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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백/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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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성시백


1. 유년 시절
2. 2004-05 시즌
3. 2005-06 시즌
4. 2006-07 시즌
5. 2007-08 시즌
5.1. 국가대표 선발전
5.2. 월드컵 시리즈
6. 2008-09 시즌
7. 2009-10 시즌
7.1. 국가대표 선발전
7.2. 월드컵 시리즈
8. 2010-11 시즌
8.1. 국가대표 선발전
8.2. 월드컵 시리즈
9. 은퇴 및 그 이후



1. 유년 시절[편집]


초등학교 시절 몸이 허약했던 성시백은 부모님의 권유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까지 학업과 운동을 병행했고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전문적인 운동 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당시 또래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호석[1]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고, 2003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여 종합 2위를 했으며[2]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2. 2004-05 시즌[편집]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으나 제한된 출전기회를 받았고 주로 계주에 참가해 활약했다. 개인전은 6차가 돼서야 기회를 받았지만 큰 활약은 보여주지 못한다. 고등학교 3학년때 연세대학교 입학 예정자의 신분으로 2005 인스브루크 동계 유니버시아드[3]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1000m와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다.


3. 2005-06 시즌[편집]


안현수, 이호석과 함께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활약할 가능성이 있는 멤버로 여겨졌으나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졌다. 당시에는 쇼트트랙계가 한창 파벌싸움으로 시끄러울 시기이기도 한데, 남자 대표팀내 혼자서 한체대 출신이었던 안현수가 다른 남자 선수들과 훈련을 할 수 없어서 이때 안현수가 도움을 청한 선수들이 다름 아닌 성시백과 이승훈이다. 안현수의 신목고 후배인 이승훈[4]은 그렇다쳐도 성시백은 당시 이미 연세대생으로 즉 비한체대 선수였기에 미래에 파벌이슈가 해결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후에 불이익을 볼 수도 있었지만 의리를 지켰다. 토리노 올림픽이 코앞인데도 여전히 한체대파, 비한체대파로 나뉘어 훈련이 지속돼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안현수는 토리노에 훈련파트너로 이 둘을 데려갈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나마 빙상연맹의 뒤늦은 중재로 토리노에 가서는 파벌로 나뉘지 않고 같이 훈련하게 되어 이승훈과 성시백이 토리노에 동행하지는 않았다.


4. 2006-07 시즌[편집]



4.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군면제의 기회가 있는 2007 창춘 동계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선발전에 다시 한번 도전했으며, 2차 선발전을 위한 15인을 뽑는 1차 선발전 개념인 종합선수권에서 무려 당시 세계최고의 선수들이었던 이호석안현수를 누르고 당당히 1위로 1차 선발을 통과한다. 하지만 2차 선발전에서는 본인이 강한 종목인 500m에서 실격당하는 불운 등을 겪으며 6위에 머물면서 대표팀 재승선에 또 실패했다.[5] 이때는 정말 쇼트트랙을 그만 두려고 수없이 고민했다 한다.


4.2. 2007 토리노 동계 유니버시아드[편집]


파일:external/www.inews365.com/cb8_a6(31).jpg
사진의 오른쪽 인물이 성시백
새로 출발하자는 마음을 먹고 동계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했으며 여기서 그의 포텐이 터지기 시작했다. 2007 토리노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전 종목 석권[6]을 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유니버시아드가 사실 작은 규모에 경쟁력이 낮은 대회긴 하지만 전관왕을 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에는 대표팀에 있던 이호석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그가 차순위 자격으로 2007 세계선수권 계주 멤버로 참가했고,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금메달을 따는데 일조했다.


5. 2007-08 시즌[편집]



5.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대표선발전에서 송경택의 선발을 도우려는 이호석이 1000m 결승에서 고의적으로 성시백과 이승훈을 방해한 사건이 있었고, 성시백이 가장 큰 피해를 봤다.[7] 3000미터에서 1위를 기록해 종합 4위로 국가대표팀 승선에 성공했지만 탑3[8]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아쉽게도 세계선수권 개인전을 뛸 자격은 없었다.


5.2. 월드컵 시리즈[편집]


월드컵에서는 안현수, 이호석, 송경택이 참가하지 않은 500m에 집중하게 되면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나 캐나다 선수들이 판치던 단거리(500m) 종목에서 8번의 경기 모두 결승 진출은 물론 이 중 5번이나 우승을 해내며 맹활약했고 랭킹 1위를 달성해 새로운 단거리 최강자로 떠올랐다. 더군다나 1000m와 1500m는 제한된 기회를 받아 각각 2번씩만 참가할 수 있었는데 모두 우승하며 4개의 금메달을 따내 1000m 랭킹 5위, 1500m 랭킹 8위를 기록하며, 이호석, 안현수에 이어 세계랭킹 3위를 차지했다.


