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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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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죄를 지어 외방에 있었다가 조정에 돌아와서도 시종(侍從)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생각한 것이 있어도 감히 상달(上達)하지 못하였습니다.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지은 죄악이 매우 크므로 폐비하여 마땅합니다만, 그러나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이니, 이제 무람(無濫)없이 여염(閭閻)에 살게 하는 것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떨어진 장막(帳幕)을 버리지 아니함은 말을 묻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사용하던 물건은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감히 무람(無濫)없이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至尊)을 위해서 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한 처소를 장만하여 주고 관(官)에서 공급(供給)을 하여 줌이 좋을 듯합니다."



채수가 아뢰기를, “윤씨(尹氏)의 죄를 정할 때에 신이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이창신(李昌臣)과 더불어 궁내에서 나온 언문(諺文)을 번역하여 그의[1]

죄악상(罪惡狀)을 길이 후세에까지 보이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윤씨의 죄악상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지존(至尊)의 배필(配匹)로서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인데, 이제 폐위(廢位)되어 여염(閭閻)에 살게 하는 것은 너무나 무람없는 듯하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누구라도 애처롭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금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공급되는 것이 또한 어찌 넉넉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처음 폐위를 당하였을 때에도 따로 처소를 정하여 공봉(供奉)하기를 청하였었습니다.”


하니, 한명회는 말하기를, "신 등은 전일에는 이러한 뜻을 아뢰었습니다. 대저 지존께서 쓰시던 것은 아무리 미소(微小)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두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찍이 국모가 되었던 분은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윤씨의 죄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당초에 그의 시비(侍婢)를 치죄(治罪)하였을 적에, 내 마음에는 폐비를 하고자 하였지마는, 대신(大臣)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참아서 중지하고 그가 허물 고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오히려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내가 삼전(三殿)에 품지(稟旨)하여 위로는 종묘(宗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폐출(廢黜)시켜 외처로 내보낸 것이다. 내가 어찌 사사로운 노여움이 있어서 그러하였겠느냐? 옛적에는 참소(譖訴) 때문에 폐비를 한 것이 있으니, 여희(驪姬)가 야반(夜半)에 운 것[2]

과 같은 일이 이것이다. 나도 전고(前古)의 일을 약간 알고 있으니, 어찌 감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움이 있어서 그렇겠는가? 만일 국모(國母)로서의 행동이 있었다면 마땅히 국모로서 대우하였을 것이다. 이미 서인(庶人)이 되었는데, 여염에 살게 하는 것이 어찌 무람없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경들이 어찌 국모로서 말을 하느냐? 이는 다름이 아니라 원자(元子)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위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윤씨가 나에게 곤욕(困辱)을 준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심지어는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이러한 말을 하였겠는가? 또한 차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 항상 비상(砒礵, 독약)을 가지고 다녔으며, 또 곶감(乾柿, 건시)에 비상을 섞어서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무엇에 쓰려는 것이겠는가? 만일 비복(婢僕)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쓰려는 것일 텐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나는 당중종(唐中宗) 과 같이 됨을 거의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3]

지난번 삼대비전(三大妃殿)에 문안하였더니, 대비께서 말씀하기를, ‘이제 윤씨와 비록 거처를 달리하고 있으나 마음은 편하다’고 하였다. 부모 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은데, 그대들의 마음만 유독 어찌 그러한가? 그대들의 말이 이러하니, 나를 당중종(唐中宗)처럼 만들려는 것이냐? 또한 윤씨는 내가 거처하는 곳의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이다.’[4]라고 하였으니, 그의 부도(不道)함이 이런 유(類)인데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이다. 이제 내 나이 젊으나 사람의 장수(長壽)와 요사(夭死)는 알기 어려우니, 만일 일찍이 계책을 도모하지 아니한다면, 한(漢)나라 여후(呂后)나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같은 화(禍)가 없겠는가? 그러니 후일의 화를 미리 헤아릴 수는 없다. 공자(孔子)가 아내를 내쫓았는데, 그가 죽자 이(鯉)가 통곡하였는데, 공자가 그르게 여겼다. 원자(元子)도 효자(孝子)가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효자가 되고자 하면 어찌 감히 어미로 여기겠느냐? 비록 나의 백세(百歲) 뒤에라도 저를 어찌 감히 내가 거처하던 집에 살게 하겠는가?"



