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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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금나라 때의 도사. 자는 통밀(通密)이고 도호는 장춘자(長春子)로 전진칠자 중 한 사람이자 전진교 제 5대 조사이다.
2. 생애[편집]
등주 서하(棲霞) 사람으로 10대 때 도교에 푹 빠져서 장생불사의 이야기가 아니면 입에 담지 않았고 결국 19세(1166년) 때 출가했다. 이듬해 왕중양이 영해(寧海)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왕중양은 구처기에게 시 한 수를 지어주며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細密金鱗戲碧流
금비늘이 촘촘한 물고기 푸른 물가를 노닐다가
能尋香餌會呑鉤
좋은 미끼를 찾아서 낚시바늘을 삼키네.
被予緩緩收綸線
내 천천히 낚시줄로 잡아당겨서
拽人蓬萊永自由
봉래산으로 끌어올려 영원토록 자유롭게 하리.
『금련정종기』[2]
「장춘구진인」
이렇게 왕중양의 제자가 된 구처기는 다른 사형제들과 함께 스승을 따라다니며 공부하였다. 1170년 왕중양은 개봉에서 임종하였는데, 이때 공부가 아직 부족한 구처기를 제자 마옥에게 맡기며 잘 이끌어줄 것을 명했고[3] 구처기에게는 훗날 비상한 지위에 올라 전진교의 교세를 크게 넓힐 것이라 예언하였다고 전해진다.
3년간 스승의 장례를 치른 후, 구처기는 사형들과 헤어져 섬서성의 보계에 머물며 10년 넘게 수련하였다. 1174년부터 1180년까지의 처음 7년 동안은 보계의 반계(磻溪)[4] 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매일 한 끼의 밥을 먹고 도롱이 한 벌로 사계절을 보냈기에 사의선생(蓑衣先生)이라 불리웠다. 그 후에는 인근의 용문산(龍門山)으로 거처를 옮겨서 1186년까지 다시 7년간 수도했는데, 이 시기에 그의 명성이 높아져서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것이 훗날 구처기를 따르는 이들을 용문파(龍門派)라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186년 겨울 협곡청신(夾谷淸臣)의 청을 받고 용문산을 내려와 스승이 수련했던 종남산에 머물렀다.
1188년 금나라 세종의 초청을 받고 연경에서 만춘절의 재초(齋醮)를 주재하는 한편 세종과 세 차례에 걸쳐 도에 대해 문답하였고, 여동빈과 스승 왕중양, 사형 마옥 세 사람의 상을 세웠다. 같은 해 8월 세종이 내리는 십만 전을 사양하고 다시 종남산으로 돌아갔다. 1190년에 장종(章宗)이 혹세무민을 이유로 불교와 도교의 금지령을 내리자 다음해 음력 10월 고향인 등주 서하로 돌아가 임궁(琳宮)[5] 을 짓고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재초행사를 지내며 전진교를 전도했다.
1203년 사형인 유처현이 세상을 떠나자 구처기는 전진교의 5대 장문인이 되었고, 산동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펼치면서 왕중양의 내단사상을 더욱 체계화하였다.[6] 1214년 가을 산동에서 양안아[7] 가 일으킨 군사들을 투항시키는데 성공하여 금나라 조정으로부터 자연응화홍교대사(自然應化弘敎大師)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이후에는 금나라와 남송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은 채[8] 내주(萊州)의 호천관(昊天觀)에 머물렀다.
그리고 1219년 5월, 서정을 하던 몽골의 칭기즈 칸이 구처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청하는 조서를 내렸다.
하늘은 중원의 극에 달한 교만함과 화려함을 싫어하지만, 짐은 북쪽의 초원에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을 좋아함에도 오히려 질박하게 지내고,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따라서 먹는 밥과 입는 옷도 목동이나 마부들과 같은 것으로 하고 있소. 짐은 백성들을 내 아이들처럼 바라보고, 재사들을 내 형제들처럼 양성하고 있으며, 생각하는 것도 항상 온화하게 하고 백성들을 은혜로 아끼고 있소. 또한 여러 사람들을 나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고, 수 많은 전쟁에서는 짐 자신을 생각하지도 않았소. 그리하여 7년 후에는 대업을 이루어 천하(六合) 안에 있는 것을 일통할 수 있었소.
