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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호(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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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

아스카
시대]]

다이카(大化) 하쿠치(白雉) - 슈초(朱鳥) - 다이호(大宝) 게이운(慶雲) 와도(和銅)

와도(和銅) 레이키(霊亀) 요로(養老) 진키(神亀) 덴표(天平) 덴표칸포(天平感宝) 덴표쇼호(天平勝宝) 덴표호지(天平宝字) 덴표진고(天平神護) 진고케이운(神護景雲) 호키(宝亀) 덴오(天応) 엔랴쿠(延暦)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엔랴쿠(延暦) 다이도(大同) 고닌(弘仁) 덴초(天長) 조와(承和) 가쇼(嘉祥) 닌주(仁寿) 사이코(斉衡) 덴난(天安) 조간(貞観) 간교(元慶) 닌나(仁和) 간표(寛平) 쇼타이(昌泰) 엔기(延喜) 엔초(延長) 조헤이(承平) 덴교(天慶) 덴랴쿠(天暦) 덴토쿠(天徳) 오와(応和) 고호(康保) 안나(安和) 덴로쿠(天禄) 덴엔(天延) 조겐(貞元) 덴겐(天元) 에이간(永観) 간나(寛和) 에이엔(永延) 에이소(永祚) 쇼랴쿠(正暦) 조토쿠(長徳) 조호(長保) 간코(寛弘) 조와(長和) 간닌(寛仁) 지안(治安) 만주(万寿) 조겐(長元) 조랴쿠(長暦) 조큐(長久) 간토쿠(寛徳) 에이쇼(永承) 덴기(天喜) 고헤이(康平) 지랴쿠(治暦) 엔큐(延久) 조호(承保) 조랴쿠(承暦) 에이호(永保) 오토쿠(応徳) 간지(寛治) 가호(嘉保) 에이초(永長) 조토쿠(承徳) 고와(康和) 조지(長治) 가쇼(嘉承) 덴닌(天仁) 덴에이(天永) 에이큐(永久) 겐에이(元永) 호안(保安) 덴지(天治) 다이지(大治) 덴쇼(天承) 조쇼(長承) 호엔(保延) 에이지(永治) 고지(康治) 덴요(天養) 규안(久安) 닌페이(仁平) 규주(久寿) 호겐(保元) 헤이지(平治) 에이랴쿠(永暦) 오호(応保) 조칸(長寛) 에이만(永万) 닌난(仁安) 가오(嘉応) 조안(承安) 안겐(安元) 지쇼(治承) 요와(養和) 주에이(寿永) 겐랴쿠(元暦)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
시대]]

겐랴쿠(元暦) 분지(文治) 겐큐(建久) 쇼지(正治) 겐닌(建仁) 겐큐(元久) 겐에이(建永) 조겐(承元) 겐랴쿠(建暦) 겐포(建保) 조큐(承久) 조오(貞応) 겐닌(元仁) 가로쿠(嘉禄) 안테이(安貞) 간키(寛喜) 조에이(貞永) 덴푸쿠(天福) 분랴쿠(文暦) 가테이(嘉禎) 랴쿠닌(暦仁) 엔오(延応) 닌지(仁治) 간겐(寛元) 호지(宝治) 겐초(建長) 고겐(康元) 쇼카(正嘉) 쇼겐(正元) 분오(文応) 고초(弘長) 분에이(文永) 겐지(建治) 고안(弘安) 쇼오(正応) 에이닌(永仁) 쇼안(正安) 겐겐(乾元) 가겐(嘉元) 도쿠지(徳治) 엔쿄(延慶) 오초(応長) 쇼와(正和) 분포(文保) 겐오(元応) 겐코(元亨) 쇼추(正中) 가랴쿠(嘉暦) 겐토쿠(元徳)

남조

겐코(元弘)

북조

겐토쿠(元徳) 쇼쿄(正慶)

겐코(元弘)
쇼쿄(正慶)
겐코(元弘) 겐무(建武)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시대]]


남조

엔겐(延元) 고코쿠(興国) 쇼헤이(正平) 겐토쿠(建徳) 분추(文中) 덴주(天授) 고와(弘和) 겐추(元中)

북조

겐무(建武) 랴쿠오(暦応) 고에이(康永) 조와(貞和) 간노(観応) 분나(文和) 엔분(延文) 고안(康安) 조지(貞治) 오안(応安) 에이와(永和) 고랴쿠(康暦) 에이토쿠(永徳) 시토쿠(至徳) 가케이(嘉慶) 고오(康応) 메이토쿠(明徳)
메이토쿠(明徳) 오에이(応永) 쇼초(正長) 에이쿄(永享) 가키쓰(嘉吉) 분안(文安) 호토쿠(宝徳) 교토쿠(享徳) 고쇼(康正) 조로쿠(長禄) 간쇼(寛正) 분쇼(文正) 오닌(応仁)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

오닌(応仁) 분메이(文明) 조쿄(長享) 엔토쿠(延徳) 메이오(明応) 분키(文亀) 에이쇼(永正) 다이에이(大永) 교로쿠(享禄) 덴분(天文) 고지(弘治) 에이로쿠(永禄) 겐키(元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겐키(元亀) 덴쇼(天正) 분로쿠(文禄) 게이초(慶長)

