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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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들과 관련한 문서다.
바그너의 오페라, 또는 악극(music drama)은 바그너의 예술적 총결산이다.
그의 오페라는 시대적으로 세 기간으로 구분할수 있다. 초기, 중기, 말기이다. 바그너가 처음 시도한 오페라는 그가 19세 때인 1832년으로 '결혼'(Die Hochzeit)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그너는 '결혼'을 작곡하다가 초기에 포기했다. 그러므로 완성된 오페라는 아니다. 바그너의 초기에 완성한 세 편의 오페라는 '요정들'(Die Feen), '사랑금지'(Das Liebesverbot), 그리고 '리엔치'(Rienzi)이다. 이들 작품의 스타일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이며 형식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세계 음악사에 있어서 바그너를 특별한 위치에 올려 놓은 개혁적인 모습을 볼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바그너는 훗날 이 세편의 오페라를 성숙하고 완성된 오페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한바 있다. 바그너는 그의 생전에 이상하게도 '리엔치'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마땅치 못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이상의 세 작품은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다.[1] . 다만 초기 시절 작품도 충분히 잘 만든 오페라들이다. 바그너 자신이 무시했다고 해서 초기작이 모두 형편없다라고 판단은 오판이다. 바그너가 이 작품들을 무시한 이유는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생기기 전에 만든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중기 오페라들은 걸작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중기 오페라들은 극작가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그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바그너의 중기 오페라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으로 시작하며 '탄호이저'(Tannhäuser)와 '로엔그린'(Lohengrin)이 포함된다. 이들 중기 오페라들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자주 공연되는 것들이다.
바그너의 말기 오페라들은 오페라 예술을 한발짝 앞서가게 만든 걸작들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는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중 하나라는 평을 듣고 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는 바그너의 성숙기 오페라 중에서 유일한 코미디라는 얘기를 듣고 있다.[2]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공연시간이 길지만 아직도 자주 공연되고 있는 것을 보면 길이와는 상관 없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보통 '링 사이클'이라고 불리는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대체로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줄거리에 기본을 둔 것으로 특히 북구의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링 사이클'은 네편의 오페라로 구성되어 있다. 바그너는 '링 사이클'의 제작에 있어서 아이슬랜드의 서사시, 즉 '포에틱 에다'(시 에다: Poetic Edda), 볼숭가 사가(Volsunga Saga),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로부터 많은 참고를 했다. '링 사이클'은 구상부터 완성까지 무려 약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네 편을 모두 공연한다면 17시간이나 걸리는 대작이다. 음악사학자들은 '링 사이클'이 바그너의 음악작품 중에서 가장 야심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특별히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오프닝을 위해 작곡된 '파르지팔'(Parsifal)은 성배(聖杯)의 전설에 바탕을 둔 무언가 명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파르지팔'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오프닝을 위해 작곡한 것이므로 스코어에 '무대봉헌을 위한 축제공연'(Bühnenweihfestspiel)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바그너는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를 주창하면서 그것을 '악극'이라고 불렀다. '악극'이라고 한 것은 음악적인 요소와 드라마틱한 요소가 함께 융합할 때에 완성된 음악극을 만들어 낼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바그너는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는 달리 오페라의 대본이나 노래가사를 모두 그가 직접 썼다. 바그너는 자기가 쓴 대본을 대본(리브레티)이라고 부르지 않고 시(포임)라고 불렀다. 바그너 오페라의 줄거리는 대체로 북구의 신화거나 전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말하자면 게르만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바그너는 작곡 스타일에 있어서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의 역할과 동등하게 처리했다. 오케스트라의 드라마틱한 역할은 라이트모티프(Leitmotifs)를 충실하게 연주하는 것을 포함한다. 라이트모티프라는 것은 어떤 특정 주인공, 장소, 사건 등을 표현하는 음악적 주제를 말한다. 라이트모티프의 복잡한 전개와 발전은 드라마의 진전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바그너의 음악적 스타일은 가끔 클래시컬 음악에서 낭만주의 기간을 압축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과거에는 볼수 없었던 감정표현의 새로운 탐험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모니와 음악적 형태에 있어서 극도의 반음계주의를 포함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하였다. '트리스탄 코드'(Tristan chord)라는 말이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첫 음을 말한다. 음악학자들은 '트리스탄 코드'로부터 현대 클래시컬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전통적인 토널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음조들과 코드들에게 각각의 주체성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무조주의로 가는 길을 제시하였다.
