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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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진리의 연인
― 前 주교황청 한국대사인 성염의 평가
4세기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초대교회 교부(敎父) 중 하나이며 교회학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창설자.[2]
그리스도교 교파를 막론하고 두루두루 존경받는 성인이다.[3] 보수성향의 개신교에서도 이 사람은 존경하는 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게 이 사람이 살았던 시대가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가 분열되기 전이라서 이 사람의 신학관 중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가 공유하는 부분이 꽤 많을 수밖에 없다.[4] 축일은 가톨릭 및 서방 교회에서는 8월 28일, 정교회 및 동방 교회에서는 6월 15일. 상징물은 주교관과 성장(聖杖), 학자를 상징하는 책과 깃펜, 조개, 비둘기 등이 있으며, 양조업자, 인쇄공, 신학자의 수호성인이다.
그의 신학적인 사상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보나벤투라,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 가톨릭 관련 인물들은 물론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의 개신교 신학자와 존 밀턴 같은 시인, 르네 데카르트[5] ,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장 폴 사르트르, 한나 아렌트[6] ,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두루두루 영향을 끼쳤다. 사실상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의 인물들만 아니면 아우구스티누스를 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잘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교부들의 나무위키 문서와 비교했을때 이 문서의 분량부터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의 신학적 업적은 대체로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고, 젊었을 때는 양아치가 따로 없는 생활을 했다. 그런 쓰디쓴 청년시절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와 그 후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신의 마음을 써낸 것이 바로 《고백록(Confessiones)》이다.[7] 사실 회심 이전에는 동거녀와 사생아도 낳는 등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분명 문제가 있지만, 아직 그리스도교 윤리가 확고히 정착하기 이전인 고대 후기 로마 사회의 시선으로는 밑바닥의 막장까지는 아니었다. 이교 신앙, 애인과의 동거 및 사생아 등은 고대 로마 기준으로는 특별한 일이 아니였으니까.[8]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거녀와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한 건 아니었고, 약혼자가 있는 마당에[9] 다른 여자를 두는 등 밑바닥이 아닐 뿐 떳떳한 삶을 산건 아니었다. 거친 비유를 들자면, 21세기에 문란한 성생활이 세속의 관점에서 밑바닥 취급을 받는 건 아니지만 떳떳한 취급을 받지는 못하는 것과 비슷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던 시기이든 빛나던 시기이든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타는 사랑'이었다. 삶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그야말로 불꽃처럼 사랑하였다. 성염 교수는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를 '진리를 향한 구원(久遠)의 불꽃'으로 표현했다.[10]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중심이란 꼭 밑으로만 아니고 제 자리로 기웁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 그런 질서가 덜한 곳에는 불안하고 질서가 잡히면 평온합니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 당신 선물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라틴 문학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라틴 문학 말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로마가 아닌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인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황실에서 수사학 교수로 초빙할 정도였다. 문체 역시도 그의 삶을 반영하듯이 심미적이며 열정적이다.
이후 훗날 가톨릭 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교할 경우, 토마스가 대학 교수님으로서 정돈되고 깔끔한 논리적 문체를 사용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선의 사목자로서 수사학적이고 변증법적인 문체를 사용한다. 토마스가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자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내면에 대한 형이상학자이며, 절제된 감정의 토마스식 문체에 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체는 굉장히 열정적이고 투쟁적이다.
교회와 신학 역사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 토마스에 비해 훨씬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틴 신학의 진정한 창시자는 토마스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이다. 토마스의 공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몇 가지 불확실함과 애매모호함을 걷어 내고, 그의 사상을 질서 정연하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이어 주었으며, 보다 견고하고 확실한 철학의 무기를 활용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안들을 완벽하게 하고 진보시킨 데 있다. 토마스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를 자신의 첫 번째 스승으로 인정한 바 있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씀, 이재룡 등 번역,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제4권 736쪽
물론 방대함과 치밀한 구성에서 이 책을 능가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도 있다. 그렇지만 「신국론」을 읽고 있을 때, 우리는 「신학대전」과는 다른 독특한 감동을 받는다. 바로 이 책 안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지녔던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열정적 문체로 기술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수사학 전문가였던 노주교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 '백조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제가 1946년 초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몇 가지 작품을 접하여 읽었던 것은 유익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표현한 이런 개인적인 싸움은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집필한 내용은 위대하고 온전한 교과서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어딘가 비인격적이기도 합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집필한 내용 속에도 큰 싸움이 있습니다만 이는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발견됩니다. 이에 반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기 자신과 싸웠으며, 회심한 후에도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작품을 극적이고 아름답게 했습니다.
2. 이름[편집]
본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혹은 아오스딩[12] 으로 알려져 있다. 정교회에서는 성 아브구스티노스라고 하며, 철학계와 서양사학계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한국 개신교와 성공회에서는 영어식 발음으로 '어거스틴'이라고도 한다. 교회학자로서의 칭호는 '은총의 박사(Doctor Gratiæ)'이다.[13]
참고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은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가톨릭 내부에서는 이 인물을 원칙적으로 '아우구스티노'라고 호칭한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정식으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통해 외국 성인명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안에 대해 발표한 바 있다. (쉽게 풀어 설명한 기사.) 다만 어감이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가톨릭 내부의 자료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라고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부이고 주교이고 신학자이고 간에 거의 신경을 안 쓴다고 보면 된다.