짐은 덕이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금나라의 정치가 기울어져 있었기에 하늘의 도움을 받아 지존의 자리를 이을 수 있었소. 남쪽으로는 송나라와 이어있고, 북쪽으로는 회흘과 접해 있으며, 동쪽에는 서하, 서쪽에는 이적들이 있는데, 다들 나에게 칭신하고 있소. 내 생각으로는 우리 선우국[9]
이 그간의 1000년, 아니 3000년 동안 이와 같은 땅을 가진 적이 없다고 보이는구려. 그러나 맡은 일이 크고 수성하는 일이 무거워서 나라를 다스림에 흠결이 있을까 두렵소. 그래서 장차 배를 만들고 강을 건너 현능한 이들을 초청하고 그들을 인선하여 천하를 평안케 하려 하오.짐이 임금의 자리를 이은 이래 여러 정사들에 마음을 쓰고 있으나, 삼공구경의 자리에 오를만한 사람들은 아직 보질 못했소. 듣자하니 선생께서는 몸소 참된 예의와 법규를 실천하시고, 만물에 박학다식하시어 그 깊은 이치를 궁구하시며, 크나큰 도와 덕을 알리시면서 옛 사람의 엄숙한 풍모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고아한 지조를 품고 계시고, 오래도록 산에 머무르고 스스로를 숨기시며 조사의 유풍을 밝히셔서, 가만히 계셔도 도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신선의 길을 쫓아 선생이 계신 곳에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들었소.
존경하는 선생께오서는 전쟁이 끝난 후부터 산동의 옛 경내에 더욱 숨어살고 계시지만, 짐은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그친 적이 없었소. 선생께서 지난 날 문왕이 위수에서 태공망을 만나 그와 수레를 함께한 일과 유비가 제갈량을 맞이하기 위해 그의 띠풀집을 세 번 방문한 일을 어찌 모르시겠소만, (선생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산천이 대단히 크고 넓어서 내가 선생을 맞이하지 못하는 실례를 범하게 하고 말았소.
다만 짐이 (국사가 많아) 임금의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는 몸이기에, (직접 찾아가지는 못하는 대신) 목욕재계하고 근시(近侍)인 유중록(劉仲祿)을 선발하여 날랜 기병들과 수레를 갖추어 천리도 멀다 않고 삼가 선생을 맞이하고 싶소. 선생의 신선같은 발걸음으로는 사막도 멀다 여기지 않을 터이니, 만약 백성들과 당금의 일들을 걱정해주시고 보신의 술(保身之術: 도교의 양생술)로 짐을 구휼하러 와주신다면 친히 신선의 자리를 마련하여 기다리고 있겠소. 존경하는 선생의 기침소리라도 좋으니 다만 한 마디 말씀일지라도 다 받아들이겠소. 부족하나마 짐의 이 미미한 뜻의 만분지 일을 이 조서에 밝혀서 보내오.
존경하는 선생께서는 이미 깊은 도의 경지에 이르시어 선함이 필요하다면 응하지 않는 곳이 없으실 것이오. 그러니 어찌 중생의 조그만 소원도 거절하시겠소! 그런 까닭에 짐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이 조서에 적어서 보이는 바이오.[10]
기묘년 5월 1일.
그 해 12월에 이 초청장을 받은 구처기는 이듬해인 1220년 정월 칭기즈 칸을 만나기 위해 조도견[12] , 이지상, 윤지평 등의 제자 18명[13] 을 거느리고 내주를 떠났다. 그리고 연경에서 거용관을 거쳐 막북과 천산산맥을 지나 1222년 4월 대설산의 파르완(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칭기즈 칸과 조우하였다. 그리고 약 1년간 칭기즈 칸의 곁에 머물렀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일화들을 남겼다.
