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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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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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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네 전투
{{{-1 영어: Battle of Brignais
}}}
프랑스어: Bataille de Brignais
파일:Brigniais1362.jpg
시기1364년 4월 6일
장소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지역 브리네
원인브레티니 조약 이후 프랑스 시골 지역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자유 용병대를 토벌하려는 프랑스군의 공세
교전국자유 용병대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세갱 드 바드폴, 페린 드 사신 등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장 2세 드 멜룬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자크 1세 드 부르봉
병력15,000명기사 6,000명, 석궁병 및 궁병 4,000명을 포함한 12,000명
피해미미함.막대함.
결과자유 용병대의 승리.
영향자유 용병대의 횡포 지속.

1. 개요
2. 배경
3. 전투 경과
4. 이후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362년 4월 6일, 자유 용병대가 자신들을 진압하려는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


2. 배경[편집]


백년전쟁이 발발한 이래, 잉글랜드, 가스코뉴, 카스티야 연합 왕국, 나바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스코틀랜드 왕국 등 서유럽의 다양한 지역에 살던 전사들이 몰려와 용병 계약을 맺고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여러 마을과 요새를 점거하고 주민들로부터 보호비를 갈취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군대(free company)라 불렀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정규 군대를 따라왔다고 생각했기에 타르베누스(tards-venus: 늦게 온 부대) 또는 소규모 분견대의 부대원들을 의미하는 루티에(routiers)라고 불렀다.

1360년 10월 브레티니 조약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종식되자,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쪽에 고용되었던 용병대는 급료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랑드 콩파니(Grandes Compagnies)라고 불리는 대군세를 이루었는데, 그 숫자는 15,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며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프랑스 왕세자 샤를은 이 골치아픈 용병대를 내버려두면 프랑스가 재기 불능이 될 거라 여기고 어떻게든 토벌하기로 마음먹었다.

1361년 말, 용병대가 브리네 요새를 점령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리옹의 세네샬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장 2세 드 멜룬은 프랑스 왕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샤를은 퐁티외와 라마르슈 백작이며 프랑스 무관장인 자크 1세 드 부르봉에게 영주들의 군대를 소집해 장 2세 드 멜룬과 힘을 합치고, 부르고뉴에서 파견된 2번째 군대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린 뒤 용병대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프랑스군이 리옹 근교의 생제니스라발에 집결한 뒤 4월 6일에 브리네로 진군하면서 전투가 임박했다.


3. 전투 경과[편집]


브리네 전투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활동한 피렌체 연대기 작가 마테오 빌라니에 따르면, 자크 1세 드 부르봉은 부르고뉴군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브리네로 진격해 단숨에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용병대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공략이 실패하자, 도시 앞에 진을 치고 포위했다. 한편, 페린 드 사신이 이끄는 일부 용병대는 포레즈로 가서 약탈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브리네에 주둔한 용병대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동료들을 돕기 위해 브리네로 이동한 뒤 한밤중에 적진을 기습 공격했다. 프랑스군이 이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으로 혼란에 빠지자, 브리네에 있던 용병대도 출격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크게 패했다고 한다.

백년전쟁 초기에 관한 주요 출처를 제공한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세갱 드 바드폴의 지도하에 있던 용병대는 2개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첫번째 그룹은 생제니스라발과 브리네를잇는 도로에 전투 대형을 결성했고, 두번째 그룹은 인근 언덕 밑에 숨었다. 프랑스군은 정찰을 제대로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용병군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했지만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2차례 밀려났다. 이때 매복해 있던 용병대가 뛰쳐나와 프랑스군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고 한다. 둘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나, 전투 결과는 분명하다. 자크 1세 드 부르봉과 아들 피에르는 중상을 입고 패주한 뒤 리옹에서 함께 사망했고, 장 2세 드 멜룬 등 여러 고위급 기사와 영주들은 사로잡혔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무참히 살육되거나 도주했다. 용병대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으나 미미했을 것이다.


4. 이후[편집]


브리네 전투의 소식은 리옹에 공황을 퍼트렸다. 하지만 용병대는 고위급 장성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챙긴 막대한 몸값에 만족해 리옹을 공격하지 않고, 일부는 오베르뉴, 다른 일부는 북쪽의 부르고뉴로 이동해 성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농촌과 소도시들을 약탈했다. 이후 장 2세 드 멜룬은 용병대를 다른 곳으로 보낼 방안을 모색한 끝에 1362년 7월 23일 카스티야의 왕위 주장자인 라스타마라의 엔리케와 협상한 끝에 용병들을 카스티야 내전에 참전시켜 새 일자리를 마련해준다는 내용의 클레르몽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용병들은 엔리케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마침 피에레 인근에서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다르마냐크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간의 전쟁이 벌어지자, 많은 용병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얼마 후 가스통 3세가 대승을 거두면서 전쟁이 종결되자, 대부분의 용병들이 랑그독으로 다시 돌아와서 또다시 약탈을 자행했다. 결국 클레르몽 조약은 용병 도적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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