게이초(慶長) 겐나(元和) 간에이(寛永) 쇼호(正保) 게이안(慶安) 조오(承応) 메이레키(明暦) 만지(万治) 간분(寛文) 엔호(延宝) 덴나(天和) 조쿄(貞享) 겐로쿠(元禄) 호에이(宝永) 쇼토쿠(正徳) 교호(享保) 겐분(元文) 간포(寛保) 엔쿄(延享) 간엔(寛延) 호레키(宝暦) 메이와(明和) 안에이(安永) 덴메이(天明) 간세이(寛政) 교와(享和) 분카(文化) 분세이(文政) 덴포(天保) 고카(弘化) 가에이(嘉永) 안세이(安政) 만엔(万延) 분큐(文久) 겐지(元治) 게이오(慶応)

일세일원제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헤이세이(平成) 레이와(令和)





일본어
(たい (ほう
율리우스력
701년 5월 3일 ~ 704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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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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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다음
게이운

1. 개요
2. 특징
3. 출전(出典)
4. 주요 사건




1. 개요[편집]


일본의 네 번째 연호. 시기는 율리우스력 기준 701년~704년. 정자로는 大寶라고 쓰며, いほう로도 읽을 수 있다.

슈초 사용 종료 이후 연호 사용이 중단된 지 15년 만인 701년 5월 3일(율리우스력)에 개원하였으며, 이 때 이후로 일본의 연호 사용은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개원의 계기는 쓰시마섬(対馬嶋)에서 금(혹은 백은)이 헌상된 것이나, 797년에 쓰인 속일본기에서는 이 때 헌상된 금이 쓰시마산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704년 6월에 당시 수도였던 후지와라쿄(藤原京)에 서운(瑞雲)[1]이 나타난 것을 기념하여 연호를 다이호에서 게이운(慶雲)으로 바꿨다.


2. 특징[편집]


아스카 시대 후기로, 제42대 천황이였던 몬무 덴노가 다스린 시기. 다이호 율령이 시행된 시기로, 이로 인해 고대 일본은 중앙집권화가 촉진되고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율령제 국가로 들어섰다.


3. 출전(出典)[편집]


「天地之大德曰生、聖人之大寶曰位」

「천지의 큰 덕은 생(生)이요,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이니」

『易経』 「繋辞下」

역경』 「계사 하」


성인도 마땅한 지위가 없으면 그 말이 세상에 먹혀들지가 않는다는 뜻이다.


4. 주요 사건[편집]


이하는 전부 율리우스력을 사용한다.
  • 원년 (701)
    • (개원 전): 쓰시마섬(対馬嶋)에서 금이 헌상되었다.
    • 5월 3일: 다이호(大宝) 연호 개원. 관직명과 위호(位号)를 개정하고 관복을 정했다. 주나곤(中納言)이 폐지되었다.
    • 5월 12일: 단바노쿠니(丹波国)에서 지진이 3일 간 계속되었다.
    • 7월 12일: 천황의 경호를 담당하는 우도네리(内舎人)를 처음으로 임명했다.
    • 9월 9일: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반포 및 시행. 지방행정구획이 국평제(国評制)에서 국군리제(国郡里制)로 개편되었다.
    • 10월 2일: 다카야스성(高安城)[2]을 폐했다.
  • 2년 (702)
    • (일자 불명): 전국적으로 통일된 계량단위가 정해졌다.
    • 3월 3일: 다이호 율령이 전국에 공포되었다.
    • 5월 9일: 히다노쿠니(飛騨国)에서 신마(神馬)[3]가 헌상되었다. 히다노쿠니에 사면령이 내려지고 그 해의 조(租) 전액과 용(庸) 절반이 감면되었다. 개이득
    • 7월: 아와타노마히토(粟田真人), 야마노우에노오쿠라(山上憶良)가 견당사로 파견되었다.
    • 8월 28일: 사쓰마노쿠니(薩摩国)와 다네가시마(種子島)의 하야토를 정벌했다.
    • 11월 14일: 지토 태상천황이 미카와노쿠니(三河国)에 행차(行幸)했다.
  • 3년 (703)
    • (일자 불명): 하타노 히로타리(波多広足)가 견신라사로 파견되었다.
    • 1월 13일: 몬무 덴노의 후견(後見)으로 통치를 관장하던 지토 태상천황이 승하했다.
    • 2월 10일: 오사카베노 친왕(刑部親王)을 지태정관사(知太政官事)에 임명하여 후견 역할을 맡겼다.
  • 4년 (704)
    • (일자 불명): 703년에 파견된 견신라사가 귀환했다.
    • 1월 27일: 지토 태상천황의 대장(大葬)이 거행되었다.
    • 6월 16일: 후지와라쿄(藤原京)에 즈이운(瑞雲)이 나타난 것을 기념하여 연호를 게이운(慶雲)으로 바꾸었다.



[1] 불교에서 길조(吉兆)로 여겨지는 구름으로, 보랏빛을 띠거나 다섯 색으로 빛난다. 현대에는 사이운(彩雲; 채운)으로 불리며,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에 태양광선이 회절하면서 생겨나는 것으로 밝혀졌다.[2] 백강 전투 패배 후 667년에 수도 방어를 위해 지은 산성. 지금의 나라현오사카부 사이에 있는 다카야스산 정상 부근에 있었다.[3] 신사 제례 때 쓰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