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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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 최종 계급은 친위대 중령[5] 이다.
독일 프로이센 출신으로, 부모를 따라 오스트리아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치하의 독일로 귀국해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축출 및 학살전문가로 통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직접 지시를 받고 6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물론 최고 책임자는 아돌프 히틀러였지만, 그 실무를 책임지고 관할하며 집행한 건 아이히만이었다. 힘러, 하이드리히와 함께 실질적인 홀로코스트의 주동자라고 봐도 무방한 인물.
남미로 성공적으로 도주하였으나 가족의 누설로 이스라엘 요원들에게 체포되었고, 1962년 5월 31일 이스라엘 라믈라(الرملة רַמְלָה)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은 프로이센 왕국의 졸링겐(Solingen)에서 태어났다. 회계사였던 아버지 아돌프 카를 아이히만이 191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린츠로 직장을 옮겼고, 다음해 1914년에 나머지 가족들도 린츠로 이사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아이히만은 안색이 검었기에 다른 아이들은 그에게 유대인 같다며 놀려댔는데 여기에서 그의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오토의 아버지인 카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종군했다가 전후 다시 린츠에서 사업을 시작해 1920년에 가족들은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1925년 ~ 1927년까지 북오스트리아 전기설비 회사 판매부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했다. 오토 아이히만은 기계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오스트리아로 갔는데 아버지의 사업이 부진해서 학비가 떨어지자 대학을 중퇴한 이후 린츠 지역 정유회사에서 외판원[6] 으로 일하다가,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1930년에 다시 독일로 갔다. 아이히만은 야외집회에서 나치당과 처음 접하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훗날에도 자백했듯이 1932년 4월 린츠의 변호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유에 따라서 나치당에 가입했고 친위대에 들어갔다. (26세)
오토 아이히만은 나치당의 당원번호 889895번을 받고 오스트리아 분기에 합류했다. 1932년 4월 1일에 나치당에 들어간 아이히만은 1932년 11월에 나치 친위대 오스트리아 지부에 들어갔고, 슈츠슈타펠의 회원 번호 45326를 받았다. 처음에 아이히만은 나치당에 그다지 엄청난 관심이 없었으나 곧 동료의 예를 들어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와 같은 나치당원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1932년에 아이히만은 일반친위대의 임원으로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했으며, 1933년 오스트리아가 나치당을 불법화했지만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독일로 귀국했다. 독일로 귀국한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 친위대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1934년 베를린에 자리잡아 나치 친위대의 보안국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7]
SS의 멤버가 되어, 정치범을 수용하던 강제수용소인 뮌헨 교외의 다카우 강제수용소에서 일하면서 친위대의 실력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목을 받았다. 주목할 점은 그가 린츠에서 독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보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경력을 쌓은 아이히만은 1937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대량이주계획을 평가하기 위해서 헤르베르트 하겐의 부관으로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하이파에 도착했지만 비자를 받지 못해 이집트의 카이로로 향했다. 여기서 영국의 방해공작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의 입국을 거부당한 아이히만은 독일의 유대인 강제이주 정책은 모순이 있다고 판단했고, 경제적인 이유를 덧붙여서 유대인의 이주를 반대하는 입장을 보고서로 올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193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슈츠슈타펠 보안국의 유대인 추방을 떠맡았다.
2.2. 나치당에서의 학살 행각[편집]
아이히만은 단순히 지시 사항 대로 서류만 성실히 써내고 도장이나 찍어주는 평범한 행정관료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 추방, 수송, 학살의 최고위급 전문가였다. 훗날 모사드의 납치에는 법적 단죄뿐만 아니라 그를 조사해서 진상을 더 확실하게 밝히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1년 아이히만은 친위대 소속 대대장(중령)으로 진급하며 국가안보부 제5국 즉, 게슈타포 유대인과의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임명된 이후 폴란드 서부지역에 있는 수용소에 파견조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의 시체가 쌓여있는 끔찍한 광경을 봤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명령으로 각 차관급 인사들이 베를린 교외의 고급주택지인 반제에 모여서 이른바 "반제 회의"가 열렸는데 아이히만도 여기에 참석했으며, 특히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책"이 결정되는 그 회의석상에 참석했다. 다만 말단이라서[13] 한 일은 서기 비슷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이때의 회의가 아이히만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미쳤는데, 첫째로는 하이드리히와 뮐러를 비롯한 상관들과 친분을 쌓은 것이고, 둘째로 이렇게 높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통계자료마냥 유대인 "최종해결책"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라고 자기합리화를 해버린 것이었다."우리는 공무원이며 국가를 위한 행위일 뿐이다."