3. 생애[편집]
3.1. 청년 시절에서 회심하기까지[편집]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관리인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어머니 모니카(Monica, 축일 8월 27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성사는 받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서 양육되면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고[14] , 370년에는 아들을 출세시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카르타고 대학에 입학해 수사학을 전공했다.[15]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371년 사망했는데, 점점 방탕해져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기가 막혀서, 죽기 직전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철학에 심취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비상한 머리에 스스로 도취하여 어머니의 바람과는 점점 멀어져 갔고, 372년부터는 노예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아데오다투스'[16] 라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왜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동거생활만 했는지는 불명이나,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이 고백록에서 "떳떳하게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 지각 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이었다." 라고 밝혔다. 아데오다투스는 372년에 태어나 388년에 일찍 죽었고, 여인과 동거하는 생활은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카르타고에서의 공부를 끝낸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 교수 자격증을 따 고향으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세웠지만 영 맘에 차지 않았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고백록 4권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 서로 마음이 잘 통했던 친구였던 듯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열병이 돋아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던 와중에 세례를 받았다.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세례받은 것을 갖고 농담을 던졌다. 그도 그럴게 그 친구 역시 의식을 잃기 전 기독교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 어쩐인지 그 친구는 그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았고 "나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말라." 하고 일갈했다.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에 크게 충격을 주었고, 얼마 뒤 그 친구는 다시 쓰러지고 결국 사망했다. 친구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고 슬퍼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택한 길은 친구와의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고향을 떠나 다시 카르타고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카르타고로 가 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진리와 악 등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19살 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17] 라는 책을 읽은 뒤로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경향이 더욱 심화 되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 모니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던 경험으로 그는 우선 성경을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가줘다준 키케로나, 그가 주로 읽던 수사학, 철학 책보다는 화려함이 떨어지는 성경의 문체 때문에 곧 그만둔다. 그때 그는 자신의 질문의 답이나 진리를 마니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을 가졌다.[18] 그래서 373년에는 열렬한 마니교도가 되었다. 그의 첫 저서도 마니교의 미학을 다룬 책이며, 자신의 친구들[19] 도 많이 마니교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철학자들의 말들에 비해 마니교의 가르침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의구심을 풀어줄 마니교의 교사 파우스투스가 자유학예는커녕 기본지식이나 간신히 갖추고 있는 인물임을 알고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20]
결국 382년, 그는 마니교를 떠났고[21] 9년간 몸담았던 믿었던 진리가 가짜였음에 허탈감을 느껴 진리는 알려질 수 없다는 회의주의 학파 아카데미아학파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신플라톤주의[22] 에 빠졌는데 그것도 잠시, 383년에는 아예 카르타고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로마로 가 수사학 교수 일을 했고[23][24] , 학생이 도무지 학비를 안 내자 질려서 이듬해 밀라노로 옮겨간다. 때마침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를 구한다는 전령이 로마시로 왔고,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시키려 하였던 로마의 시장과 마니교도들의 지원에 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로 떠났다.[25] 본래 로마는 어머니 모니카가 모르게 갔던 것인데, 이 소식이 어머니 귀에 들려와 아들을 찾아 밀라노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생의 턴포인트가 되는 인물인 성 암브로시오(축일 12월 7일) 주교를 만난다.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의 첫 인상에 큰 감명을 받았고[26] 그의 강론을 틈나는 대로 경청하곤 했는데, 딱히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진리를 얻고자 함이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말을 저렇게 잘 하나를 알아보려 한 것이었다. 계기야 어쨌든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와 그의 강론 내용에 점점 이끌리고 있었는데[27] , 그 때는 마침 자신의 여러 내적인 문제[28] 로 고민하던 때였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 살던 고향 친구가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극도로 절제된 수도생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때는 쾌락에 빠진 노예인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한탄했다고 한다.[29]
심란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택 정원을 거닐며 고민하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뭐라도 집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들어와 눈에 있는 책을 집어서 펼쳐봤는데, 그건 바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 로마서(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3~14절 (공동번역성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을 받아 개종을 결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30] , 그의 지인들과 카시키아쿰의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렀다.[31] 암브로시오 주교 밑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받는다. 또한 이듬해(387) 4월 13일에는 친구 알리피오(Alypius, 축일 8월 15일),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32세. 한편 15년 동안 동거했던 여인은 그의 회심을 알고 곁을 떠났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 여인 역시 회심하여 수녀원에 들어가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3.2. 두 아우구스티누스 논쟁: 회심의 신뢰성 논란[편집]
<고백록> 8권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극적인 회심과정이 감동적으로 기술되어 후대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아돌프 하르낙 이후로 처음으로 그의 회심의 역사성과 신뢰성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하르낙처럼 고백록 8권의 회심은 역사적으로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하는 주된 근거는 회심 직후에 쓰인 초기 작품들(소위 카씨키아쿰 대화록)과 고백록[32] 에서 말하는 회심과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복한 삶>이라는 저술에서 서술된 회심 과정은 밀라노 정원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하나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대화록 <아카데미아파 반박>에서는 하느님에 대해 ‘이제 약간 알기 시작했노라.’고 말했다. 또한 페라리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서 13:13-14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정작 회심 직후에 쓴 작품들에는 이 구절이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고백록 8권의 회심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기독교 신앙이 아닌 신플라톤주의에 빠진 철학적 회심이라는 주장이 거론된다.
이처럼, <고백록>과 '대화록'에서 말하는 회심과정의 모순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것이 마치 두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이 달라서 '두 아우구스티누스'라는 표현이 나왔다.