5.3. 2008 세계선수권[편집]


계주에 참가해 금메달을 따는데 일조한다. 월드컵에서 성시백이 너무나 물오른 폼을 보여줬기에 이승훈 대신 세계선수권 개인전에 출전했다면 어땠을까 큰 아쉬움을 남겼다.


6. 2008-09 시즌[편집]


월드컵 종합우승을 하며 정점에 올랐다. 안현수송경택의 대표팀 탈락 이후 최강자로 여겨지던 이호석과 2009 세계선수권, 더 나아가서는 다음시즌인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두고 다툴 것이라 예상되었다. 하지만 2009 세계선수권에서는 1500m 결승경기에서 넘어진 후 이후 나머지 두 종목에서도 결승진출 실패하는 부진을 겪었다.


7. 2009-10 시즌[편집]



7.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에서 1500m와 500m에서 우승했고 1000m에서 준우승을 하며 압도적인 점수로 종합 1위로 선발되었다.


7.2. 월드컵 시리즈[편집]


고질적인 부상 때문에 월드컵에서 지난 시즌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개인전에서 금메달 2개나 따냈다. 3차 월드컵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4차에서는 폼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m 준결승에서 무려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결승에서는 발목에 무리를 느껴 제대로 레이스를 펼치지 못했으나 량원하오의 실격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후에 계주 결승전에는 이호석곽윤기가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2번주자(이정수) 대신 4번 주자로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이호석이 없을 시엔 그가 2번 주자를 맡아야 했지만 컨디션 문제인지 4번 주자로 출전했다. 그러다가 11바퀴 남기고 1번 주자를 밀어주다 넘어졌고 발목에 더 큰 무리가 생겨서인지 아니면 더 큰 부상을 예방하려는 차원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후에 레이스에서 빠졌다. 결국 그가 빠지면서 1위로 잘달리고 있던 한국이 캐나다와 미국에게 차례로 추월을 당하면서 3위를 차지했다.

최종 500m, 1500m 3위, 1000m 5위를 기록하며 종합 랭킹 5위를 기록했다.


7.3.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편집]


  • 1500m
이정수, 이호석와 나란히 결승진출에 성공했고 밴쿠버 쇼트트랙 남자 대표팀은 역대전력상 가장 강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셋이서 메달 사냥을 할거라 점쳐졌다.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0-08486B06000005DC-949_468x30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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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totallycoolpix.com/os_2010_05.jpg
이렇게 잘 가고 있었다. 성시백이 오노와 선두를 다투는 틈을 타 이정수가 자리를 잘 잡고있었고, 나중에는 이호석이 오노를 추월해 이정수가 1위로 달리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괜찮았으나, 이호석의 무리한 추월 시도로 같이 넘어지면서 4, 5위권이었던 오노와 셀스키가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가져갔다.

그는 마지막 코너에서 크게돌면서 인사이드로 이정수를 앞지르려 할 때 빈틈이 생겼다고 생각한 이호석이 그사이로 추월을 시도했던 것이다. 사실 이호석이 올림픽 전에 이런 움직임으로(일명 '칼치기') 짜릿한 역전 우승을 거둔 적이 꽤 많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엄청난 판단미스다. 더군다나 성시백의 덩치를 생각한다면 이호석을 피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노와의 경합이 어쩌면 성시백이 나중에 벌어진 사고를 떠나서 1500미터 메달을 날리게 된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인데, 일단 몸싸움을 하게되면 속도가 확 줄게 되어 뒤따라오는 선수들을 견제하는데 상당히 불리해진다. 성시백이었으니깐 뛰어난 가속능력을 이용해 이정수를 곧바로 따라간 게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본인은 다섯번째로 들어왔고 이호석은 실격되었다.

