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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
덤프버전 :
일제강점기의 대동문. 옹성이 헐린 뒤라서 원형에서 다소 변형되어 있다.
大同門 / Taedongmun
1. 개요[편집]
평양시 이문동(里門洞) 1-6번지(북한 행정구역상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성문이다. 북한의 국보 제4호. 평양성의 동문(東門)으로 역사는 고구려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나 지금의 문은 조선 중기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누각이 1층이 중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점이다.
조선시대 말기까지는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방어시설로써 수원화성의 장안문이나 팔달문같이 반원형 형태의 옹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1층의 초서체 현판은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2층의 해서체 현판은 평안감사 박엽(朴燁)의 글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맨 위의 사진엔 흰 현판이 2층에, 검은 현판이 1층에 걸려 있다. 게다가 흰 현판도 초서체가 아니다. 한편 揖灝樓(읍호루)라는 현판의 '읍호'는 문루에서 손을 내밀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린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이 문 바깥에 나루터가 있어서 동평양 쪽으로 가는 나룻배를 탈 수 있었다. 대동문 건너편 쪽이 선교(船橋), 선교리(船橋里)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지명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중구역(대동문 소재 구역) 건너편 구역을 선교구역이라고 부른다.
대동문 옆 종각에는 평양종이 있는데, 이른바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23호이다. 조선 말엽까지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2. 일제강점기[편집]
일제강점기에 많이 훼손되었다. 대동문은 부분적으로 많이 변형되었다. 문루 1층의 대가 좌우로 넓어지고, 창문이 설치되는 등... 현판 역시 다른 글씨체를 가진 것으로 바뀌었다.
3. 현재의 대동문[편집]
한국전쟁 때 대동문은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고, 현재는 북한에서 복원해 놓았다. 게다가 사진으로 비교해본다면 원래의 대동문보다 훨씬 작게 지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우의 문각 위치나 문루 2층의 창문 부분이 막혀있는 것을 보자. 위 사진에서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성벽의 높이는 대동강변을 향한 둑의 높이 때문에 이전보다 낮은 것처럼 보인다.
2009년 12월 대동문의 설경. 오른쪽의 종각은 평양 종각[1] .
파일:대동문_두번째_복원.jpg
현재는 일제시대의 여러사진들을 참고하여 자잘한 것들을 새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4. 기타[편집]
일본에서는 야키니쿠집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5. 관련 문서[편집]
[1] 1726년 주조된 평양종이 걸려있으며, 지금의 종각은 1827년 고쳐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