하지만, 그의 회심이 단순한 철학적 회심이라는 지적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관점을 따르는 연구자들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 후 몇 달 만에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신념이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믿음은 일치하는 면이 많다고 보았다[33] .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독백록>에 대한 <재론고>에서도 이때의 사상에서 몇 군데밖에 수정할 게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과거에는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설명했다. 사상이 완숙했지만 신학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된 것일 뿐 사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회심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
더 나아가 고백록 8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과정에 대한 실제 사건과 팩트를 그대로 단순 묘사하기보다는 극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으로 묘사했다. 구조적으로 대조나 의인화 같은 기법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인의 회심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예를 들어, 고백록 2권에서 자신이 배를 훔쳤던 나무[34] 와 8권에서 회심 이전 엎드린 무화과나무가 대비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우둔함과 허영심’이라는 자신의 옛 친구들과 ‘절제’라는 여인을 등장시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400년 무렵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386년에 한 회심을 풀이한 신학적 해석이 들어있다. 특히 회심 이후 발전시킨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의 주권은 하느님에게만 있다.'는 은총론적 관점에서 자신의 회심을 해석한 것이 고백록 8권의 회심이다.
3.3. 사제로서의 활동[편집]
387년, 그리스도인이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 및 친구와 더불어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 모니카는 도중에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고, 388년에 아프리카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수도 공동체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머지 않아 아들도 죽고 말았다. 후에 수도회원들은 점점 늘어났고 공동체는 단순한 수도생활을 넘어 일종의 성서 연구소로 탈바꿈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꾸려놓은 수도회는 한참 후인 13세기에 그가 정립한 회칙을 바탕으로 탁발수도회인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로 정식 발족한다.
391년, 사제가 되지 않고 수도생활을 더 하고 싶었던 36세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료를 더 모을 생각으로 히포로 출장을 가 미사에 참례했다. 아우구스티노의 명석함과 타의 모범이 되는 보속의 생활은 이미 그곳까지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히포의 주교 발레리오가 강론 중 히포에 새로운 사제가 필요하다고 한 순간, 사람들이 다짜고짜 아우구스티노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졸지에 발레리오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게 아닌데 싶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울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엉뚱하게 그가 주교가 되지 못해 서운한가 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395년에는 보좌주교가, 발레리오 주교가 세상을 떠난 396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수사학 지식까지 총동원하여 히포의 백성들을 위해 사목 활동에 집중함은 물론이고, 자신이 직접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으며, 삼위일체, 은총론 등의 영성신학을 연구하고, 방대한 양의 각종 저술활동을 통해 교회를 공격하는 영지주의(그노시스), 도나투스파[37][38] , 펠라기우스[39][40] , 아리우스파 등을 향해 쉬지 않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 중에는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마니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마니교 전력은 주교가 된 이후로도 평생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수많은 논쟁에 뛰어들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마니교 전력은 자신의 적들에게 인신공격까지 받을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고백록>의 집필 배경 중 하나도 지인들이 그의 생애가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받은 417년 이후에는 절충적 펠라기우스주의자인 율리안에게서 자신의 논리가 마니교적이라고 공격받았다.[41]
그러나 그런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나투스파들을 로마제국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무력진압한 일이 있었다. 물론, 이는 너무나 강한 종교적 광기로 가득찬 광렬 도나투스파들이 약탈과 방화 등 테러나 다름없는 행위를 일삼았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42] 그는 폭력을 써서라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종교재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43] 그러나 여기에도 오해가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칙적으로 '폭력적으로라도 개종시켜라.'를 주장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본래 도나투스파를 대하는데 있어서 많은 동료 신학자들보다 훨씬 더 온건한 편이었다. 처음에 그의 입장은 '박해는 악인이 하는 것이다.'였고, 도나투스파도 어디까지나 말로 설득해서 생각을 바꾸도록 해야 하며 국가의 공권력으로 탄압을 하는 일만은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동료 사제들을 달랬다. 근 10년에 걸친 온갖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도나투스 파와의 극한적인 대립과 폭력 상황이 이어지자 마지못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지, 이를 적극 권장하고 '폭력을 이용한 강제 개종'을 일반적인 정책으로 역설했던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극렬 도나투스 파에 대한 최후의 필요악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John Christian Laursen, Cary J. Nederman (eds.) Beyond the Persecuting Society: Religious Toleration Before the Enlightenmen, Philadelphia, 1998, p. 17.)
399년쯤에는 그의 3대 대작[44] 중 하나인 삼위일체론 저술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 중에서도 저술 동기가 꽤 특이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부분 이단을 논박하거나 논쟁적 상황, 또는 지인들의 요청에 의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유독 삼위일체만은 학문적 관심에서 저술하였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삼위일체론만을 저술해서 426년쯤에 최종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근데 이것도 주변 지인들이 중간에 원고를 몰래 가져가서 해적판으로 출시한 사건으로 그나마 앞당겨진 것이다.
죽기 3년 전에는 자신의 저서들을 다시 검토하는 <재론고Retractationes>를 지었다. 이때 100권이 넘는 저술 목록을 보고 놀랐다고. 특이하게도 재검토 작업을 그 책을 짓기 시작한 순서대로 진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사고와 행적을 추적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재론고>이다.