전쟁 중 아이히만은 제국안전중앙부에 있으면서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가 되었다. 아이히만은
라며 자랑했는데 이 실적은 상부의 주목을 받아 그는 1944년에 헝가리로 급파되었다. 아이히만은 바로 유대인 수송 과정에 착수해서 현지 화살십자당의 지원을 받아 무려 40만명의 유대계 헝가리인들을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다."500만명의 유대인을 열차에 태웠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절멸수용소와 학살의 현장을 확인하고, 지도하면서 여러 학살 지역에 나타나 학살을 지시했다. 그는 유대인 대학살을 고안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관리자이자 조직가로서 유대인이라는 적을 말살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이런 업적(?)들로 철십자훈장까지도 받았다.
아이히만이 유대인들을 얼마나 열심히(?) 학살했었는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었던 하인리히 뮐러는
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만약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다."
심지어 1945년에 독일의 패색이 깊어지자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는 <유대인 학살중지령>을 내렸지만 총통의 명령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이히만은 이에 따르지 않고, 계속 헝가리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홀로코스트를 계속해서 수행했다. 이 행동은 훗날 이스라엘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자발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주도 및 수행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아이히만은 소련군이 진군해오자 헝가리에서 탈출해 지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있었던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지만 칼텐부르너는 아이히만이 자신과 똑같이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연합군의 중범죄자라 책임 추궁이 무서워서 그와 만나길 거절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의 책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패전이 가까워지자 사진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어느 날 자신의 사진이 찍히게 되자 그는 화를 내면서 카메라를 부숴서 사진찍은 사람에게 카메라 값을 변상해준 적도 있었다.
2.3. 전후[편집]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1,000만 명의 유대인, 아니 세상의,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만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한 놈에 불과했을 겁니다. 나는 나치 당원들과 똑같이 생각했으며, 함께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이상주의자였습니다."
2.4. 체포[편집]
사실 아이히만은 비교적 잘 숨은 편이었는데, 1957년에 덜미가 잡혔다. 그 이유가 가관인데, 장남 클라우스 아이히만이 유대인 혈통을 가진 여자친구인 실비아 헤르만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유럽에서 '유대인 제거'에 앞장섰다고 자랑하다가 덜미가 잡힌 거라고 한다.(...)[14] 실비아의 아버지 로타어 헤르만부터가 아이히만의 희생자로, 부모를 잃고 자기도 역시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클라우스랑 헤어지고 이스라엘 외무장관에게 즉시 신고했고[15] , 그녀의 고발로 2년에 걸친 추적, 수사 끝에 모사드는 요원 7명으로 아이히만의 자택 인근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그를 납치했다. 차에 태워진 아이히만은 체념한 듯 독일어로 말했다.
모사드는 그의 신원을 즉시 확인한 뒤, '여기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에서 재판받고 죽을 것인가?' 라고 묻자 그는 '편한 대로 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증거는 귀였다고 한다. 코나 입은 성형수술로 고치지만 귀까지 고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가방에 카메라를 숨겨서 촬영한 사진이 모사드로 하여금 그가 아이히만임을 확신하게 했다고 한다."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이스라엘 엘알 항공 특별기 편으로[16]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아이히만은 9개월간 예루살렘의 감옥에 수감된 채로 집중적인 심문을 받았다. 심문을 주도한 아브네르 레스 경감은 독일계 유대인이었는데, 그의 수사팀은 3,500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증거기록을 가지고 하루도 쉬지 않고 아이히만을 심문했다. 심문 과정에서 레스는 아이히만이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깨닫지 못하고, 후회하는 감정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다만 죄가 명백해서 그런지 어지간한 건 다 순순히 인정하는 등 심문 자체에는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2.5. 재판과 처형[편집]
