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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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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의 장인 | 인경왕후의 부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김만기
金萬基


출생
1633년 3월 2일
(음력 인조 11년 1월 23일)
사망
1687년 4월 26일 (향년 54세)
(음력 숙종 13년 3월 15일)[1]
봉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시호
문충(文忠)
본관
광산 김씨

영숙(永叔)

서석(瑞石), 정관재(靜觀齋)
부모
부친 - 김익겸(金益兼, 1614 ~ 1637)
모친 - 해평 윤씨(1617 ~ 1689)[2]
형제자매
남동생 - 김만중
부인
서원부부인(西原府夫人) 청주 한씨(? ~ 1720)
자녀
슬하 4남 3녀
장남 - 김진구(金鎭龜, 1651 ~ 1704)
차남 - 김진규(金鎭圭, 1658 ~ 1716)
장녀 - 인경왕후
3남 - 김진서(金鎭瑞, 1663 ~ ?)
차녀 - 김한혜(金漢惠, 1668 ~ ?)
3녀 - 김복혜(金福惠, 1673 ~ ?)
4남 - 김진부(金鎭符, 1676 ~ ?)

1. 개요
2. 생애
3. 붕당
4. 사후
5. 저서
6.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조선 효종, 현종, 숙종문관이자 외척이다.


2. 생애[편집]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의 증손자이며, 조부는 허주 김반이므로[3] 김집의 종손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익겸으로 김만기는,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으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의 형이다. 숙부로 대사성, 대제학을 역임한 김익희와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김석주와 같이 남인을 숙청 공작을 실행했다가 기사환국 때 죽은 김익훈이 있다. 북헌 김춘택의 조부이기도 하다.[4]

숙종의 첫 번째 왕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로 광성부원군에 올랐고, 숙종의 외숙부이자 공작정치로 유명한 김석주하고도 친인척 관계를 형성했다.[5] 종조부 김집의 제자인 송시열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했다. 더불어, 모친은 윤두수의 고손녀이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붕당[편집]


골수 서인이었으며, 또한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당한 뒤에는 골수 노론이기도 했다. 또 민유중,[6] 김석주 등과 함께 삼척으로도 불렸다.

송시열의 문인이며, 기해예송갑인예송에서 송시열의 뜻을 따르면서 서인의 과격파로서 남인의 의견에 강하게 맞섰다. 그의 딸이 세자빈이 된 뒤에는 병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냈고 병조판서와 예조판서, 그리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숙종 즉위 이후 국구가 되면서 영돈녕부사로 임명되었고 훈련대장, 호위대장,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군권까지 쥐었다. 경신환국 때 서인으로서 김석주, 김익훈, 이사명 등과 더불어서 옥사를 일으켜서 남인들을 많이 숙청했다.


4. 사후[편집]


죽은 뒤 경기도 시흥군 대야미리(현 군포시 대야미동) 산 1-12번지에 안장되었다.

경모재(敬慕齋)에 제향되었고, 1719년(숙종 45)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비명과 신도비문은 1687년 스승인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김진규가 썼다. 그밖에 숙종이 직접 써 준 어필비문(御筆碑)이 1699년(숙종 25)에 묘소 근처에 세워졌다. 사후 증직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1992년 6월 5일 그의 묘소와 비석,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5. 저서[편집]


《서석문집》 18권


6.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 김장생(金長生)
  • 종조부 : 김집(金集)
    • 조부 : 김반(金槃)
      • 백부 : 김익희(金益熙)
      • 숙부 : 김익훈(金益勳)
      • 부 : 광원군(光原君) 김익겸(金益兼)
      • 모 : 해평 윤씨(海平 尹氏) - 윤지[8](尹墀)의 딸
        • 동생 : 서포 김만중(金萬重) - 구운몽의 저자
        • 제수 : 연안 이씨 - 이은상[7](李殷相)의 딸

  • 부인 : 서원부부인 청주 한씨(西原府夫人 淸州 韓氏) - 한유량(韓有良)의 딸
    • 장남 : 광은군(光恩君) 김진구(金鎭龜, 1651년 ∼ 1704년)
    • 며느리 : 이광직(李光溭)의 딸
      • 손자 : 김춘택(金春澤)
      • 손자 : 김보택(金普澤)
      • 손자 : 김운택(金雲澤)
      • 손자 : 김민택(金民澤)
      • 손자 : 김조택(金祖澤)
      • 손자 : 김복택(金福澤)
      • 손자 : 김정택(金廷澤)
      • 손자 : 김연택(金延澤)
    • 차남 : 김진규(金鎭圭, 1658년 ~ 1716년)
      • 손자 : 김성택(金星澤)
      • 손자 : 김양택(金陽澤)
    • 장녀 : 인경왕후 김씨 - 조선 제 19대 왕 숙종의 정비
    • 3남 : 김진서(金鎭瑞, 1663 ~ ?)
    • 차녀 : 김한혜(金漢惠, 1668 ~ ?) - 정형진(鄭滎振)에게 출가
    • 3녀 : 김복혜(金福惠, 1673 ~ ?) - 연안 이씨 이주신(李舟臣)에게 출가
      • 외손자 : 영의정 이천보
      • 외손녀 : 심사주[9](沈師周)에게 출가
    • 4남 : 김진부(金鎭符, 1676 ~ ?)
      • 손자 : 김연택(金延澤) - 생부 김진구

[1] 세는나이 55세.[2] 윤지(尹墀)의 딸로 정혜옹주의 손녀.[3] 잠곡 김육의 절친이다.[4] 첫째 아들 김진구의 아들이다.[5] 김석주는 조부 김반과 친했던 김육의 손자이기도 하다.[6] 송시열의 문인이자 숙종의 두 번째 장인이다.[7] 이단상의 종형[8] 정혜옹주의 장남[9] 숙명공주의 남편 심익현(沈益顯)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