바그너의 대표작 10개의 작품들은 볼드칠한 작품들이다. 이 열개의 작품들은 바그너 스스로가 인정한 작품들이며 모두 다 걸작들이다. 바그너 캐논(Wagner canon) 또는 바이로이트 캐논(Bayreuth Canon)이라고도 한다. 현재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는 이 10개의 작품만 상연되고 있다. 열 개의 작품 이외에도 초기작으로 요정(Die Feen)[3] , 연애금지(Das Liebesverbot)[4] , 리엔치[5] 세 개의 오페라가 더 있다. 하지만 바그너는 이 작품들은 비성숙하여 자신의 예술작으로 치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한 바 있으며, 실제로도 거의 상연되지 않는다. 바이로이트에서도 이 세개의 작품은 공연하지 않는다.
바그너는 오페라 이외의 음악은 별로 작곡하지 않았다.
19세 때에 '파우스트 교향곡'이라는 교향곡을 하나 작곡하려 했지만 제1악장만 완성했을 뿐이었다. 나중에 이 음악은 '파우스트 서곡'이라는 명칭의 작품이 되었다. 바그너는 몇 편의 서곡들과 합창 음악, 피아노 소품 들도 작곡했다. 그리고 글룩의 '올리드의 이피제니'(Iphigenie en Aulide)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다시 만든 것이 있다. 이들 중에서 오늘날에도 그나마 자주 연주되고 있는 것은 '지그프리트 목가'(Siegfried Idyll)라는 작품이다. 바그너가 두번째 부인인 코지마의 결혼후 처음 맞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이 곡에 나오는 몇 개의 멜로디는 나중에 '링 사이클'의 모티프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베젠동크 가곡'(Wesendonck Lieder)이다. '여성 음성을 위한 다섯 노래'(Five Songs for a Female Voice)라고 알려진 것이다.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 중에 마틸데 베젠동크의 시를 사용하여 작곡한 것이다. 좀 색다른 곡은 1876년에 만든 '미국 100주년 행진곡'(American Centennial March)이다. 필라델피아가 센테니얼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기념으로 바그너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당시 바그너는 첫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개최하고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지휘를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달려가서 지휘를 하고 사례를 받아 조금이라도 적자를 메꾸려 했다. 바그너는 필라델피아로부터 작곡료로 5천불을 받았다.
바그너의 중기 및 말기 오페라에 나오는 서곡, 또는 중간에 나오는 오케스트라만의 음악들은 콘서트 레퍼토리로 자주 연주되고 있다. 바그너는 그런 예상을 하고 서곡이나 기타 오케스트라만의 음악들을 조금 손질하여 갑자기 끝나지 않고 그럴듯하게 끝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파르지팔'의 전주곡이나 장송행진곡을 보면 알수 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도 연주회용으로 손질을 했다. 그런데 인기가 없어서 거의 들을수 없다. 오리지널 전주곡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어 수많은 글을 썼다. 논문도 쓰고 에세이도 썼으며 시도 쓰고 오페라의 대본와 노래의 가사도 썼다. 게다가 아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도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렇게 쓴 글들을 정리하면 수백편이 넘는다. 바그너의 글들은 분야가 폭이 넓다. 정치에 대한 글도 있으며 철학적인 글도 있다. 또한 자기 오페라를 세부적으로 분석한 글도 있다. 에세이들은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대표적인 에세이집은 오페라의 이론에 대한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 1851), 유태계 작곡가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표명한 '음악에 있어서 유태인'(Das Judenthum in der Musik: 1850) 등이 있다. '음악에 있어서 유태인'은 특별히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를 겨냥한 비판적인 내용이다. 바그너는 또한 자서전인 '나의 삶'(Mein Leben: 1880)을 썼다. 다만 자서전의 평은 좋지않다. 바그너가 왜곡해서 쓴 부분들도 많고 틀린 정보들도 많기 때문이다.
1. 개요[편집]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들과 관련한 문서다.
2. 오페라(악극)[편집]
"음악과 문학이 완벽히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져야 한다. 가수의 목소리는 시를 전달하는 도구이며, 커다란 오케스트라에서 하나의 악기일 뿐이다. 오케스트라는 가수의 노래를 반주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때론 독립적인 메세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 리하르트 바그너
바그너의 오페라, 또는 악극(music drama)은 바그너의 예술적 총결산이다.
