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잠 요새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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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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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426년 2월 27일 ~ 3월 6일, 프랑스 왕국의 브르타뉴 공국군이 생잠 요새를 공격했다가 패퇴한 공방전.


2. 상세[편집]


장 5세 드 브르타뉴는 1399년 브르타뉴 공작위에 오른 뒤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국과의 사이에서 충성 대상을 이리저리 바꾸기로 악명 높았다. 1420년 5월 21일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면서 헨리 5세가 잉글랜드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이 되는 게 확실시되자 헨리 5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다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에게 궤멸되자 헨리 5세에 대항하여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던 도팽 샤를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전세가 잉글랜드쪽으로 기울자 1423년 아미앵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잉글랜드 쪽으로 전향했다.

1425년 동생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도팽 샤를에게 귀순한 뒤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자, 그 역시 도팽을 따르기로 마음먹고 그 해 10월 7일 소뮈르 조약에 서명해 샤를을 프랑스 국왕으로 받들었다. 이에 토머스 램프스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600명이 1426년 1월 브르타뉴를 침공하여 여러 마을을 약탈하다가 브르타뉴군이 대규모 역습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노르망디-브르타뉴 국경 지대에 있는 생잠 요새로 후퇴했다. 2월 27일, 장 5세의 동생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 민병대 16,000명이 생잠 요새로 접근했다. 그들은 정찰을 위해 나선 잉글랜드 병사들을 성안으로 몰아낸 뒤 도시를 포위했다.

리슈몽은 수적으로 절대 우세하지만 무장 수준과 전투력이 열악한 민병대로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 여기고, 강력한 포병대를 동원해 여러 방향에서 요새를 포격하게 했다. 포격은 7일간 이어졌고, 수비대가 견디다 못해 여러 차례 출격했지만 모두 격퇴되었다. 급기야 성벽에 2개의 큰 구멍이 생기자, 리슈몽은 전령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 시기 급료가 미지급되어 일부 병력이 탈영하자, 리슈몽은 장교들과 논의한 끝에 지체했다가 군대가 붕괴되는 꼴을 보느니 지금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3월 6일, 브르타뉴군은 생잠 요새에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 램프스턴과 잉글랜드 병사들은 온종일 격전을 치른 끝에 가까스로 물리쳤지만, 리슈몽이 재차 공세를 가해오자 점차 밀렸다. 이때 리슈몽이 요새 반대편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맡겼던 부대가 귀환했는데, 브르타뉴 민병대는 이들이 요새를 구하러 오는 잉글랜드군이라고 착각하고 도주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호기를 놓칠 수 없다고 여기고 도망가는 적군을 쫓아가 큰 손실을 입혔다. 수백 명의 민병대가 인근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고, 많은 이들은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리슈몽은 잔여 병력을 규합하려 했지만 다들 도망쳐버려서 성공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숙영지를 불태운 뒤 퇴각했다. 기록에 따르면, 민병대 60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생포되었으며, 18개의 군기가 잉글랜드군에 노획되었다고 한다.

이틀 후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생잠 요새에 당도했다. 그는 브르타뉴군이 형편없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브르타뉴로 침입해 공국의 수도인 렌을 압박하다가 장 5세로부터 평화 협상을 하자는 제안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났다. 이후 장 5세는 1427년 9월 8일 트루아 조약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고 헨리 6세를 프랑스 국왕으로서 받들기로 했다. 여기에 아들 질 드 브르타뉴를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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