재판은 예루살렘에 위치한 "제라드 베하 센터"(מרכז ז'ראר בכר Gerard Behar Center)[17] 라는 문화원에서 1961년 4월 11일 시작되었다. 주심 판사는 전 대법관 모셰 란다우(משה לנדוי, Moshe Landau), 배석판사는 베냐민 할레비(בנימין הלוי, Benjamin Halevi)와 이츠하크 라베(יצחק רווה, Yitzhak Raveh)였다.[18] 기소를 맡은 담당검사는 무려 법무장관이었던 기돈 하우즈네르(גדעון האוזנר, Gideon Hausner), 야코브 바르오르(יעקב בר-אור, Jacob Breuer / Yaakov Bar-Or), 가브리엘 바흐(גבריאל בך, Gabriel Bach)였다.[19] 흥미로운 점은, 하우즈네르를 제외한 모든 판사와 검사들이 독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며,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가족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 재판이 보복이라는 비난을 그나마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폴란드 태생이었던 하우즈네르 역시 독일어에 능통했으므로, 모든 판사와 검사가 독일어를 모어로서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재판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였다. 아이히만에 대한 심문 및 법리적 공방 과정에서 언어장벽으로 인한 어려움을 최소화하기 위해,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을 최대한 기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재판진행이 독일어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피고와 원고는 통역을 거쳐 서로 말을 주고받았으며, 판사와 검사들 모두 히브리어를 최대한 이용해서 아이히만을 심문했다. 그러나 피고와 논쟁이 거세질 때나 즉각적인 답변을 들으려는 경우에는 통역을 거치지 않고 독일어로 직접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아이히만의 변호인단은 독일인 로베르트 제르바티우스(Robert Servatius) 변호사가 이끌었다. 이스라엘 내에는 아이히만을 변호해줄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이었던 제르바티우스가 그의 변호를 맡았다. 당시 이스라엘 법정은 외국인 변호사의 변호를 원칙적으로 금지했으나 변호사를 안 쓸 수도 없었으므로[20] 살인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의 경우에만 외국인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을 바꾸어야 했다.
검찰측 증인심문은 56일간 지속되었으며, 총 112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증언했다. 하우즈네르는 심문에 앞서
라고 말했다. 초기 재판에서 제르바티우스는 재판에 제시된 수많은 홀로코스트 증거물들 중 아이히만과 직접 관련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고,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검찰 측은 빌렘 사센과 나눈 대화 내용을 다시 증거로 제출했으나, 아이히만이 직접 쓴 메모 일부분만이 증거로 인정되었다."저 피고석에 앉은 자는 단순히 개인이나 나치 독일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검찰측은 아이히만이 쿨름호프(헤움노),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 민스크 등 학살이 이뤄진 장소들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담긴 자료를 제시하고, 아이히만이 대량학살에 대해 몰랐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특히 민스크의 경우는 아이히만이 직접 처형 순간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며, 따라서 그가 홀로코스트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을 부각하려던 변호인단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이라고 증언했다. 그저 힘러, 하이드리히 등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며, 대량학살에 대한 관여는 자신의 직접적 의지가 아니었다고 항변한 것이다. 즉, 본인은 단지 상급자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21][22] 그러나 하우즈네르 검사는 이와 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이히만에게"자신은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크건 작건 '아돌프 히틀러'나 그 외 어떤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
는 명제를 대며 아이히만의 주장을 무력화시켰다."명령이 잘못되고 불법적인 경우에는, 명령을 마지못해 따른 것 또한 불법적인 행위로 성립된다"
아이히만은 끝까지 자신은 유대인을 특정해서 학살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여러 차례의 교차심문 과정에서 증언을 번복하며 결국 자신이 유대인 학살을 의도했고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결정적인 증언 번복은
라는 발언이었다. 아이히만은 이 500만 명이 소련인, 즉 제국의 적을 지칭한다고 모호하게 답변했으나, 이후 교차심문 과정에서 이 500만 명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내가 500만 명을 죽였다는 사실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특별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내게 묘한 웃음을 짓게 한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서 자신이 수행했던 능동적인 역할과 반유대주의 신념을 숨기고, 단순히 자신은 국법과 체제에 따른 선량한 시민이자 공무원으로 행세했지만, 이와 같은 모르쇠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재판결과는 반유대주의적인 신념의 소유자가 홀로코스트 수행과정에 적극 참여하여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었다. 게다가 굳이 재판결과를 들이댈 것도 없이 연합국이 다른 전범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미 그의 역할이 드러날 만큼 드러나 있었다.
