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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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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남자 쇼트트랙 선수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1998-99 시즌[편집]
그가 두각을 나타낸 건 1999년 3월 전국남녀학생종합선수권 대회였다. 이 대회에 등장한 그는 500m 우승을 포함해 개인전 종목에 입상하면서 난데없이 혜성처럼 등장했고 이후 불과 2개월 만에 국가대표가 되면서 차세대 선수로 주목을 받았다.
2.2. 1999-00 시즌[편집]
당초 국가대표팀에서 민룡은 경력이 부족한 만큼 착실하게 계주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이렇게 몇 개월 동안 경험을 쌓은 민룡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1차 월드컵에서 1500m와 3000m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자신의 이름을 쇼트트랙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이후에도 민룡은 다음 해 1월, 헝가리에서 열린 2000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하더니, 6차 월드컵에서 1000m와 3000m를 석권해 다시 한 번 남자부 종합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렇게 경력을 쌓아나가던 민룡에게 그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이 왔는데, 바로 세계선수권이였다.
당시 민룡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선수였지만 국내 쇼트트랙의 간판은 어디까지나 김동성이었다. 따라서 민룡에게 기대된 역할은 김동성을 든든하게 뒷받침 하는 일이었는데, 민룡은 이를 넘어서는 활약을 했다.
1999 세계선수권에서 종합 1위를 한 선수는 리자쥔이었다. 더군다나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쇼트트랙은 '노 금메달'의 수모를 얻었고, 에이스 김동성이 중간에 부상[3][4] 으로 빠진 2000년은 3년 연속 종합 1위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할 위기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민룡이 있었다. 당시 18세였던 그는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이어진 3000m에서는 전 해 세계 선수권 1위인 리자쥔을 0.438초로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여기에 더해 종합 순위에서도 에릭 베다르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이어서 세계선수권 3관왕을 차지하면서 국내 쇼트트랙은 에이스가 부상 당한 상황에서 오히려 세계선수권을 휩쓰는 대성공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성공을 한 그는 당연히 여러 사람들로부터 한국 쇼트트랙을 짊어질 차세대 선수로 주목받았다. 또한 김동성과 함께 주니어 세계선수권과 시니어 세계선수권을 둘 다 같은 시즌에 우승한 유일한 선수다.
2.3. 2000-01 시즌[편집]
2001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민룡을 꺾고 3관왕을 달성하며 포텐을 터트리던 이승재와 함께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졌다.
당시의 세계선수권은 홈인 전주시에서 열렸는데, 당시 한국의 간판스타인 김동성은 무릎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김동성이 다시 한번 빠진 지금 이전시즌 3관왕인 민룡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전 해와는 달리 비교적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남자 1000m에서 동메달, 남자 1500m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사실 이 메달 외에 다른 국가대표 선수가 따낸 메달은 여자 계주에서 은메달 한 개가 전부로, 당시 민룡은 세계선수권에서 대한민국이 따낸 메달 3개 중에 혼자 2개를 따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전한 셈이다.
세계선수권에서는 기대보다 못했으나 보여준게 있었기 때문에 민룡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중에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2.4. 2001-02 시즌[편집]
2.4.1. 월드컵 시리즈[편집]
다시 폼을 회복하면서 1차 월드컵에서는 3000m 결승에서 김동성을 누르고 우승하고, 1000m 부문에서도 김동성에 0.132 뒤진 2위를 기록하며 정상급 선수로서의 기량을 과시했다. 4차 월드컵에의 1000m에서도 민룡은 2위를 했는데 1위를 한 사람은 김동성으로, 김동성을 제외한다면 민룡은 3000m 뿐만 아니라 1000m에서도 자신이 세계최정상급임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 민룡, 이승재 등이 있는 남자대표팀이 역대 최고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와 이승재의 꿈은 불합리에 짓밟혔다.