은근히 워커홀릭 기질이 있다. 주교가 된 이후로 그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우선 그는 히포의 주교이기 때문에 매주 설교를 해야했다.[46] 당시 주교는 교회일뿐만 아니라 담당 교구의 민사 사건도 해결하는 역할도 맡았기에 자잘한 사건들의 해결도 전담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회의란 회의는 빠지지 않고 거의 다 참석했다.[47] 그 와중에도 이단들에 대한 반박 저술이나 기타 저술도 끊임없이 지었으며, 말년에는 <재론고>를 쓰느라 자신의 책들을 전부 꼼꼼히 비평하는 작업까지 더해졌다.
427년에는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로마 제국을 약탈하며 북아프리카를
4. 대표적인 업적들[편집]
Et in suis quidem scriptis ille Deo adceptus et carus sacerdos, quantum lucente veritate videre conceditur, recte ac sane fidei, spei et caritatis catholicae ecclesiae vixisse manifestatur, quod agnoscunt qui eum de divinis scribentem legentes proficiunt. Sed ego arbitror plus ex eo proficere potuisse, qui eum et loquentem in ecclesiae praesentem audire et videre potuerunt, eit eius praesertim inter homines conversationem non ignoraverunt.
사실 진리의 빛 안에서 확인되듯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은 그분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소중한 주교였으며, 가톨릭 교회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올바르고 온전하게 사셨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그분의 거룩한 작품을 읽음으로써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분께서 교회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듣고, 직접 뵐 수 있었던 사람들, 특히 그분께서 민중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알았던 사람들이야말로 훨씬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포시디우스Possidius[49]
씀, 이연학 · 최원오 역주,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Vita Augustini 31,9
악의 문제와 죄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원죄 교리가 정립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그리스인들의 영향으로 사람이 짓는 죄를 외부적 요인에서 찾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죄의 원인을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찾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먼 옛날에는 죄를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 개념으로 보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관점을 돌려버린 것. 이외에 원죄가 남자의 정액으로 인하여 유전된다고 보았는데 이 부분은 그 당시의 시대적 한계로 현대인에게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플라톤주의적 답변을 내놓았다[50] . 그리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세상의 악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지적하였고, 악은 더 큰 선을 위한 조화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수용하였고 가톨릭의 입장이 되었다.
악의 문제에 대한 그의 논증을 한 번 살펴보자.
-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를 받았다.
- 하느님은 지선하신 분이시다.
- 선에서 악이 나올 수 없다.
- 따라서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에 대한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그 자신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방탕한 생활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임은 분명하지만, 또한 당시 서로마 제국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를 중심으로 성공적인 체제 개편에 성공하였고, 이러한 안정성 속에서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즉 자신들은 어떤 분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얻은 것인지, 곧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이고 그리스도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합의해야 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등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반면 서방은 동방과 같은 안정성을 누리지 못했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시기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있던 시기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대제국이 붕괴해가고 있었고, 야만족이 쳐들어와서 약탈이 일어나고 로마의 온갖 위엄이 박살나는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이 세상은 왜 이리 막장일까?', '영원할 것 같은 도시인 로마도 망했는데, 결국 인간의 도시(인간의 문명)는 멸망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하는 생각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시대적 부름에 응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이 막장인 이유를 '죄' 개념을 통해 논증하였고,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악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인간의 도시(인간의 문명)는 결코 영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즉 바빌론이나 로마처럼 아무리 잘나가는 문명들일지라도 이 법칙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오직 '하느님의 도시'만이[51] 영원하며,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도시(완전한 문명)라 하였다. 그리고 이 '인간의 도시'를 순례하는 '하느님의 도시'의 백성들을 이끄는 조직을 교회라 설명하였는데, 아우구스티누는 이러한 사상들을 그의 역작 <신국론>에서 체계적으로 논증해 버렸다. 그리고 이 책은 서유럽인의[52] 역사관을 돌려놓았다.[53]
고백록 11권에서 전개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굉장히 유명하다. 버틀란드 러셀 경은 그의 시간론을 '칸트의 시간론보다 훨씬 명료한' 이론이라 평가하면서 이 이론이 현대 과학의 관점과도 맞는다고 말하였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은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이라 보았다.[54] 그리고 우리가 습관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을 구분하는데,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유일하게 현재만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과거는 현재에 대한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에 대한 기대'로써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100년 전', '10년과 20년 뒤'처럼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는 말을 쓸 수가 없는데,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 11권에서 이 문제에 대해 길게 고민한 흔적을 알 수 있다.
<교사론>에서는 언어철학을 다루었는데, 우리가 쓰는 단어가 그 실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예를 들어, '해'라는 단어를 쓰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해의 표징일 뿐 진짜 자연상에 존재하는 해를 인식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이러한 언어철학은 비트겐슈타인 같은 언어철학자에게 계승되기도 하였다. [55][56][57]
구원론에 있어서는 행위구원론[58] 을 펼치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맞서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주장했으며, 당연히 후대 그리스도교 신학[59] 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에페소서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다. 이를 종교개혁 시기 루터가 로마서에 근거한 이신칭의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칼뱅의 '오직 은혜'와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가 영향을 받았다.