결국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15일 텔아비브의 공개재판에서 당시 법정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3심 끝에 기각되었고, 1962년 5월 31일 23시 58분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죽음이 완전히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사형을 당하기 며칠 전 이츠하크 벤츠비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자신은 하수인일 뿐이라면서 교수형을 면하게 해달라고 탄원한 편지를 보낸 것이 남아 있다.[23] 그는 최후의 만찬으로 와인, 치즈와 빵, 올리브, 그리고 차 한잔이라는 소박한 식사를 했다. 사형은 당시 서양의 관례대로 사복을 입고 집행하였고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참관인들의 참석이 허용되었고 유언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참관자들을 향해 추가로 덧붙였다고[24]“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준비되었다”
아이히만을 추적하며 납치공작을 전두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진 전직 모사드 간부 라피 에이탄의 회고에 따르면, 1962년 5월 31일 사형장을 방문했을 때 아이히만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을 거요.”
에이탄은 여기에"유대인 친구, 자네도 나를 따라서 죽게 되어 있어."
- 고든 토마스 저, 《기드온의 스파이 1》, <철가면을 쓴 스파이 - 유대인 학살의 원흉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라>, 2010. 09, 예스위캔, p.119
라고 맞받아쳤다고.[25]"그래.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아돌프. 지금은 아니라고."
이후 아이히만의 시신은 화장되어 이스라엘 해군 경비정에 실려 지중해 공해상으로 옮겨졌고, 동승한 모사드, 신 베트 요원들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시신들은 대부분 화장로에서 소각되었는데 그가 생전 저질렀던 그대로 앙갚음을 받은 셈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은 극심한 외교적 마찰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아이히만 확보는 이유야 어떻건 외국인들이 아르헨티나에서 불법납치를 벌인 것이기 때문. 아이히만의 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아이히만의 납치가 공개된 즉시 아이히만의 송환을 요구했고 UN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이스라엘의 주권 침해를 인정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에게 사과, 배상함으로써 아이히만을 돌려보내지 않고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 법정은 불법납치에 의해 확보된 피의자에 대해서는 법원의 관할권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아이히만측의 주장에 대해, 피의자의 확보수단은 재판관할권과 무관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는 법리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결론이며, 이스라엘이 아닌 타국에서 벌어진 재판이었다면 아이히만은 이 시점에서 무죄다. 이는 불법납치를 통한 재판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국제법학계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3. 기타[편집]
아이히만이 유대인이라는 설도 있다. 이스라엘 법정에서 왜 동족들을 배신하고 나치 편으로 들어가 대학살을 저질렀냐는 질문을 하자 거리낌없이
라는 말을 했다고 국내 서적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90년대 중후반 군부대 정신교육 서적에서도 아이히만을 잡은 이스라엘을 두고 동족을 배신한 자에 대한 응징이라고 나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친위대에 들어간 게 1932년인 걸로 보아 유대인 혈통은 아닐 확률이 높다. 그게 아니면 만슈타인과 같은 이유일 수도 있다."내가 유대인이니까 유대인이 얼마나 위험한 종족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문은 사실 아이히만 본인이 퍼뜨린 소문이었다. 텔아비브 근처에서 태어나 히브리어에 능통하며 유대인 문화를 잘 알고 있다고 알려졌으나 이것은 잘못된 정보였다.[26] 하지만 아이히만은 오히려 그 소문을 자신의 출세에 활용할 정도로 교활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서 소문을 계속 확산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한편으로는 유대인 사회에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시켰고[27]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내에서 전문가로서의[28] 지위와 인정을 강화했다.[29]
이와 관련돼서 국내서적 중에서는 이때 아이히만의 발언이
였다고 한다. 재판관이 이유를 물어보자 말하기를"나를 유대교로 개종시켜달라"
라고 답했다."그러면 유대인을 이 세상에서 하나 더 지울 수 있지 않느냐."
모사드는 요제프 멩겔레와 아이히만의 소재를 모두 파악해냈고 그중에서 누굴 먼저 잡을까 고심하다가 아이히만을 먼저 잡기로 결심했는데 멩겔레는 아이히만이 잡히는 것을 보고 다시 잠적해버려 멩겔레는 잡지 못했다는 낭설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멩겔레의 본거지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죽은 뒤에나 간신히 그의 무덤을 발견했다. 이러한 소문은 이스라엘에서 퍼뜨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멩겔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잡히고 나서 더욱 더 조심해서 생활했고 그가 끝까지 잡히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아이히만이 잡히기 전에 멩겔레는 서먹서먹한 사이였던지라 친분으로 잘 지냈다면 모사드가 멩겔레까지 덤탱이로 잡았을 것이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남동생 하인츠 하이드리히와 상당히 친했다. 하인츠가 자살했을 때도 가장 슬퍼했다. 그러나 하인츠가 유태인과 집시를 몰래 구출시킨 건 죽는 날까지 알지 못했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부가 1954년에 사형제를 폐지한 이후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된 유일무이한 사형수이다.[30] 이스라엘은 사형제가 폐지되었지만 전시상황이나 유대인에 대한 범죄는 예외로 하고 있고, 아이히만의 죄목은 '유대인에 대한 범죄'에 해당해 사형이 선고 및 집행되었다.