그 바람에 이정수가 금메달을 땄음에도 이호석의 무리한 플레이에 대해서 비난하는 모습이 컸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가 이호석 선수에게 위로를 해줬고 본인도 사과를 받아주면서 별다른 일없이 넘어갔다. 다만 경기 이후에는 충격이 컸는지 이호석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 1000m
1000미터에서도 한국 세 선수가 다시 만날 거라는 예상이 나왔다. 준결승에서 아폴로 안톤 오노샤를 아믈랭과 맞붙게 됐을 때 너무 일찍 선두로 치고 나온 탓인지 오히려 마지막 두바퀴를 남기고 오노와 아믈랭에게 차례대로 추월당했다. 마지막 라인을 앞두고 스케이트날을 앞으로 내밀었으나 0.006초 차로 아믈랭에게 결승 티켓을 내줬다. 1500m 결승전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1000m에서 만큼은 좋은 성적을 내야한다는 부담감으로 일찍 치고나와 선두를 지키는 작전을 펼친 걸로 보인다.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a2v74136.jpg

결승 진출에 실패한 탓인지 1000m 파이널 B에서는 굳은 표정으로 경기에 참가하는게 보였다. 더군다나 준결승 1조에서 J.R. 셀스키가 실격 당하고 프랑수아 아믈랭은 결승에 진출했기 때문에 본인과 같이 준결승을 뛰었던 중국의 한자량과 둘이서만 파이널 B에 들어갔다. 경기 중반 코너를 돌며 한자량을 아웃코스로 추월할때 살짝 접촉이 있었는데 성시백이 심기가 불편했는지 직선코스에서 보복성이 있어보이는 몸싸움을 걸었고,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결국 실격을 받았다. 이후 대기실에서 한자량의 사과를 받아주는 모습을 보였다.[9] 정황상 파이널 A진출 탈락에 화가 많이 나있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며 결승에 보통의 4명이 아닌 5명이 진출했기 때문에 파이널 B에서 1위를 해도 동메달이라도 딸 가능성도 굉장히 희박했기에 실격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였다.[10]

사실 세 종목 중 가장 활약이 적었던 종목이 바로 1000미터이긴 하지만 1500미터에서 순탄히 메달을 따냈다면 그 이후에도 상승세를 타 본종목에서도 결승진출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 500m
2009-10 시즌 기준 랭킹 3위였지만[11]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해외에서도 랭킹 1위였던 샤를 아믈랭보다 성시백의 우승을 더 예상했다. 사실 아믈랭의 전략은 자신의 스타트와 스피드를 앞세워 처음부터 선두를 지키면서 1위로 경기를 끝내는 것뿐이지만, 성시백은 스타트가 아믈랭보다 약간 뒤쳐질지라도 500미터에서 하기힘든 추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94년에 금메달을 딴 채지훈에 이어서 2번째로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고 이 종목 세계 신기록이 2009년에 그가 세운 기록이었다. 이 때 같이 겨루는 아폴로 안톤 오노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도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딴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12]

스타트를 좋게 시작, 2위 자리를 잡으며 1위로 나선 해믈린을 추격했으며 세바퀴째 됐을 때 인사이드로 선두를 추월한 다음 1위 자리를 굳히던 중이였다.

파일:external/l.yimg.com/1267256075.jpg
한데 하필이면 빙질이 안 좋은 곳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트랑블레와 같이 넘어지면서 결국 해믈린이 1위로 들어왔고, 그 사이 오노가 2등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펜스로 밀러 난 트렘블리와 달리 앞쪽으로 넘어져서 세번째로 결승선에 들어왔으며 그 와중에 펜스에 걸려 헬멧 커버까지 벗겨졌다. 나중에 심판진이 오노가 트렘블리를 밀었다고 판단, 오노에게 실격 처리를 주면서 은메달을 받았고, 트랑블레가 동메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다잡은 금메달을 따지 못한 건 본인도 아쉬웠는지 결승선에 들어온 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 가슴 아픈 불운에도 불구하고 밴쿠버 올림픽 500미터 결승전은 성시백의 명경기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아믈랭이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마지막 두바퀴까지 추월을 하지 않고 여유를 보일 정도였고 인코스 추월마저 완벽했다.

여담으로 이 때 넘어졌던 장면에 야구 그라운드 베이스를 합성해 도루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시켜 놓은 사진을 2014년 5월 6일에 국제빙상경기연맹이 ISU 쇼트트랙 공식 페이스북에 뜬금없이 새로운 밈을 만들답시고 올렸다.