그의 오페라는 시대적으로 세 기간으로 구분할수 있다. 초기, 중기, 말기이다. 바그너가 처음 시도한 오페라는 그가 19세 때인 1832년으로 '결혼'(Die Hochzeit)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그너는 '결혼'을 작곡하다가 초기에 포기했다. 그러므로 완성된 오페라는 아니다. 바그너의 초기에 완성한 세 편의 오페라는 '요정들'(Die Feen), '사랑금지'(Das Liebesverbot), 그리고 '리엔치'(Rienzi)이다. 이들 작품의 스타일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이며 형식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세계 음악사에 있어서 바그너를 특별한 위치에 올려 놓은 개혁적인 모습을 볼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바그너는 훗날 이 세편의 오페라를 성숙하고 완성된 오페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한바 있다. 바그너는 그의 생전에 이상하게도 '리엔치'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마땅치 못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이상의 세 작품은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다.[1] . 다만 초기 시절 작품도 충분히 잘 만든 오페라들이다. 바그너 자신이 무시했다고 해서 초기작이 모두 형편없다라고 판단은 오판이다. 바그너가 이 작품들을 무시한 이유는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생기기 전에 만든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중기 오페라들은 걸작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중기 오페라들은 극작가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그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바그너의 중기 오페라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으로 시작하며 '탄호이저'(Tannhäuser)와 '로엔그린'(Lohengrin)이 포함된다. 이들 중기 오페라들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자주 공연되는 것들이다.
바그너의 말기 오페라들은 오페라 예술을 한발짝 앞서가게 만든 걸작들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는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중 하나라는 평을 듣고 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는 바그너의 성숙기 오페라 중에서 유일한 코미디라는 얘기를 듣고 있다.[2]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공연시간이 길지만 아직도 자주 공연되고 있는 것을 보면 길이와는 상관 없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보통 '링 사이클'이라고 불리는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대체로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줄거리에 기본을 둔 것으로 특히 북구의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링 사이클'은 네편의 오페라로 구성되어 있다. 바그너는 '링 사이클'의 제작에 있어서 아이슬랜드의 서사시, 즉 '포에틱 에다'(시 에다: Poetic Edda), 볼숭가 사가(Volsunga Saga),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로부터 많은 참고를 했다. '링 사이클'은 구상부터 완성까지 무려 약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네 편을 모두 공연한다면 17시간이나 걸리는 대작이다. 음악사학자들은 '링 사이클'이 바그너의 음악작품 중에서 가장 야심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특별히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오프닝을 위해 작곡된 '파르지팔'(Parsifal)은 성배(聖杯)의 전설에 바탕을 둔 무언가 명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파르지팔'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오프닝을 위해 작곡한 것이므로 스코어에 '무대봉헌을 위한 축제공연'(Bühnenweihfestspiel)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바그너는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를 주창하면서 그것을 '악극'이라고 불렀다. '악극'이라고 한 것은 음악적인 요소와 드라마틱한 요소가 함께 융합할 때에 완성된 음악극을 만들어 낼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바그너는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는 달리 오페라의 대본이나 노래가사를 모두 그가 직접 썼다. 바그너는 자기가 쓴 대본을 대본(리브레티)이라고 부르지 않고 시(포임)라고 불렀다. 바그너 오페라의 줄거리는 대체로 북구의 신화거나 전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말하자면 게르만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바그너는 작곡 스타일에 있어서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의 역할과 동등하게 처리했다. 오케스트라의 드라마틱한 역할은 라이트모티프(Leitmotifs)를 충실하게 연주하는 것을 포함한다. 라이트모티프라는 것은 어떤 특정 주인공, 장소, 사건 등을 표현하는 음악적 주제를 말한다. 라이트모티프의 복잡한 전개와 발전은 드라마의 진전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바그너의 음악적 스타일은 가끔 클래시컬 음악에서 낭만주의 기간을 압축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과거에는 볼수 없었던 감정표현의 새로운 탐험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모니와 음악적 형태에 있어서 극도의 반음계주의를 포함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하였다. '트리스탄 코드'(Tristan chord)라는 말이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첫 음을 말한다. 음악학자들은 '트리스탄 코드'로부터 현대 클래시컬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전통적인 토널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음조들과 코드들에게 각각의 주체성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무조주의로 가는 길을 제시하였다.
