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김경원(야구)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전 한국프로야구 OB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의 우완 정통파 투수.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1989년 동대문상고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팀에 청룡기 우승을 안겼다. 1990년 1차 2순위로 지명받은 이후 중앙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였다.
2.2. 프로 경력[편집]
1991년 말 중앙대 중퇴 후 지명권을 갖고 있던 OB 베어스에 입단하려고 했으나, 당시 KBO 규약 상 학교 자퇴생의 경우 자퇴한 시점으로부터 1년 간 프로팀에 입단할 수 없다는 규정으로 인해 1년간 개인훈련을 하며 쉬었고, 1993년 당시 구단 역대 최고대우(계약금 1억원, 연봉 1,200만 원)에 OB 베어스에 입단했다.
고교 시절부터 특급 투수로 명성을 날렸으며, 중앙대 시절에는 박찬호보다 먼저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할 정도로 주목받던 선수였다. 1993년 데뷔 시즌 초에는 선발 투수로 몇 게임에 등판했으나 곧바로 마무리로 전환, 그 해 129⅔이닝을 던지면서 9승 3패 23세이브(32세이브포인트) 평균자책점 1.11의 성적으로 구원부문 2위에 오르는[2] 대활약을 펼쳤다. 말이 2위지, 선동열도 그렇고 공헌도로 따지면 오승환은 거뜬히 능가한다.[3] 6회 이후 항시 대기하면서 선발진의 뒤를 사실상 홀로 받쳐 주었다.. 김경원의 눈부시지만 눈물겨운 투구로 인해 OB는 오랜시간의 암흑기를 청산하고 3위에 오른다.
이 해 그가 올린 1.11의 평균자책점은 역대 단일시즌 평균자책점 가운데 선동열의 0점대 평균자책점 3회(1986,1987,1993년) 다음인 역대 4위의 기록이며, 선동열의 통산 평균자책점(1.20)을 능가하는 유일한 기록이다.[4]
데뷔 시즌에는 150km에 육박하는 묵직한 강속구로 이닝당 1개 가까운 삼진을 잡아내는 파워 피처였으나 첫 해의 무리한 연투와 함께 1994 시즌 초반에 찾아온 부상으로[6] 불운이 드리워졌고, 1995년 6승 15세이브 ERA 2.93, 1997년 3승 24세이브 ERA 1.96을 거두며 마무리 투수로 활동했지만, 다시는 데뷔 시즌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1998년 이후부턴 마무리 자리마저 후배인 진필중에게 넘겨준 뒤 입지가 좁아졌고 1999년 시즌 중 전상렬과 홍원기를 상대로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지만 큰 활약 없이 2001년 시즌 후 31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비록 전성기는 극도로 짧았으나 1993년 단일 시즌에서 보여준 능력만큼은 역대 구원 투수 가운데서도 손꼽힐 수준이며, 침체에 빠져 있던 OB를 암흑기로부터 구출한 1등 공신으로 기억해야 할 투수.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안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TJB 해설위원을 거쳐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경찰 야구단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이재곤, 손승락 등이 경찰청을 거쳐 간 투수이다. 잘 던지는 투수들은 병역 면제로 군대를 안 가고 그보다 덜 하는 투수들이 입단하여 북부리그 평균자책점 하위권이라는 아쉬움을 지인에게 나타낸 적이 있다.
2012년 친정팀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지난 1999년 이후 13년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보직은 2군 투수코치. 2012년 한 해동안 2군 투수코치로 있다가, 시즌 후 두산의 전력분석관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2016년부터 다시 경찰 야구단 투수코치를 맡았다.
이후에는 정수근이 운영하는 '정수근의 야구놀이터'에서 투수코칭을 하고 있다. 2019년 초에 노이즈 멤버였던 한상일이 운영하는 유튜브채널에 출연해, 한상일의 투구를 교정하며 커브까지 가르쳐줬다.
4. 여담[편집]
- 잘 알려지지 않은 기록으로, KBO 리그 출범 후 최초로 공 1개만 던지고 패전투수가 되었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1996년 5월 3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3-3 동점 상황이던 9회 말 등판했으나 LG 선두타자 김재현에게 초구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 허용투수 중 한명이기도 하다. 한화 시절이었던 2000년 5월 19일 대전 한밭 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6회초에 구원 등판해 박경완에게 4연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헌납한 것.
- 짧았던 선수 생활에 비해 우승 복은 나름 있던 선수였는데, OB 시절인 1995년 한국시리즈와 한화 시절인 1999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각각 든 덕에 각자 다른 2개의 팀에서 우승 반지를 모두 껴보고 은퇴했다.
- 슬하에 딸 1명을 두고 있는데, 아빠인 김경원이 야구선수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가 우연히 김경원의 집에 방문한 이웃 주민이 집안에 걸려 있던 김경원의 사진을 보고 싸인을 받아 달라고 부탁한 일화를 밝히며 그제서야 딸아이가 아빠가 한때 유명한 야구선수 출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6. 관련 문서[편집]
[1] 1990학번, 재학중 2년만에 중퇴[2] 1위는 그 해 마무리로 전환하며 0.78의 시즌 평균자책점 최고 기록을 세운 선동열이다.[3] 마무리가 규정 이닝을 채웠으니..[4] 아마 많은 야구인들이 아는 마구마구에서 엘리트 카드를 줘도 인정할 정도이다. 결국 2016년 2월 29일에 엘리트가 추가되었다.[5] 조정 평균자책점이란 리그평균 평균자책점을 참고하여 해당 선수와 비교해 얼마나 잘했는가를 나타내는 수치다. 리그 평균을 100으로 잡으며 만약 조정 평균자책점이 200이라면 그 투수는 그 해 리그 평균보다 2배나 잘했다는 소리. 김경원이 기록한 295라는 수치는 그해 리그 평균 투수들보다 3배 잘했다는 소리. 참고로 역대 조정 평균자책점 TOP 1위~6위는 모두 선동열이 기록하고 있는데 1위는 93년 선동렬이 기록한 ERA+ 419[6] 시즌 시작 직전 홧김에 주먹으로 유리창을 내려치는 바람에 깨진 유리파편에 의해 부상을 입었고, 복귀 후에도 태평양과의 경기 도중 타자 주자와 부딪혀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시즌을 공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