- 칭기즈 칸에게 천하를 하나로 만들려면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해선 안 된다고 진언하였다.[14] 이에 칭기즈 칸이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묻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답했다.
- 칭기즈 칸이 오래 살아서 장구히 살 수 있는 도의 비법을 묻자, 구처기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 요점이라고 답했다.[15] 칭기즈 칸은 (좀 실망하긴 했지만) 그 솔직함을 높게 사서 호부(虎符)와 새서(璽書)를 하사하였고, 구처기를 신선이란 의미에서 텡그리 뭉케 훈이라 부르며 공경하였다.
- 어느날 뇌성벽력이 진동하자 칭기즈 칸이 이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구처기는 번개는 하늘의 위엄이라 답하면서, "사람의 죄는 불효가 가장 큰데 이는 하늘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므로 하늘이 진동하여 그 위엄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경내에 불효자가 많으니 폐하께서는 마땅히 하늘의 위엄을 밝혀서 사람들을 이끄소서"라 하였다.
- 1223년에 칭기즈 칸이 크게 사냥을 벌이다가 말에 떨어졌다. "하늘의 도는 생명을 좋아하는 것인데, 폐하께선 연로하신데도 자주 사냥을 여시니 이는 옳지 않습니다"라고 간언하였다. 이에 칭기즈 칸이 몇 달 동안 사냥을 그쳤다.
1223년 봄, 구처기는 칭기즈 칸과 작별하여 그해 가을에 하북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구처기에게 자신의 곁에서 여러 조언을 해주었던 보답으로 전진교에 대한 면세특권을 주었다. 이때 있었던 일들을 훗날 구처기의 제자 이지상이 엮어서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16] 를 지었으며, 야율초재도 칭기즈 칸의 명을 받아 이때의 만남을 기록하여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17] 이란 책으로 남겼다.[18]
돌아온 후에는 연경의 천장관(天長觀)을 주재하면서 '연경팔회(燕京八會)'라 불리우는 도교 모임[19] 을 만들어 전진교의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고, 칭기즈 칸으로부터 받은 첩지를 활용해 전쟁으로 떠도는 난민 2~3만명을 구호하였다.[20] 이와 같은 정치적인 수완은 원나라 때 전진교를 융성하게 만들었고, 그중에서도 그가 이끌던 용문파의 발전이 가장 빨랐다고 한다.[21]
1225년 형혹성이 28수 중 하나인 미수(尾宿)[22] 를 범하자 재초를 지냈고, 1226년과 이듬해인 1227년에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청에 응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비가 내렸다고 한다. 1227년 5월에는 칭기즈 칸이 구처기에게 금호패(金虎牌)를 내려 천하의 도교를 총괄하도록 했고, 그가 머물던 천장관의 이름을 장춘궁(長春宮)[23] 으로 고치게 했으며, 북궁의 만세산 태액지를 만안궁(萬安宮)이라 개칭하여 그에게 하사했다.
금호패를 받고 한 달이 지난 1227년 6월 하순에 구처기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6월에 구처기가 동계(東溪)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그로부터 이틀 후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동반한 큰 비가 내려 태액지(太液池) 북쪽의 물이 동호(東湖)로 흘러넘쳤다. 그 소리는 몇 리 떨어진 곳에서도 들렸으며, 연못 안에 있던 고기와 자라들도 모두 사라지고 마침내 연못이 말라버렸다. 그리고 북구(北口)의 높은 언덕도 무너졌다.
