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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의
제독으로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1939년
4월 18일 생. 고향은
충청남도 당진시이다.
인천고등학교(57회)를 졸업하고 1959년
해군사관학교 17기로 입학해 1963년에 졸업, 임관하였다. 도봉함장,
인천함장 등을 거쳐 1989년에
제2함대함대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지냈고 1995년까지 해군
작전사령관을 지낸 뒤에 해군참모총장에 올랐다.
해군참모총장 취임식에서 "
대양해군 건설 준비"를 선포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강영오(예비역 준장. 해군 교육단장 역임) 제독 등의 해군 출신 인사들이 언론, 기고 활동을 통해 군 내외에서 대양해군 건설에 관한 주장을 편 적은 있었지만, 해군 수뇌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에서는 안병태 제독의 참모총장 재임 시기를 대양해군을 지향하는 시초로 평가한다.
1996년 일본의
독도 망언을 계기로 한일 양국간의
해군력 격차 문제가 부각되자,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경항공모함의 확보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를 수용한 김영삼 대통령의 제가를 얻어 배수량 1만 2천톤급의 대형수송함(LPX) 사업을 대양해군 건설의 상징적 과제로 추진했다.
[1] 이후 2005년에 진수된 '독도'급 강습상륙함의 건조로 이어졌다. 자세한 사항은 김영삼 항모 항목을 참조.
하지만 육군 중심이었던 국방부, 합참의 반대로 경항모급을 염두에 두었던 LPX 사업은 설계예산조차 반영되지 못하고 백지화되고 말았다.
1997년 퇴임식 연설에서 "대양해군 건설은 이미 국민적 합의가 된 사항이니,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된다"고 발언하면서 다시금 반향을 일으켰다. LPX 사업을 통해 추진하려던
경항모 확보가 군 내부의 반대로 무산된 것에 관한 반발이었다는 것이 중론. 후임자는
유삼남 제독.
이후 한국해양전략연구소(KIMS)의 소장을 역임하는 등 퇴임 후에도 해군의 대표적인 원로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대양해군 건설론이 주류로 자리잡은 오늘날 한국 해군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강영오 제독과 더불어 대양해군 건설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2007년 해군작전사령부가 부산으로 이전하고 부산에 있던
제3함대 사령부를 과거의 목포해역방어사령부
[2] 실제로는 전남 영암군에 있다. 한때 해남군으로의 이전을 검토한 적이 있다.
자리로 이전하자 이를 두고 해군판 제2롯데월드 사건이라 부르며 비판했다.
관련기사 당시에 그 말고도
이은수 제독이나
강영오 제독도 개악이라며 비판했다. 목방사가 수심이 낮고 수로가 복잡하며 부산이 해작사가 위치하기엔 보안성이 떨어진다고.
[3] 오륙도 SK 뷰 아파트에서 부대 내부가 훤히 보인다.
해군본부가 정치적인 안배 때문에 기지를 이전했다고 비판했다.
해군 최초로
잠수함장을 지낸
안병구 제독이 그의 친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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