 상대적으로 미미했던지라 프랑스에 대한 취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는 카이로, 얄타, 포츠담에서 열린 전후 질서에 관련된 회담에서 프랑스 측이 초청받지 못했음을 통해 알 수 있다.[13] 물론 공갈을 잘 치는 흐루쇼프의 허세도 철수 요인 중 하나였지만 소련의 위협보다는 놀란 아이젠하워가 영프를 갈궈댄게 더 컸다. 그런데 이때 흐루쇼프가 생각한 것이 "아, '니 수도 핵 로켓으로 날라감 뿌우'를 하면 다 겁먹어서 나한테 기는구나."여서 이후로도 몇번 공갈을 더 치게 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라든가...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가 '대소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온건하다'는 이미지가 형성되면서 졸지에 민주당의 노선이 호전적으로 변화하여 존 F. 케네디의 강경정책이 등장하고, 영국과 프랑스 양국 역시 자국이 가지고 있던 독자적 열강으로써의 지위를 상실하였음이 명백해짐에 따라 새로운 국제정치적 영향력의 열쇠인 핵개발에 극히 집착하게 된 것.[14] 서독의 재무장은 바로 1년 전인 1955년에야 허락되었고, 징병 재개는 1956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니 그보다 더한 핵무장계획이 비밀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15] 한편으로 1970~80년대 서독에서는 자국에 배치된 미군 핵을 반대하는 반핵 운동이 엄청난 규모로 일어났다. 결국 1987년 미소가 동서유럽에 배치된 중거리 핵미사일을 함께 해체하는 데 합의하고서야 끝났다.[16] 이러한 전략은 현대에도 상대적으로 약소한 나라가 강대국에 대하여 취하고 있다. 양안관계에서의 대만이 대표적인 예시. 쉽게 얘기하면 넌 날 죽일 수 있고 난 널 죽일 수는 없지만 대신 너의 팔다리는 자르고 갈 수 있다는 메세지로 보면 된다.[17] 당시는 대만으로 피난한 중화민국이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UN의 상임이사국이던 시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UN가입도 못하고 있었다.[18] 전시에는 협조하기로 했다.[19] MRV는 60년대 탄도미사일의 부족한 정확도를 보완하기 위해 하나의 목표에 다수 핵탄두를 맞춰 파괴정확도를 높이는 유도기술로 각각의 독립된 목표물을 다수의 핵탄두로 맞추는 기술인 MIRV(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reentry vehicle)와 비교하면 한단계 낮은 단계의 기술이다. MIRV기술은 70년대 미국도 처음 보유했던 당시 최신예기술로 이 기술의 프랑스이전은 제한되었다.[20] 프랑스의 기술지원으로 건설되고 있던 이라크의 핵시설은 1981년 이스라엘 공군의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으로 모두 파괴되었다.[21] 아예 1960년대 프랑스의 핵개발이 처음부터 이스라엘과의 공동개발이었다는 추측도 있다. 다수의 유대계 기술자들이 프랑스의 핵개발에 참여했으며, 이들이 데이터를 그대로 가지고 이스라엘로 귀국해서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핵실험 없이, 핵무장을 완료한 것이 바로 프랑스의 핵실험 데이터를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22] 당시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드골 사임 이후에도 드골주의 성향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