2.4.2. 올림픽 1000m 출전 불가 논란[편집]
당시 개인전 출전권은 2장이었고 그 중 1장은 한국의 에이스였던 김동성이 굳건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남은 한 자리 중 민룡은 1500m, 이승재는 500m에 출전하기로 했었고 남은 관심사는 1000m였다. 당시에 이승재가 월드컵 랭킹 2위, 민룡이 월드컵 랭킹 4위로 정상급 실력을 보여주었기에 누가 뽑히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들이 아닌 풋내기 안현수였다.
당시의 안현수는 주니어 무대를 휩쓸며 활약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주니어 대회에서의 경력일 뿐, 시니어 대회에서는 아예 경력이 없었다. 2002년 1월에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뒤, 다른 경력 하나 없이 그대로 올림픽이라는 최정상급의 무대로 직행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당당히 경쟁을 통과해서 국가대표로 선발이 되었다면 논란이 될 것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현수는 선발전 등을 통과해서 자격을 획득한 것이 아니었다. 안현수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7위로 떨어졌고 아예 예비 후보에도 들지 못하는 선수였으나 1월 주니어 대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본 당시 대표팀 감독 전명규가 특별 추천으로 안현수를 추천했고, 마침 이재경이 부상을 당해 이 자리에 들어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수가 부상을 당했다면 선발전에서 차순위를 한 선수를 뽑는 것이 보통이지만 전명규의 추천 하나로 안현수는 선발전이고 뭐고 없이 그냥 주니어에서 곧바로 선수들이 그토록 바라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미 국가대표에 선발이 된 과정부터가 파격적이었는데, 이후 전명규는 더욱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1000m에 쇼트트랙 간판 김동성과 함께 내보낼 선수로 안현수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안현수는 전명규의 직권으로 대표팀에 들어온지 한 달도 되지 않았기에 그런 결정 자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안현수가 제낀 민룡과 이승재는 지난 1년 간 월드컵에서 활약한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었다. 실력도 정상급에 꾸준히 대회를 나가며 경력을 증명한 두 선수가, 선발전도 없이 갑자기 감독 연줄로 들어온 국제대회 무경력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올림픽 개인전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 같은 사태를 정당화 시켜줄 명분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쳐도 당시에 감독이었던 전명규가 한 드립은 가히 가관인데, 국제대회에서 꾸준히 상위 입상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준 민룡과 이승재보다는 아예 경력이 없는 안현수가 전력 노출이 덜 되었다라는 것이 전명규의 주장이였다.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고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는 황당한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올림픽을 꿈꾸며 노력한 선수들을 엿 먹이는 말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전명규는 한국체육대학교 파벌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민룡은 계명대학교, 이승재는 서울대학교 출신이기에 한국체육대학교 파벌이 아니었다. 이승재의 경우 어린 나이에 낮에는 쇼트트랙 선수로 연습하고 밤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던 선수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한체대를 졸업하지 않아 전명규에게는 얄짤이 없었다. 반면에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안현수는 이후 한체대에 입학했다. 이러한 '고등학생 시절부터 싹수를 보여 국가대표 선발→이후 한체대 입학'이란 코스는 최은경, 강윤미, 정은주 등도 똑같이 따라갔다.
이러한 결정은 심지어 빙상연맹 내에서도 반발이 있을 정도였는데 당시에 전명규가 워낙 강하게 나오는지라 결국 성사되었다. 안현수의 아버지는 그때 당시의 전명규에 대해 "너무나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
2.4.3.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편집]
1000m 출전을 억울하게 전명규에게 강탈당한 그는 그 뒤 꿈의 무대 올림픽에서 출전해서 일류 선수의 위상을 보여줄 기세로 김동성-이승재-민룡-오세종의 조합으로 5000m 계주에 출전하게 되었다. 여기서 금메달을 땄다면 1000m를 나가지 못한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었겠지만, 운명은 그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5000m 계주에서 20바퀴가 남았을 때 역전을 위해 추월을 시도했는데 러스티 스미스가 왼쪽 팔꿈치로 그의 오른쪽 허벅지를 밀었다.