2.1. 작품들[편집]
바그너의 대표작 10개의 작품들은 볼드칠한 작품들이다. 이 열개의 작품들은 바그너 스스로가 인정한 작품들이며 모두 다 걸작들이다. 바그너 캐논(Wagner canon) 또는 바이로이트 캐논(Bayreuth Canon)이라고도 한다. 현재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는 이 10개의 작품만 상연되고 있다. 열 개의 작품 이외에도 초기작으로 요정(Die Feen)[3] , 연애금지(Das Liebesverbot)[4] , 리엔치[5] 세 개의 오페라가 더 있다. 하지만 바그너는 이 작품들은 비성숙하여 자신의 예술작으로 치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한 바 있으며, 실제로도 거의 상연되지 않는다. 바이로이트에서도 이 세개의 작품은 공연하지 않는다.
- 시대구분
- 습작시대(20 ~ 28세) : <요정> ~ <리엔치>
-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29 ~ 36세) :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 <로엔그린>
- 악극시대(37세 ~ 70세) : <트리스탄과 이졸데> ~ <파르지팔>
2.2. 무대공연 목록[편집]
3. 오페라 이외의 작품들[편집]
바그너는 오페라 이외의 음악은 별로 작곡하지 않았다.
19세 때에 '파우스트 교향곡'이라는 교향곡을 하나 작곡하려 했지만 제1악장만 완성했을 뿐이었다. 나중에 이 음악은 '파우스트 서곡'이라는 명칭의 작품이 되었다. 바그너는 몇 편의 서곡들과 합창 음악, 피아노 소품 들도 작곡했다. 그리고 글룩의 '올리드의 이피제니'(Iphigenie en Aulide)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다시 만든 것이 있다. 이들 중에서 오늘날에도 그나마 자주 연주되고 있는 것은 '지그프리트 목가'(Siegfried Idyll)라는 작품이다. 바그너가 두번째 부인인 코지마의 결혼후 처음 맞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이 곡에 나오는 몇 개의 멜로디는 나중에 '링 사이클'의 모티프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베젠동크 가곡'(Wesendonck Lieder)이다. '여성 음성을 위한 다섯 노래'(Five Songs for a Female Voice)라고 알려진 것이다.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 중에 마틸데 베젠동크의 시를 사용하여 작곡한 것이다. 좀 색다른 곡은 1876년에 만든 '미국 100주년 행진곡'(American Centennial March)이다. 필라델피아가 센테니얼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기념으로 바그너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당시 바그너는 첫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개최하고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지휘를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달려가서 지휘를 하고 사례를 받아 조금이라도 적자를 메꾸려 했다. 바그너는 필라델피아로부터 작곡료로 5천불을 받았다.
바그너의 중기 및 말기 오페라에 나오는 서곡, 또는 중간에 나오는 오케스트라만의 음악들은 콘서트 레퍼토리로 자주 연주되고 있다. 바그너는 그런 예상을 하고 서곡이나 기타 오케스트라만의 음악들을 조금 손질하여 갑자기 끝나지 않고 그럴듯하게 끝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파르지팔'의 전주곡이나 장송행진곡을 보면 알수 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도 연주회용으로 손질을 했다. 그런데 인기가 없어서 거의 들을수 없다. 오리지널 전주곡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집필[편집]
바그너는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어 수많은 글을 썼다. 논문도 쓰고 에세이도 썼으며 시도 쓰고 오페라의 대본와 노래의 가사도 썼다. 게다가 아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도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렇게 쓴 글들을 정리하면 수백편이 넘는다. 바그너의 글들은 분야가 폭이 넓다. 정치에 대한 글도 있으며 철학적인 글도 있다. 또한 자기 오페라를 세부적으로 분석한 글도 있다. 에세이들은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대표적인 에세이집은 오페라의 이론에 대한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 1851), 유태계 작곡가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표명한 '음악에 있어서 유태인'(Das Judenthum in der Musik: 1850) 등이 있다. '음악에 있어서 유태인'은 특별히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를 겨냥한 비판적인 내용이다. 바그너는 또한 자서전인 '나의 삶'(Mein Leben: 1880)을 썼다. 다만 자서전의 평은 좋지않다. 바그너가 왜곡해서 쓴 부분들도 많고 틀린 정보들도 많기 때문이다.
5. 작품 전체 목록[편집]
[1] '리엔치'의 서곡만이 콘서트의 레퍼토리로서 간혹 등장할 뿐이다[2] 물론 초기의 '사랑금지'도 희극 오페라이다.[3] 생전에 연주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연주 자체도 바그너 사후인 1888년에야 이루어졌다.[4] 생전에 딱 한 번 연주된 뒤로는 망해서 연주가 되지도 못했으며, 완성도도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는 가장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5] 생전에는 엄청난 인기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서곡만 자주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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