"쫓겨난 어미라면 범인(凡人)들도 오히려 어미로 여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원자이겠습니까? 다만 신 등은 특별한 처소에다 높이 받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 금(金)나라의 임금 (亮)은 천하의 폭군(暴君)이었습니다. 금나라의 임금 (雍)이 즉위하였을 적에 양은 실지로 원수의 사람이었지마는, 양의 후비(后妃)인 도단씨(徒單氏)에 대하여는 또한 배고프고 헐벗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근자에도 이영(李瓔, 금성대군에 연류(連類)되어 죽은 화의군)과 이준(李浚, 구성군)은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었으므로 국가에서 외방(外房)에 추방을 하였지마는, 또한 그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윤씨도 유폐(幽閉)시키되 옷과 음식은 공급함이 좋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윤씨의 죄악(罪惡)에 대하여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단죄(斷罪)해야 하겠지마는, 내가 참고 그를 단죄하지 않았으니, 그가 목숨을 보존한 것만도 다행이다. 그런데 공봉(供奉)하고자 함은 어째서인가? 그대들이 만일 그 가난하고 헐벗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대들의 녹봉(祿俸)으로써 공급하지 않는가? 윤씨가 궁(宮)에 있을 때에 항상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여 호부(豪富)함을 자랑하였으니, 어찌 굶주리고 헐벗는 데에 이르렀겠느냐? 그대들은 경연관(經筵官)으로서 나의 뜻을 알 만한데도 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대들은 윤씨의 신하인가, 이씨(李氏)의 신하인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이는 반드시 윤씨의 오라비 등 불초(不肖)한 무리들이 붕반(朋伴)을 인연하여 서로 퍼뜨려서 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대들이 이르기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통한(痛恨)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통한하였다는 자들을 낱낱이 말하겠는가? 내가 장차 의정부(議政府)ㆍ육조(六曹)ㆍ대간(臺諫)들을 불러서 물어보겠다. 그렇게 통한하였다는 자들이 과연 누구누구인가?” 라고 말한 뒤 윤씨의 오빠들을 모두 가두라는 명령을 내린 후 즉시 의정부, 육조, 대간을 불러들인다. 뒤이어 이어진 대화에서 성종은 자기가 죽을 뻔 했고 참은지 오래되었다며 마침내 결심을 하고, 모든 대신과 논의 끝에 실행했음에도 불구, 이 신하들은 장차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의 비위를 맞추고자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한 짓을 통한(痛恨)해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윤씨(尹氏)는 음흉함이 무쌍(無雙)하여서 화(禍)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간직한지 오래다.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독약(毒藥)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하여, 항상 이르기를, ‘내가 장차 볼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를 대하기를 어찌 노예처럼 할 뿐이겠느냐? 내가 일찍부터 참고 참으면서 결단하지 못하다가 부득이하여 위로 종묘(宗廟)와 삼전(三殿)에 고하고 아래로 대신(大臣)들과 의논한 뒤 폐비(廢妃)하여 외부(外部)에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심(人心)에 통한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니, 내가 참으로 통분하다. 이는 곧 전적으로 자손(子孫)의 즐거움만을 돌아보고 당시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서 간사한 사람들에게 아부하여 장차 큰 화(禍)를 이루려는 것이기에 내가 더욱 통분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다행히 종묘와 사직의 음우(陰佑)하여 줌을 입어서, 죄지은 사람이 죄를 받게 되고 내가 다행히 당(唐)나라 중종(中宗)처럼 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니 나의 뜻을 말로 다할 수 없는데도 나라 사람들이 과연 모두 통한하게 여기는가?



이제 권경우(權景祐)의 일을 듣고서 매우 놀랐다. 윤씨는 정유년 3월에 죄를 지었었는데, 그 때 재상들이 내보내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 뒤에 윤씨는 자신을 요동(搖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여 더욱 포악(暴惡)하여져서, 우리한테는 그만두고라도 주상(主上)에게까지 불순(不順)한 일이 많이 있었다. 부부(夫婦) 사이의 일은 다 말할 수도 없고, 혹시 다 말하게 되면 이는 사람의 정리가 아니니, 그것을 믿고서 듣겠는가? 부녀자가 불순함은 칠거(七去)에 든다고 한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의 여자인들 어찌 이처럼 하겠는가? 만일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責望)을 하면, 저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니, 우리들이 명색은 어버이인데도 이러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주상에게는 패역(悖逆)한 말까지 많이 하였으니, 심지어는 주상(主上)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하고, 또 스스로 ‘상복(喪服)을 입는다.’ 하면서 여름철에도 표의(表衣)를 벗고 항상 흰 옷을 입었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후일에 볼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그가 어린 원자(元子)가 있기 때문에 후일의 계획을 한다는 것이니, 우연한 말이 아니다. 우리는 시운(時運)이 불행(不幸)하여 이렇게 좋지 못한 일을 만났으니, 늘 탄식하고 상심하여 세월이 가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 다행하다고 여기면서 무릇 음흉하고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낱낱이 다 들어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주상의 몸을 소중하게 여길 뿐이지 어찌 우리들에게 불순한 것을 생각해서이겠는가?





