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칭시
덤프버전 :
파일:중국 다칭.jpg
시내 동남부 롱펑구의 산용 호수 일대 풍경
1. 개요[편집]
중국 헤이룽장성 서부의 지급시. 하얼빈에서 서북쪽, 치치하얼에서 동남으로 각각 120km 떨어진 두 도시 중간 지점의 습한 평지에 위치해 있다. 관할 인구 280만명 중 도시 자체에 150만명이 거주한다. 지명은 중국 최대 규모이자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인근의 다칭유전에서 유래되었다. 애초에 유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계획도시이기에 석유 산업이 도시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그외에 한국의 충주시와 자매도시이다.
시가지는 서쪽의 랑후루 구와 동쪽의 사얼투 & 롱펑구로 양분되어 있는데, 둘 사이의 훙강구가 개발되며 점차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 사얼투 쪽이 원도심이지만 랑후루 쪽이 크게 개발되어 철도역이 후자의 다칭시역으로 이전되었다. 치치하얼-무단장 간의 고속철도가 지나고, 퉁랴오-베이징 방면 일반 철도 역시 지나간다. 시가지 북쪽 외곽의 다칭 저수지 밑에 다칭 사얼투 공항이 있다. 도시 내부와 주변에 크고 작은 호수와 저수지가 매우 많다.
2. 역사[편집]
청나라 때에는 그저 그런 습지대와 초원에 불과하였고, 데르베트 오이라트 부족의 사냥터였다. 그러던 1898년 러시아 제국이 건설한 동만주 철도가 일대를 지나고, 현 시내 중심부인 사얼투에 역이 생겼다. 이로써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작은 규모에 그쳤다. 하지만 1958년 다칭 유전이 개발되자 그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듬해 동명의 도시가 세워진 것이 현 다칭의 기원이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주년을 앞서고 있었기에, '큰 경사'를 뜻하는 대경(大庆/大慶)이 유전과 도시의 이름으로 붙여졌다. 1960년부터 1979년까지 동쪽의 안다시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다칭시로 자립하였고, 주도권을 빼앗긴 안다시는 쇠퇴하여 현재는 쑤이화시에 속한 현으로 남아있다.
3. 공업은 다칭에서 배워라 ![편집]
한편 1960년대 마오쩌둥은 다칭의 성장을 거론하며 '산업은 다칭에서 배워라' (工业学大庆)는 강령을 지시한다. 이 문구는 문화대혁명 당시 산업 발전의 예시로써 전국의 홍위병들이 마르고 닳도록 강조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