삼위일체론 교리의 발전에도 커다란 업적을 세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 성자 성령을 관계의 측면에서 접근하여 세 하느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하느님은 삼위일체인 한 분이기 때문에 삼중의 존재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언제나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느님이 '하나의 본질과 세 위격'을 지니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헨 폴라(ευ πολλα) 논리'로 해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헨 폴라를 하나이면서 다수를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플로티누스는 일자와 그로부터 유출된 부산물의 존재 표현 방식을 '하나이며, 다수인' 헨 폴라로 설명하였는데, 이 논리를 아우구스티누스가 답습하여 '한 실체 세 위격'의 표현으로 설명하였다.[60] 따라서 세 하느님, 세 본질 등의 말은 불가능할 뿐더러 잘못된 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삼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니케아 신조를 따랐지만, 성령이 성자와 성부로부터 발출된다는 생각을 견지하였다.[61]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심리학적 유비를 통해서 자신의 삼위일체론 교리를 강화했다. 그 유비의 요점은, '마음과 그 마음 자체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사랑하며 또 그 자체의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과 '기억-지성-의지', 이 3가지는 하나이며 다 같으며 나눠질 수 없고, 삼위일체의 흔적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는 것.[62][63] 서구라틴교회의 신학자들, 칼뱅이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64]
이처럼, 웬만한 기독교 철학과 신학 분야에 두루두루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이듯이 기독교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이다라는 평가까지 존재할 정도이다. (시카고대학 대니얼 윌리엄스)
前 주교황청 한국대사인 성염 교수가 번역한 <신국론>의 해제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무수히 많으나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굳이 꼽는다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칸트라고 했다. 문화사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철학과 문학에서 최후의 대가다.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플라톤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위대한 라틴 사상가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중략)
사람들이 이 교부 철학자에게 크게 매료되는 까닭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 속에 숨겨진 진리에 대한 사랑이리라.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진리를 향한 구원의 불꽃' 또는 진리에 대한 열애(熱愛)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 하고[65]
규정하고, "아, 진리, 진리! 당신을 그들이 하고한 책들에 한 목소리로 자주, 또 가지가지로 내게 속삭여 줄 때,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사무치게 당신을 그려 애타하더이까?"라고[66] 외친다. 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는 음식이었으며, 그는 온 생애로 철학을 살았고, 삶 전부를 바쳐 진리를 사랑했다! 진리의 관상가가 아니라 진리의 연인이었다!그 진리를 일컬어 '임'이라 부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임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라면서 저 유명한 <고백록>을 시작한다.[67]
사상적 방랑을 하면서도 그는 이 진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누구인지를 예감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o aeterna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68]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라고[69] 헌신을 선언했고 그리고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여생을 살았던 것이다."진리에 대한 사랑은 경건한 여가를 찾는 것"이기에[70]
그는 종교적 본질인 사랑을 정의하여 "우리가 진리를 고수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참사랑"이라고[71] 한다. "사랑이 진리를 깨닫는다."라는[72] 유명한 명제가 여기서 유래한다. 진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정을 보여주는 구절로는,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저 탄식, 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하는 고백이 있다: "오, 진리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73]
4.1. 저술 목록[편집]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선종하기 3년 전인 430년, 평생의 저작을 검토 수정하는 작업을 하고서 〈재론고 Retractationes〉라는 서명을 붙였다. 거기에는 방대한 분량의 〈서간 Epistulae〉과 〈설교집 Sermones〉, 그리고 히포의 성당에서 수시로 해오던 〈시편 상해 Enarrationes in Psalmos〉를 제외하고도, 93권의 저서가 언급되고 있다. 그 후에도 10여권을 더 저술하였으니 사실 작품은 100권을 넘는다.
다음은 한국교부학연구회가 공인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목록이다. 한국어 제목은 한국교부학연구회의 〈교부문헌 용례집》과 《교부학 인명 지명 용례집》(하성수 엮음, 분도출판사 2008)에 의거했다.[74]
5. 비판[편집]
5.1.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대한 비판[편집]
서방에서 매우 존경 받는 교부이고 서방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거의 다 이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업적을 쌓은 인물이기는 하지만 가톨릭에서든 개신교에서든 '아우구스티누스 반대하면 이단'이라는 식의 단순화는 하지 않는다. 개신교에서는 그의 조직으로써의 교회를 강조한 교회관, 마리아를 높이 평가하였던 마리아론 등을 반대하며,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구원론 관련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비판 의견이 다소 있다.
사실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이런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많은 영혼이 구원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정 어린 염려의 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종말론은 패배주의Laxismus만을 겨냥한 게 아니라, 중죄를 지었으면서도 영원한 벌은 없다며 죄책감을 가질 줄 모르는 소위 외람된 희망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이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렇게도 위대한 인물이, 그렇게도 많은 신앙인이 의지하는 교회의 한 인물이 복음서가 정해놓은 경계를 넘나들면서까지 종말론을 분칠했다는 것이리라.55
[주석] 55. 여기 결론을 대신해서 프랑스 신학계의 두 거두의 말을 인용한다.