한편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낳은 막내아들인 리카르도 아이히만(Ricardo Francisco Eichmann, 1955~)은 성장한 후 책을 통해 아버지의 만행을 접하고는 아버지의 나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며 그의 처형은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31] 1977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후 1995년부터 2019년까지 고고학 교수로 근무했다.
3.1.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편집]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스라엘 법원의 재판을 받던 아이히만을 보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을 주장했다. '제대로 된 비판정신 없이 상부의 명령에 맹종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준 중요한 표본'으로서 널리 인용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언제나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유대인을 전부 죽여야 한다는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나치당원이었다. 그래서 아렌트의 주장은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 사고의 무능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했다. 독일어에서 banal은 하찮은, 수준 낮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아이히만의 전력이 이런 맥락에서 어긋나다고 보지 않았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거짓말을 단순한 책임 면피를 위한 거짓말이라기보다는 현실감각을 없앤 사고와 언어의 무능에서 온 상투어로 보았다.
한나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권력욕이 강하며 명예에 집착하는 인간이었고, 그의 반유대주의 사상이나 나치즘은 이러한 명예욕을 실현시킬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그가 유대인 이주정책을 맡았던 1938년은 나치의 최종 해결책[32] 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1941년 이전이었으며, 1938년 당시에는 시온주의자들과의 모종의 협력을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독일계 유대인들도 수천 명가량 존재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동정 때문에 유대인들을 유럽 바깥으로 이주시킨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 최종 해결책이 시행됐을 때에도 역시 유대인에 대한 증오때문에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이히만은 분명 현장 시찰을 나갔다가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구덩이가 시체로 뒤덮이는 것을 보고 구역질을 했던 사람이다. 일말의 양심이 있거나 판단력이 있으면 사표를 쓰거나 항명을 하거나 했어야 할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4. 매체에서[편집]
2007년 아이히만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헝가리, 영국 합작으로 개봉되었다. 아이히만 역은 앞서 제작된 다운폴에서 페겔라인 역을 맡았던 배우 토마스 크레치만이 담당. 이번에도 나치 역이다....
2015년 영국 BBC2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송하는 과정을 그린 단편 드라마 '디 아이히만 쇼'가 방영되었다. 마틴 프리먼이 주인공 제작진 역을 맡았고, 부천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2018년 9월에는 MGM 제작 및 넷플릭스에서 개봉하는 오퍼레이션 피날레가 공개하였다. 아이히만을 생포하기 위한 과정을 그린 영화로 역을 벤 킹슬리가 맡았다.[33]
높은 성의 사나이(드라마) 시즌4에서 무장친위대 최상급집단지도자로 등장한다.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히틀러 사후 벌어진 독일 내전에서 승리하면 부르군트 기사단국을 통치하는 하인리히 힘러와 대립한다. 하이드리히의 통일 이후, 2차 독일 내전이 일어나면 아이히만은 '프로이센 자유국'을 통치하는 SS 군벌로 등장해 동프로이센을 점거한 열등인종 반군인 '스파르타쿠스의 후예'와 싸우며 그들을 절멸시키려한다. 또한 부르군트 기사단국의 핵전쟁 계획 '글로벌플라넨'의 감독관이 아이히만이다. 이후 부르군트 기사단국은 사실 소말리아보다 못한 상태였고, 이 사실이 드러나고 국가가 붕괴되어 힘러가 고립되고 판단력을 잃는 동안 아이히만은 기사단국을 장악하려고 한다.
한국의 7차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법과 정치, 사회문화 교과서 중에서는 악의 평범성을 소개하는 요소로 나치 전범으로 재판을 받게 된 어느 독일 공무원이 "내가 맡은 업무는 열차 운행, 배차간격 조절을 담당하는 일이었을 뿐이며. 전쟁범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라고 발뺌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바로 아이히만이 전쟁 중 홀로코스트 실무자로 활동하며 유럽 각지와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을 기차에 태워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정책의 최종책임자로 일한 것을 각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