해당 게시물은 다수의 한국인 페이스북 유저와 성시백의 팬들 혹은 다른 쇼트트랙 팬들의 항의에 의해 결국 6일 오후 5시쯤 삭제되었다.[13]

게시글을 삭제하기 전 ISU 쇼트트랙 공식 페이스북은 "누군가를 기분 상하게 하기 위해 올린 사진이 아니다. 그저 재미를 주기 위한 것 뿐"이라는 뻔뻔한 답변을 남겼었다. ㅉㅉ 그게 아무사진도 아니고 다 따놓은 금메달이 날라가서 TV보던 한국 국민들 암걸리게 할 뻔한 장면인데 재미라니. ISU 클래스 제대로 입증[14]


  • 5000m 계주
불과 30분 전에 펼쳐졌던 500m 결승전에서 넘어졌던 탓인지 계주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마지막엔 다른나라 주자들과 뒤엉키면서 곽윤기를 오른손목스냅으로 터치해 하마터면 계주에서 메달을 따지 못할 뻔했다. 이호석도 500미터 준결승에서 넘어졌던 탓인지 원래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다행히 곽윤기가 마지막에 아폴로 안톤 오노를 추격하는 원맨쇼 활약으로 은메달을 건지면서 이 대회에서 은메달 두 개를 걸게 됐다.

국민들에게도, 그의 팬들에게도, 그리고 본인 자신에게는 더욱더 성이 차는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큰 아쉬움이 남았다. 올림픽 직후에는 2014 소치 동계올림픽도 있으니 긍정적인 마인드로 4년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7.4. 2010 세계선수권[편집]


1500미터에서 곽윤기에게 1위를 내줬고, 주종목인 500m 준결승에서 샤를 아믈랭과 같이 넘어졌으며, 1000m 준결승 도중엔 얼음에 스케이트 날이 걸려 넘어졌다. 1000m에서 넘어졌을 땐 큰 부상은 아니지만 발목을 다쳤는지 통증을 느껴서 3000m 슈퍼 파이널과 5000m 계주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8. 2010-11 시즌[편집]



8.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타임 레이스로 변경된 규정에서 어려움을 겪긴 했으나 국가대표 선발에는 다시 한번 성공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주종목인 500m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 500m 출전권을 놓친다.


8.2. 월드컵 시리즈[편집]


이호석과 함께 기량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슬럼프에 시달렸다. 개인전 종목에서 따낸 유일한 메달이 4차 월드컵 500m였으며, 금메달을 따며 우승하긴 했지만 스피드가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2위에서 추격하던 티보 포코네에게 몇번이나 추월 위기를 맞는 모습을 보였다.


8.3.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편집]


1000m 종목 결승 진출했으나 중국 선수의 더러운 반칙으로 넘어져 동메달을 땄다. 성시백 본인도 굉장히 화가 났었는지 해당 중국 선수를 어깨로 툭치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계주에서는 금메달을 따내는데 일조했다.[15]

아시안 게임 출전 이후에는 발목 부상이 악화되며 5차 월드컵 500m 예선 탈락, 1000m는 아예 예선도 뛰어보지 못하고 기권했으며 부상 재활을 위해 2011-12 시즌 스킵을 선언한다.


9. 은퇴 및 그 이후[편집]


파일:external/img.sbs.co.kr/30000035194_700.jpg
은퇴식에서 이승재와 함께 선수로서 마지막 레이스를 하는 모습
2012-13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이 진행되던 2012년 4월 1일 전직 국가대표 선수였던 이승재와 같이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식이 만우절에 잡혀있어 팬들이 믿지 않았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25살이라는 나이가 쇼트트랙 선수 기준으로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충분히 활약을 펼칠 수 있는 나이기에 더욱더 아쉬움이 있었다.[16]

은퇴 후엔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고 2013년 2월 스포츠 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은퇴 후에도 쇼트트랙에 애착이 아직 많이 남았는지 종종 국내에서 열리는 쇼트트랙 경기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2014년 초 미국 플로리다 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났다.