||"아우구스티노는 바오로의 변증법적 대조명제를 역사적 대조명제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은총신학이 원죄신학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톨릭신학은 이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마침내 찾아냈다." [Henri Rondet, in ''L'Esprit Saint et l'Église''(Paris: Fayard, 1969), pp.173-174]||
||"아우구스티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사랑 위에 이교도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올려놓았다. 사실 이교도들은 은총을 인간 본성에 내재된 욕구로 생각했고, 죄로 기울어지는 욕망과는 정반대의 실재로 이해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심지어 죄인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꼴이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가 하느님의 자비를 끝까지 거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자비에 굴복하지 않게되면, 은총은 필연적으로 죄인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원예정설은 여기서 제한을 받는 꼴이고, 하느님께서는 만인의 구원을 원하신다고 전하는 바오로의 생각(1티모 2,4)과도 대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그 누구도 지옥에 가기를 예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위대하고 거룩한 아우구스티노의 결함이라면 구원 역사의 형평성을 깨트렸다는 것이고, 인간의 구원에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아담에 집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심판 개념이란 오롯이 원죄로 정향되어 있어서 장차 오실 구원자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부께서 모든 심판 권한을 넘겨주실 바로 그 구원자 말이다. 도대체 아우구스티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를 누구에게 들어서 안 것일까? 하느님은 이에 관해서 어떤 것도 계시하지 않으셨고, 더구나 살생부가 있다는 말은 하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오로지, 그러나 분명하고 명확하게, 아니 오히려 격렬하고 끊임없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설교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두려워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친구이지만 그를 배신할 수도 있는 소지가 다분한 우리에게 이를 경계하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셨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아담 안에서 모든 세상을 단죄해 버린 것이다. 그는 지옥에는 아무도 없다고 장담한 오리게네스보다 오히려 지옥에 대해서 덜 알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아우구스티노가 지옥에 대해서 단언한 그 모든 지식이 어디에서 왔을까?" [André Manaranche, Le ''monothéisme chrétien''(Paris: Cerf, 1985). p.238]||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구원 이야기》Was dürfen wir hoffen?, 김관희 신부 옮김, 바오로딸, 2018, 97-99쪽
《신국론》 XXI 12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은총으로 구원받을 이의 수보다 멸망할 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 말은 무책임한 하나의 신학적 타락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실행적인performativ 본문을 정보 제공적인informativ 본문으로 바꾼다.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신부,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Am Ende das Nichts? Über Auferstehung und ewiges Leben, 김혁태 신부 옮김, 생활성서사, 2022, 396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받는 존경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도 안 될 것이다. 사실 위에서 소개한 박승찬 교수의 평이나 베네딕토 16세의 평에서 보듯, 아우구스티누스가 받는 존경의 원인은 "아우구스티누스는 틀린 명제를 말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그가 보여준 극적인 삶과 아름다운 문장 등 종합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5.2. 신플라톤주의 철학 측면에서의 비판[편집]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접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는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항상 신플라톤주의로써만 신학을 관철한 것은 아니다. 신플라톤주의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신플라톤주의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칼을 겨눌수 있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컨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식론적 상승을 체험하게 된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신을 관상하게 된다. 관상의 결과는 신이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를 정립한 플로티누스의 일자(一者)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일자를 '존재를 넘어서' 있다고 설명한다. '존재를 넘어서'라는 말은 형언불가능하고 어떠한 제한도 없음을 의미한다. 플로티누스는 '존재'를 '지성'의 단계에 위치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이 '존재'임을 플로티누스를 통해 획득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어디에서 이 개념을 획득한 것일까? "나는 있는 나다(Ego sum qui sum)"라고 자신을 밝히는 탈출기 3장 14절의 구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을 '존재'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론의 핵심적 부분은 신플라톤주의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이고 성서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신플라톤주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신플라톤주의의 몇 가지 부분이 그리스도교 교리와 충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플로티누스는 유출을 필연적인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강조한다. 둘째,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은 범신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신과 피조물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한다. 셋째, 플로티누스가 설명하는 유출은 단계적이다. 즉, 일자가 동시에 지성과 영혼,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은 모든 것을 동시에 창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세 가지 측면에서 신플라톤주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사상에 기독교 신학과 더불어 깊은 영향을 주었던 신플라톤주의는 온전히 기독교 친화적인 철학이 아니었다. 초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포르피리오스 등이 기독교에 칼을 겨누었고 기독교가 서구의 보편적인 사상이 된 후에도 플레톤 같은 이들이 신플라톤주의적 입장에서 반기독교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이후 플레톤의 영향을 받아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신앙내에서 포섭하려 한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라틴어로 번역한 플라톤 전집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술에 영감을 받아 기독교 정통 신학에 도전장을 내미는 학설을 계속 견지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의 근본적인 사상은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았다. 따라서 어찌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학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의 그 줄타기가 서방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쌓는데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말이다.
5.3. 교회를 미혹한 최대의 음녀이자 거짓선지자 라는 주장[편집]
아우구스티누스는 개혁주의를 정립한 칼빈마저도 그릇된 길로 인도한, 계시록의 두 짐승을 탄 음녀라는 해석과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해석을 받아들이면 아우구스티누스 위에 신학을 세운 카톨릭은 첫째 짐승 이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신정론 위에서 신학을 세운 개신교는 둘째 짐승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최초에 구약의 심판하는 신과 신약의 사랑하는 신의 양면적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니교에 심취한 것 부터 시작하여, 마니교 고위성직자들의 무지와 무식에 질려 기독교로 전향한 이후에도, 신의 계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철학을 통한 논증에 평생을 집착한 그의 모습은, 신에 대한 믿음의 씨가 그 안에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결국 뛰어난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온 이레나이우스의 신정론을 폐기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이라는 희대의 거짓 교훈을 완성했다. 즉, 그는 야훼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세부 주장은 악의 문제/개신교 참조.
6. 어록[편집]
(Cum dilectione hominum et odio vitiorum).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춰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드러난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말라.
참다운 행복이란,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그리고 당신을 위한 기쁨입니다.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고, 언제 죽음이 올 것인가 하는 것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하느님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
(Quimirum si non comprehendias? Si enim comprehendis, non est Deus).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을 때는 대답을 알고 있지만 막상 묻는 자에게 설명하려면 대답을 알지 못한다.