이에 구처기가 탄식하면서 "산이 무너졌구나! 연못도 말라버렸구나! 나 또한 이들과 함께 하겠구나!"라 하였다.[24]
6월 21일, (구처기는) 병으로 인해 (밖으로) 나가지 않고 궁의 동계에서 목욕하였다. 23일 오후에 큰 우레소리가 나더니 태액지의 남쪽 언덕이 무너져 물이 동호(東湖)로 흘러갔다. 우레소리는 수십 리 떨어진 곳까지 들렸는데, (태액지에 살고 있던) 자라와 악어며 물고기 등이 모두 가버렸고 끝내는 (연못이) 말라버렸으며, 북구(北口)의 산도 무너졌다.
스승께서 이를 들으시고 처음엔 아무 말도 없으셨다가 오래도록 웃으며 "산이 무너지고 연못도 말랐으니, 나도 저들과 함께 할 것인가?"라고 말씀하셨다.[25]
『장춘진인서유기』
얼마 후인 7월 4일에는 제자들을 불러모아 마옥의 말을 회고하며 자신의 임종이 머지 않았음을 제자들에게 암시하였다.
일찍이 단양께서 나에게 글을 남기셨다. 거기에는 "내가 죽은 후 우리 전진교의 교세가 크게 흥하여 사방 가는 곳마다 도교의 본향이 될 것이다. 그대가 그 때를 만나면 도교 사원들은 모두 칙명으로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고, 또한 (그대는) 큰 궁궐과 도관의 주지가 될 것이며, 사신이 패부를 내려 교단의 일을 담당토록 할 것이다. 이때가 공업과 명성을 이루고 돌아가 쉴 때이다" 라 적혀있었다.
단양의 말씀이 하나같이 증험을 보아 부절이 들어맞는 듯 하였다. 하물며 교단 안팎에는 일을 맡을 사람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나는 돌아가도 여한이 없다.[26]
『장춘진인서유기』
그로부터 닷새 후인 7월 9일 오후, 구처기는 장춘궁의 보현당(寶玄堂)에 올라 시 한 수를 지어 이를 유언으로 남겼다.일찍이 단양께서 나에게 글을 남기셨다. 거기에는 "내가 죽은 후 우리 전진교의 교세가 크게 흥하여 사방 곳곳마다 도교의 본향이 될 것이다. 그대가 그 때를 만나면 큰 궁전과 도관의 주지가 되고, (그곳들은) 모두 칙명으로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을 것이며, 사신이 패부를 내릴 것이다. 이 때가 공업과 명성을 이루고 돌아가 쉴 때이다" 라 적혀있었다.
단양의 말씀이 하나같이 모두 증험되었으니, 나는 돌아가도 여한이 없다.[27]
『금련정종기』 「장춘구진인」
生死朝昏事一般
죽고 사는 일은 아침이 저녁 되는 것과 같고
幻泡出沒水常閒
허깨비 같은 물거품이 일어난들 물은 항상 그대로라네.
微光見處跳烏兎
玄量開時納海山
현량(玄量)을 열면 바다와 산도 받아들였지.
揮斥八紘如咫尺
온 누리를 지척처럼 자유로이 휘저었고
吹噓萬有似機關
만물을 마치 기계처럼 뿜어내었네.
狂詞落筆成塵垢
경솔한 말과 글로 허물을 이루고
寄在時人妄聽間
당대의 사람들에게 빌붙어 헛된 이름만 들리게 했네.
『장춘진인서유기』
이 시를 짓고 구처기는 보현당에서 보광당(葆光堂)으로 돌아온 후에 세상을 떠났다.[28] 칭기즈 칸이 사망하기 약 한 달 전이었다.
이듬해 3월 제자 윤지평이 구처기를 위해 백운관 내에 전각을 지을 것을 건의하였고 스승의 기일인 7월 9일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7월 초에 구처기의 관을 열었는데 시신이 썩지 않고 그 모습이 생전과 같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새로 지은 전각에 스승을 장사지내고 그곳을 처순당(處順堂)[29] 이라 명명하였다.[30][31] 이후 쿠빌라이 칸 때인 지원 6년(1269)에 장춘연도주교진인(長春演道主敎眞人)으로, 원 무종 지대 3년(1310)에 장춘전덕신화명응진군(長春全德神化明應眞君)에 봉해졌다.
