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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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월북자.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890년 5월 3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가풍리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미국인 선교사 문약한(文約翰, Moore,J.W.)의 세례를 받았으며, 1919년, 3.1운동 때 참가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참가하였다.
예수북감리교 전도사로서 기독교측 대표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처해졌다.
이후 1921년, 한용운 등과 함께 가출옥(가석방)되었다. 그후 서울 감리회 중앙예배당을 중심으로 설교운동을 하고 1924년 ~ 1926년은 미국에서 생활하였다.
광복 후에는 좌익으로 방향을 틀어 좌익활동을 시작했다. 남쪽에서 기독교민주연합을 창당하여 활동하다가 어려움에 부딪치자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에 월북하여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6월, 홍남표 장의위원,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 1953년 4월, 김정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말년까지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관여하다가 1959년 5월 7일, 오후 2시 30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부고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사회주의 건설 사업을 위하여 계속하여 투쟁하여 왔다. (...) 고 김창준 동지가 전체 조선 인민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데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라고 추모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그곳에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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