(윤씨가) 항상 말하기를, ‘내가 후일 볼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볼 만한 일이 무엇인지 또한 알 수가 없다





‘〈나라 사람들이〉 통분한다.’는 말은 신이 아뢴 바가 아니며, 다만 조정에서 모두 마음에 미안(未安)하게 여긴다고 말하였습니다. (채수)


‘나라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긴다.’는 말도 신이 아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라 사람들이 마음에 미안(未安)하게 여긴다고 하였는데 (권경우)



“그대가 그날 아뢰기를, ‘나라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다.’ 하기에, 내가 묻기를, ‘누구누구가 마음 아파하느냐?’ 하니, 그대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마음 아파하는데, 뉘라서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래도 이 말을 그대가 실로 아뢰지 않았다고 하느냐?”



다만 그날 천위(天威)가 엄중하시기에 심신(心神)이 착란되었으므로, 계달(係達)할 사연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윤씨가) 주상(主上)에게 말하기를, ‘그 눈을 빼고,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들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5]

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6]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7]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 때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평안도 도원수 이극균을 인견하다. #[8]

















































엎드려 듣자오니, 지금 묘호를 의논하면서 혹은 '인(仁)'으로 하자 하고, 혹은 성(成)으로 하자고 하다가 마침내 성(成)으로 칭하여 올리기로 하였다 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시법(諡法)에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정사를 세운 것을 성(成)이라 한다.[安民立政曰成]’ 하셨으니, 이것으로는 대행왕의 거룩한 덕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전(傳)에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친다.[爲人君止於仁]’ 하였으므로 자고로 제왕의 아름다운 칭호로 인(仁) 자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이 비록 시호를 의논하는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거듭 깊이 생각건대, 인(仁)으로 칭하여 올리자는 것이 의논하지 않고도 생각이 같으니, 이것이 실로 공론이며 여러 사람의 마음에 아주 맞는 것입니다. 지금 중조의 묘호(廟號)를 피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으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심히 미안합니다. 묘호를 한 번 정하면 백세에 고치지 못하는 것이니 위에서 재량하소서.

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1월 14일 1번째 기사




임금은 총명 영단하시고, 관인 공검(寬仁恭儉)하셨으며, 천성(天性)이 효우(孝友)하시었다. 학문을 좋아해서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畫)에도 지극히 정묘(精妙)하시었다. 대신을 존경하고 대간을 예우하셨고, 명기(名器)를 중하게 여겨 아끼셨으며, 형벌을 명확하고 신중하게 하시었다.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이단을 물리치셨고, 백성을 사랑하여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셨고, 대국을 정성으로 섬기셨으며, 신의로써 교린(交隣)하시었다. 그리고 힘써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문무(文武)를 아울러 쓰고 내외(內外)를 함께 다스리니, 남북(南北)이 빈복(賓服)하고, 사경(四境)이 안도(按堵)하여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편안히 여긴 지 26년이 되었다. 성덕(聖德)과 지치(至治)는 비록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이라도 더할 수 없었다.

<성종실록> 성종 25년(1494) 12월 24일







[1] 여기서의 "그"는 오타가 아니다. 근현대 이전까지 우리말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그"라고 칭했었다. "그녀"라는 표현은 사실 억지로 끼워맞춘 표현으로, 어법상으로도 맞지 않는 말이다.[2] 진나라 헌공의 첩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 삼으려고 다른 자식들을 모함을 해, 신생을 죽이고 중이를 내쫓은 것을 말한다.[3] 항목을 보면 알지만, 당중종은 아내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유는 성종이 윤씨가 자신을 독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4] 장례를 치를 때 을 덮는 흰 천을 말한다. 죽이고 싶다는 뜻과 같다. 이는 심각한 죄로서, 대역죄로 처벌받아도 딱히 할 말이 없다.[5] 만주어로는 우디거(숲사람)라고 하며 조선시대 두만강(豆滿江) 일대에 살던 야인여진의 분파이다. 비록 명나라 아래 있었던 건주여진이나 몽골에 가까웠던 해서여진에 비해 문명 수준은 낙후되었으나 호전성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세력권에 속해 있어 조선이 공격할 땐 명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 건주여진, 너무 멀어서 당시엔 부딪힐 일이 없었던 해서여진과 달리 조선과 직접적인 충돌을 가장 많이 일으켰던 세력이었다. 참고로 야인여진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합쳐져 만주족이 성립된 뒤 만주족에게도 골칫덩이 세력이었다.[6] https://www.fmkorea.com/5366988869[7] 올적합은 당시 야인여진 중 가장 강하고 호전적인 세력이었으니 그런 올적합을 털어버린 조선군이 두만강 일대 여진 부락들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여겨진 게 당연한 일이었다.[8] 여진족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이후 해당 올적합 토벌에 대해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童淸禮)가 강성하던 금나라도 못한 일이라며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근거로 써먹은 기록이 있다. "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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