그대가 의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지 않는지 식별하라.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의심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거든, 이 확실성이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라 …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유의 법칙을 확립할 수가 있다: 누구든지 자신이 의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자는 적어도 자기가 의심을 한다는 한 가지 진실은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는 대상, 의심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확실하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에 대한 확실이다. 누구든지 진리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는, 자기로서는 의심을 하지 않는 진실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는 진실한 사물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가 없는 법이다.
참된 종교(De vera religione) 39,73.[76]
33살의 나이를 먹은 내가 언젠가는 지혜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데 희망을 접어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죽을 인간들이 선이라고 간주하는 다른 모든 것들을 하찮게 여기면서라도 나는 이 진리를 탐구라는데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아카데미아 학파 반박(Contra Academicos 3,20,43.)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Remota itaque i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
신념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며, 그(신념)에 대한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된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
불합리하지만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죄를 질책하시는데, 그대도 자신의 죄를 질책한다면 그대는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과 죄인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대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죄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구원하시도록 그대가 만든 것을 부수십시오. (중략) 그대가 만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기에, 그대의 선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행의 고백은 선행의 시작입니다. 그대는 진리를 행하고 빛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h 발음을 정확히 하는 사람은 교양인으로 통했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발음이나 문법에는 전전긍긍하면서 인간 사이 기본 예의는 지키지 않는 세상 풍조를 지적하는 것. 어떻게 보면 현대의 이른바 '문법 나치'의 폐해와 유사하다. 또한 라틴어와 로망스어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h의 묵음화 현상에 대해 증언하는 소중한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옛날 발음 습관이 마음에 들어 간직하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 homo(사람)라는 단어를 발음하면서 만일 문법에 거슬러 첫 음절을 기식음氣息音 없이 omo라고 발음한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사람으로서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당신의 계명에 거슬리는 짓인데, 사람들은 저런 미움을 갖는 일보다 이런 발음을 두고 훨씬 심하게 불쾌하다고 할 것입니다. (…) 그러다보면, 웅변의 명성을 추구하는 인간이 인간인 재판관 앞에서, 인간 대중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지독한 증오심을 품고서 자기 논적을 공박하면서, 혀를 잘못 놀려 '인테르 오미네스inter omines'로 발음하는 일이 없도록 극도의 조심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지성의 흥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사람을 갈라놓는 일에는 도무지 조심을 않습니다.
《고백록》 1,18,29 中
거기서 저는 제 자신에게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았고 당신의 이끄심으로 저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는데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신께서 저를 돕는 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들어가고 나서 저는 제 영혼의 어떤 눈으로 보았습니다. 제 영혼의 눈 바로 그 위에, 저의 지성 위에 불변하는 빛을. 모든 육신에 선연한, 예사로운 빛이 아니었고, 그런 빛과 종류가 같지만 다만 크기가 훨씬 더해서 무척이나 환하게 반짝이는 그런 빛도 아니었고, 다른 것이었으니 저 모든 빛들과 아주 다른 빛이었습니다. 저의 지성 위에 있다고 해서 기름이 물 위에 뜬 그런 것이 아니었고,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그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 빛이 저를 만들었으므로 제 위였고 그 빛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제가 그 아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이는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는 영원을 압니다. 사랑이 그를 압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을 당신을 향해 한숨짓습니다.[77]
《고백록》 7,10,16 中
여담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청년 시기부터 천지창조의 하루가 우리가 알고 있는 24시간과 같지 않는 등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실제 우주 모델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78] 나중에 사제가 된 뒤에,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헛소리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대개의 경우, 지구와 하늘과 이 세상의 구성요소, 천체의 움직임과 궤도 그리고 크기와 상대적 위치, 일식과 월식의 예측, 일년과 계절의 순환, 동물과 식물 광물 등의 종류 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 비신자들도 많이 알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이성과 경험에 의한 명확한 것이다.
그런데, 비신자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앞세우며 그러한 주제에 관해 사리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어 비신자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창피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 수치는 단지 무지한 개인이 조롱받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믿음의 울타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신성한 성경 저자들 역시 그렇게 무식하다고 생각하게 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힘들게 일한 것도 소용없이, 우리의 성경 저자들이 배움이 없는 이라 여겨져 그들에게 비판받고 거부당하게 될 것이다.