속도가 붙은 상황에서 이런 반칙을 당하는 바람에 곧바로 펜스로 밀려났고, 그 와중에 같이 넘어진 니콜라 로디가리가 허리 쪽으로 부딪히는 바람에 부상이 커졌다. 그나마 로디가리가 넘어지면서 스케이트 날에 다치지 않도록 자세를 잡아서 그렇지, 스케이트 날에 잘못 맞았다면 선수 생명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써의 인생이 흔들릴 수 있었던 위급한 순간이었다.
결국 큰 부상을 당한 그는 바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당시 전명규는 재경기를 기대하고 부상으로 실려간 민룡 대신 안현수를 투입시키려고 했으나, 되려 한국 팀이 실격을 받았다.[5]
여기에 더해 당시 미국 언론은 진짜 아픈거 맞냐, 재경기 하려고 쇼하는 거 아니냐는 개드립을 쳐댔다. 이 계주 부상의 여파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개인전이었던 남자 1500m마저 안현수에게 넘겨주었다.[6] 김동성은 헐리우드 액션에 희생당했고 500m에 나온 이승재는 오심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리고 안현수가 출전한 1000m에선 호주 선수가 행운을 거머쥐면서 결국 한국 남자 대표 팀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특히 본인은 개인전을 빼앗긴 뒤 계주에서마저 더티 플레이에 농락되어 올림픽 대표의 꿈을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안타깝게도 이때 부상을 당한 이후로 상승세가 완전히 끊기며 커리어가 완전히 끝장났다.
2.5. 2002-03 시즌[편집]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해 대표팀 입성에 실패했다. 연맹 추천에서 안현수와 김동성이 뽑힌 가운데, 김동성이 무릎 부상을 이유로 대표팀 자리를 반납했고, 이후 3차 월드컵 때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 때문에 선수가 더 필요했던 대표팀에 민룡이 소집되어 월드컵에서 경기를 뛰지만 더 이상 예전 만큼의 폼이 나오지 않았다. 이승재의 경우 그래도 이후에 계속 선수로 활약은 했으나 민룡은 불과 20세 즈음한 나이에 선수로써의 모든 커리어를 끝냈다.
여러 상황을 보면 그는 가장 큰 피해자임에 분명하지만, 빙상연맹이 미친듯이 욕을 먹는 상황에서도 정작 크게 부각되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놓였다. 사실 일단 그에게 올림픽 출전 기회는 주어졌고 민룡의 주치의가 스케이트 더 타면 몸 망가진다고 경고를 했는데 빙상연맹이 강제로 보낸 것도 아니고 러스티 스미스의 반칙으로 인한 부상 때문이라 빙상연맹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는 있다. 여러가지로 재능에 비해 안타까운 선수임에는 분명하다.[7]
3. 평가[편집]
쇼트트랙 선수로는 장신에 대부분 가벼운 체중을 유지하는 한국선수들과 다르게 몸무게가 꽤 많이 나가는 편이었고 덕분에 서구권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피지컬과 파워를 보여줄 수 있었다.
4. 여담[편집]
5. 수상 기록[편집]
5.1. 월드컵 성적[편집]
[1] 이정공파(梨亭公派) 30세 병(丙)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남동생 민병운(閔丙鄖, 1985 ~ )은 항렬자를 썼다.[2] 현역시절[3] 2000 세계선수권 500m 준결승에서 중국의 리자준의 희대의 비매너 플레이로 인해 당한 것이다. 김동성과 리자준이 함께 넘어졌는데 리자준이 본인의 스케이트 날로 김동성의 몸을 강하게 찍은 것이다.[4] 그리고 이 둘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000미터 준결승에서도 악연을 이어가 이로 인해 호주의 어느 선수가 어부지리 금메달을 땄다.[5] 그 뒤 미국은 결승에 올라갔으나 중국 선수와의 충돌로 인해 4위를 기록했다.[6] 민룡이 가지고 있던 1500m 출전권은 물론 한 달 뒤에 열린 세계선수권 개인전 자리마저 이승재나 차순위 선수들이 아닌 안현수가 차지했다.[7] 정작 파벌로 본인의 기회를 뺏어간 안현수는 나중에 파벌로 밀려났을 때 피해자 행세를 대대적으로 하면서 아직까지도 파벌의 피해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더 통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