물론 학업에 열중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질적인 발목부상이었다.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성시백은 만성 발목 부상을 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넘어질 때가 잦은편이었는데, 그럴때마다 이미 성할 날 이없는 발목에 무리가 갔다고 한다. 2009-10 시즌 4차 월드컵에서도 발목에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18], 올림픽에서는 500m에서 넘어지며 더욱 악화가 됐었다고 한다.[19] 본인도 2011-12 시즌 공백기간 동안 재활과 컨디션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결국 은퇴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은퇴가 아쉬운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매우 보기 드문 단거리 능력을 가졌고 쇼트트랙에서 500m는 선수 생명이 긴 편으로 발목부상만 없었으면 20대 후반까지도 정상의 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0] 성시백의 은퇴 후 한국 남자 쇼트트랙은 단거리에서 메달 획득을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2013년 박세영이 단거리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기대와는 달리 정상권 실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성시백이 자기 입으로도 "현 시점에서 자신의 '(500m) 후계자는 없다"라고 그 당시 인터뷰에서 얘기하기도 했다. 2017-18 시즌이 되어서야 황대헌이 등장했고 세계선수권에서 2시즌 연속 500m 우승을 달성하거나 월드컵에서도 500m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등 한국 남자 쇼트트랙 단거리 강자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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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호석(1986년생)이 한 살 더 많지만 성시백이 빠른 87년생이라 학교는 같이 다녔다.[2] 종합 1위는 이호석, 3위는 김현곤이었다.[3] 이곳에서 안현수와 함께 서호진에게 양보를 요구당하고 거부하자 폭행을 당했던 일이 벌어졌다.[4] 정확히는 한체대 입학 예정자였다.[5] 이 시즌은 전 시즌 세계선수권자의 자동 선발 규정이 다시 없어지며 2006 세계선수권 우승자 안현수도 1, 2차 선발전에 모두 참가했다. 안타깝게 딱 한 순위로 탈락했으며, 공교롭게도 선발전 1위 안현수를 제외한 나머지 2-5위 선수들이 모두 34점을 기록했다. 참고로 성시백은 21점을 기록했다.[6] 500m, 1000m, 1500m, 3000m, 계주까지 무려 5관왕이다. 참고로 최은경 선수가 지난 대회에서 전관왕을 했다.[7] 시작 막바지에 안현수가 부상 당하며 성시백의 바로 윗순위로 선발된 이승훈이 세계선수권 개인전에 참가했기에, 만약 1000m 결과가 달랐다면 성시백이 저 개인전 티켓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을테니 가장 큰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8] 이승훈이 선발전에서 3위를 했지만, 안현수가 2007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자동으로 선발되어 이승훈도 개인전 자격이 없었지만, 후에 안현수가 부상당해 차순위 자격으로 개인전에 출전하게 된다.[9] 사과일수도 있고 위로를 건낸 것일 수도 있다.[10] 이미 1500m 결승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멘탈이 무너진 상황인데 당시까지는 한국 선수들의 메달밭이었던 1000m에서 마저도 메달 사냥에 실패해 이런 행동과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아직 500m가 남은 상황이었다지만 500m는 워낙 변수가 많은 종목이라 당시 최강자 중 한명이었던 성시백에게도 부담이 컸을 것이다. 거기다 이미 메달을 따고 남은 종목에 출전하는 것과 메달을 따지 못하고 남은 종목에 출전할때의 부담감은 천지차이다.[11] 심지어 부상으로 해당시즌 월드컵 시리즈를 제대로 치루지 못했음에도 이 성적이 나온 것이다.[12] 참고로 프랑수아루이 트랑블레가 예선전에서 세운 올림픽 신기록을 같은 동료인 샤를 아믈랭이 준결승에서 갈아치웠고 2009-10 시즌에는 1, 2위를 기록했다.[13] 이에 반해 대부분의 중국 페이스북 유저들로부터는 '재밌는데 뭐가 문제냐는 댓글들이 많았고', 성시백이 넘어진 것 덕분에 금메달을 어부지리로 따낸 캐나다 유저들도 재밌다는 반응이었다.[14] 더군다나 성시백은 그냥 그저 그런 스케이터가 아닌 현역시절 상당한 인정을 받았던 스케이터다. 얼마나 ISU 쇼트트랙 페이스북 관리자가 쇼트트랙에 대해 몰상식한지 잘 알려준 셈이다.[15] 이 금메달로 엄천호와 김병준이 군면제 혜택을 받았다.[16] 전직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전이경이 직접 성시백의 페이스북 프로필에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는 말과 은퇴를 축하하다는 글을 남겼다.[17] 원래대로라면 이호석이 없을시엔 성시백이 2번 주자를 맡아야 했지만 컨디션 문제인지 4번 주자로 출전했다.[18] 500미터 결승에서 발목에 무리를 느껴 제대로 레이스를 펼치지 못했고, 후에 계주 결승전에는 이호석곽윤기가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2번주자(이정수) 대신 4번 주자로 나섰다.[17] 그런데 11바퀴 남기고 1번 주자를 밀어주다 넘어졌고 발목에 더 큰무리가 생겨서인지 아니면 더 큰 부상을 예방하려는 차원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후에 레이스에서 빠지게된다. 결국 성시백이 빠지면서 1위로 잘 달리고 있던 한국이 캐나다와 미국에게 차례로 추월을 당하며 3위를 기록했다.[19] 참고로 바로 같은날 500m 이후에 있었던 계주 결승 경기를 본다면 성시백의 컨디션이 100%가 아니었다는걸 알 수 있다.[20] 체력적인 부담이 가장 적은 종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