만약 비신자들이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이 실수를 하고 우리의 성경에 대한 그런 멍청한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의 경전이 자신들이 경험과 이성으로 습득한 것들에 대해 오류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 영생의 희망, 하늘의 왕국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경솔하고 서툰 성경 해설자들이 유해한 오류에 빠져 우리의 신성한 성경의 권위 밖의 이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은 보다 현명한 그들의 형제들에게 전에 없는 곤란과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럴 경우, 그들의 멍청하고 명백히 틀린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그 증거로써 성경을 내세우고 심지어 그들이 기억하는 많은 문장들이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티모1 1:7)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XIX-39, A.D. 408
De genesi ad litteram 1.19.39
즉 창세기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창세기에 담긴 신학적인 의미를 꼼꼼하게 연구해서 받아들여야지, 문자로 기록된 내용 자체만 어설프게 받아들이면 오히려 비신자들에게 망신당하고 다른 신자들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라는 뜻. 더불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주가 6000년이라고 믿었지만, 순식간에 시작해 일종의 씨앗에서부터 자라나 불완전한 형태들이 다양한 생물들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정의로운 전쟁론'을 주장했고, '매춘은 처녀 및 결혼한 부인을 (강간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이라는 식의 주장으로 마르틴 루터 등에게 엄청 까였다는 말이 있다. 일단,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라 '적법한 전쟁'이 원뜻에 더 가까운 의미이며, 더욱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적법한 전쟁론'은 전쟁을 하라고 부추기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탄압을 받던 소수종파 시기에는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 등의 논의를 할 필요가 없었지만, 제국의 국교가 된 이상 전쟁에 대한 이론적 정의는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전쟁을 안하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이는 현실에서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쟁론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단순화시켜서 '적법한 권위에 의해서', '정당한 이유로', '올바른 의도로' 수행되는 것만이 '그마나 용인할 수 있는 물리력의 사용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적법한 권위'는 합법적인 정부를 의미하며, '정당한 이유'는 방어전쟁과 적의 공격으로 빼앗긴 영토의 수복을 의미한다. (Asbridge, 2010) 이는 필요악으로서 전쟁이 용인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세운 것이지, 전쟁을 정당화한것도 소위 '성전' 개념을 내세운 것도 아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 적용하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쟁론은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는 논리다.
매춘에 대한 주장도, 매춘을 필요악으로 여긴 것에 가깝다.
창조와 전쟁, 매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보면 종교적인 교리와 성경의 문구들을 현실에 맞도록 해석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속세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거나 현실성 없는 종교적 순결성을 내세우는 대신, 현실이 '하느님의 나라'와는 달리 추악하고 어리석은 면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정하되 그 추악함과 어리석음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하고 극복할 수 있는지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보십시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던가?"라고 따지는 사람에게 제가 대답합니다. 상대방의 질문이 심하다고 해서 누군가는 "심원한 것을 따지는 사람들에게 지옥을 마련해 두셨다."라고 대꾸했다는데 저는 그런 대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답변을 찾는 것이 다르고 웃어넘기는 것이 다릅니다. 저는 그런 대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기꺼이 "모르는 것은 모른다."라고 대꾸하겠습니다. 심원한 것을 따져 묻는 사람이 조롱을 당하고 거짓 대답을 하는 사람이 칭송을 받느니 차라리 이런 답변이 낫습니다. 그러나 저희 하느님, 저는 당신을 모든 창조계의 창조주시라고 합니다. 또 '하늘과 땅'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창조계를 알아듣는다면,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기 전에 하느님은 무엇을 만들고 계시지 않았다. 만일 무엇을 만들고 계셨다면 창조계를 만드는 일 말고 무엇을 만들고 계셨겠는가?" 아무 피조물도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무 피조물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제가 아는 전부이며, 뭔가를 제가 안다면 유익이 되게 알고 싶으며, 저 스스로도 제발 그렇게 알고 있었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고백록》 11,12,14[80]
그대의 시선이 아직도 너무 연약하여 지혜가 그대의 시선을 물리치거든 지성의 눈을 저 길로 향하라! 지혜가 우아하게 모습을 나타냈던 저 길로 향하라! 다만 기억하라. 그대가 잠시라도 시선을 돌린 것은 어디까지나 더욱 힘있고 더욱 건강한 사람이 되어 그것을 다시 바라보기 위함임을!
―자유의지론 2권 XVI. 42 中
Ego vero evangelio non credrem, nisi me catholicae Ecclesiae commoverat auctoritas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복음서라 해도 믿지 않겠노라.
-《마니교 기조 서간 반박》Contra epistulam Manichaei quam vocant fundamenti 5,6
7. 그밖의 이야깃거리[편집]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한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이 이 성인의 이름이다. 칼의 노래를 집필한 소설가 김훈의 세례명이기도 하다.
2014년에 사망한 가수 신해철의 세례명이 바로 이 성인의 이름이다. 신해철이 세례를 받았던 시절엔 표기법이 지금과 달라 장례식 자리에선 '아우스딩'으로 표기되었다. 생전에 신해철은 자신의 세례명이 된 이 성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타락이 꼭 나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예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언급한 것이다. 이 세례명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추천했는데, 훗날 가수가 된 신해철은 자신의 미래 모습을 어머니가 예견한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신해철은 성장 후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반대로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계와 거리를 둔 냉담자가 됐지만 교적은 어머니를 위해 유지했다.출처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철학 서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다. 정확하게는 1953년 김정준이 <고백록> 13권 중 10권만을 중역하여 출간했다. 최초의 번역 철학서가 중역에, 그것도 완역도 아니라는 데에서 당시 한국의 번역 수준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최초의 <고백록> 라틴어 원전 완역은 최민순 요한 신부의 번역이다.[81] 현재는 라틴어 원전 번역만 5종 이상(선한용, 김기찬, 박문재, 최민순, 성염 등)인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정말로 어울린다.
정조를 잃은 여성과 명예를 잃은 자들에게 명예살인 형식으로 자결을 강요하거나 몰래 죽인 다음 자살로 꾸미는 악습을 막기 위해서 자살을 체계적으로 죄악화시켜 유럽권에서 있던 명예살인 비슷하게 사회적인 피해자들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악습을 사라지게 하는 것에 공헌했다. 즉 자살자는 지옥에 떨어져라식으로 한 것이 아니라 범죄 피해자들을 보호하고자 한 것으로 자살자에 대한 차별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의도는 퇴색되고 자살=지옥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행적을 보면 자살을 죄로 보았지만 그들이 지옥에 고통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