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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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브라질 제국의 황제 페드루 1세의 두번째 황후. 프랑스어 이름은 '아멜리'이고, 포르투갈어 이름은 '아멜리아'가 된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812년 7월 31일 밀라노에서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의 2남 5녀 중 3녀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첫번째 아내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고, 외할아버지는 바이에른 왕국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다. 아멜리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외젠은 나폴레옹 1세에게 입양되어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1814년 나폴레옹이 권력을 잃자 아멜리는 밀라노를 떠나 외가인 바이에른 왕국 뮌헨에 정착했다. 아멜리의 부모는 자녀들의 혼삿길이 막힐까 두려워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멀리했다. 그 결과 첫째 언니 조제핀이 오스카르 1세와 결혼하여 훗날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2.2. 결혼[편집]
1826년, 브라질 제국 페드루 1세의 황후 마리아 레오폴디네가 8번째 아이를 유산한 후 산욕열로 사망했다. 페드루 1세는 불륜을 저지르며 자신의 정부를 레오폴디네의 시녀로 두게 하고, 레오폴디네에게 폭력을 가한 가정폭력범이었다. 레오폴디네가 사망한 후 그는 자신의 행동을 깊이 후회하였고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재혼하기로 결심했다. 페드루 1세는 아름답고 미덕을 갖춘 왕녀를 새 아내로 들이길 원했으나 당시 페드루 1세의 만행을 잘 알고 있었던 유럽의 공주들은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게다가 전 장인어른인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외손자가 브라질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재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2]
8번이나 청혼을 거절당한 페드루 1세는 기준을 낮춰 공주 출신이 아니더라도 아름답고 도덕적인 품성을 지닌 여인과의 재혼을 원했고, 이 조건에 바로 아멜리가 부합했다. 아멜리는 공주는 아니었지만 외가가 바이에른 왕가였고, 푸른 눈과 갈색 머리를 가진 매우 아름다운 외모였으며,[3] 많은 교육을 받아 교양있고 지적이었다.
페드루 1세는 아멜리를 마음에 들어하여 1829년 5월 29일 결혼 협상을 완료했다. 8월 2일, 뮌헨 로이히텐베르크 궁전에서 대리인을 통한 결혼식을 올린 후 아멜리는 14살 연상의 남편을 만나기 위해 브라질로 떠났다. 당시 아멜리는 17살이었다.
2.3. 황후[편집]
1829년 10월 15일 브라질에 도착한 아멜리는 이틀 뒤 페드루 1세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아멜리와 의붓 자녀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아멜리는 아이들의 교육에 직접 신경썼고, 아이들 또한 아멜리를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특히 후계자인 페드루 황태자와 사이가 좋아서 아멜리가 죽을 때까지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또 아멜리는 궁정의 인테리어를 새롭게 꾸미고, 음식과 패션을 현대화했다. 언제나 완벽하게 옷을 입은 아멜리의 우아함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했다.
2.4. 남편과 딸의 죽음[편집]
그러나 1831년, 브라질의 정치·경제적 위기로 남편 페드루 1세가 황위에서 물러나 페드루 2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이후 페드루 1세와 아멜리는 각각 브라간사 공작 및 공작부인으로 불렸고, 브라질을 떠나 프랑스 왕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아멜리는 임신중이었는데 프랑스에 도착한 후 유일한 딸 마리아 아멜리아 공주를 출산했다.
한편 페드루 1세는 딸의 왕위를 빼앗은 남동생 미겔 1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페드루 1세가 승리하고 미겔 1세가 퇴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아멜리는 딸과 함께 포르투갈로 향했다.
그러나 1834년 9월 24일, 페드루 1세가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당시 22살이던 아멜리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지만 재혼하지 않고 딸 마리아 아멜리아를 키우는데 전념했다. 마리아 아멜리아가 20살이 되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남동생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과 약혼하였으나, 다음해 결핵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4] 아멜리는 하나밖에 없는 딸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여 매년 딸의 무덤을 찾았고, 마리아 아멜리아가 마지막까지 요양했던 마데이라 제도의 푼샬에 폐 질환을 치료하는 병원을 세웠다.[5]
2.5. 말년[편집]
딸이 세상을 떠난 후 아멜리는 리스본에서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협심증으로 거의 궁궐에서만 지냈지만, 1871년 의붓아들 페드루 2세가 포르투갈에 방문했을 때 재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873년 1월 26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언에 의해 유산은 언니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에게 상속되어 현재도 아멜리의 보석들을 스웨덴 왕가에서 관리하고 있다.[6]
유해는 브라간사 판테온에 안장되었다가 1982년 브라질로 이장되어 페드루 1세와 마리아 레오폴디네 곁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4. 여담[편집]
- 남매가 부녀와 나란히 결혼했다. 먼저 아멜리가 페드루 1세의 계후로 시집가 마리아 2세의 새엄마가 되었고, 이후 아멜리의 오빠 오귀스트가 페드루 1세의 딸 마리아 2세와 결혼해 아멜리의 사위가 되었다(...). 그래도 오빠 오귀스트가 마리아 2세와 결혼한지 얼마 안 가 죽어 이러한 개족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 2012년 상파울루 대학교에서 페드루 1세와 마리아 레오폴디네, 그리고 아멜리의 무덤을 발굴했는데, 시신이 미라 상태였다고 한다. 피부와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장기도 모두 보존된 상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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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의 남편이다.[2] 당시 페드루 1세와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유일한 아들인 페드루 황태자가 고작 1살이었기 때문에 요절할 경우 새 황후가 낳은 아들이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3] 외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이 외모로 유명했다. 어머니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와 언니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 또한 엄청난 미인이었다.[4] 막시밀리아노 1세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그와 결혼했어도 행복한 삶을 보내기는 어려웠을듯 하다.[5] 이 병원은 아멜리가 사망한 후 유언에 따라 언니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에게 넘겨졌고, 이후 스웨덴 왕실에서 관리하고 있다. 2017년에 실비아 왕비가 병원에 직접 방문했다.[6] 현 스웨덴 왕비 실비아가 종종 아멜리의 유품인 브라간사 티아라를 착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