3. 여담[편집]
- 크고 넓은 눈썹을 지녔다고 한다.[32]
- 금나라 세종 대정 6년(1166)에 출가하여 대정 7년(1167)에 왕중양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점은 기록들이 대체로 일치하나, 어디서 왕중양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나의 설은 영해의 곤유산(昆崳山) 연하동(煙霞洞)에서 왕중양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36] 는 것이고, 다른 설에서는 그가 출가하여 곤유산에 은거하다 왕중양이 영해의 전진암(全眞庵)에서 가르침을 펼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서 제자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37] 이외에 『원사』 「석노전」에서는 "19세에 영해의 곤유산에서 전진의 학문을 배우다"라고 되어 있고, 『장춘진인서유기』에서는 "미성년일 때 출가하여 중양진인을 사사했다"라고만 기록하였다.
- 스승 왕중양의 사후 사형제들과 수련의 요점에 대해 논할 때 구처기는 이를 '투한(鬪閑, 게으름과 싸우는 것)'이라고 보았다.[38]
4. 창작물에서[편집]
4.1. 사조영웅전[편집]
왕중양의 제자로 전진칠자의 한 사람이다. 사조영웅전 모든 사건의 발단을 이루는 인물. 실존 인물은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 조정에도 초청받아 갔던 중립을 지킨 도인이었는데, 이 소설에선 송나라에 대한 불타는 충정심으로 금나라 관병만 보면 마구 쳐죽이는 과격한 열혈 투사가 되었다(...). 무예만이 아니라 의술에도 뛰어나고, 시에도 조예가 깊다. 의협심이 강하지만 성격이 무척 급하고 고집이 강해서 작중 온갖 트러블을 일으켰다. 곽소천이건 양철심이건[40] , 강남칠괴[41] 건 일단 만나기만 하면 한번 싸우고 본다. 도사인데도 성질이 정말 더럽다. 오죽하면 사형인 마옥도 몽고에서 강남칠괴와 만났을 때 "도사인데도 성격이 불같고 내기를 좋아하니 이는 도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못마땅해한다.[42] 도가사상의 종통을 이어받은 매우 이름 높은 도사로서의 면모와는 아주 다른 협객이 되어 있다.
무공은 칠자 중 가장 높다고 하며 천하오절이나 사숙 주백통, 구천인 같은 대고수급을 제외한다면 사조영웅전의 2티어급 고수들 중에서는 최강 반열에 들어 있다.[43] 강남칠괴 전부와 사투를 벌여 맞먹을 정도로 단신의 공력이 고강하며[44] , 금나라 조왕부(양강의 양아버지 완안열)에 초빙된 고수들인 사통천, 팽련호, 구양극(구양공자) 등보다도 한 수 위다.[45]
금나라와 결탁한 간신 왕도건(王道乾)을 10일 넘게 추격하여 목을 베고 내장을 들어내서 살해한 다음, 눈길을 걸어 돌아오다가 곽소천과 양철심의 요청으로 이들의 집에 들어오게 된다. 이 때 두사람을 끄나풀로 오해하여[46] 기선제압을 한답시고 양철심의 비수를 빼앗아 왕도건의 염통과 간을 토막내어 술과 함께 먹어치웠다. 이 엽기적인 광경에 경악한 곽소천과 양철심은 구처기를 흉악한 살인자로 여기고, 구처기도 이에 질세라 두 사람에게 금나라의 끄나풀이냐며 덤벼들어서 한바탕 싸우다가 양철심이 양가창법을 쓰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오해를 풀고 금나라의 완안열과 그 병사들이 쫓아오자 이들을 단신으로 물리친다. 송나라 황제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정강의 변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두 사람의 아들에게 곽정(靖)과 양강(康)이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도망친다는 사람이 저 소동을 벌였으니 그대로 지나갈 리가 있나. 결국 그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 완안열[47] 과 단천덕이 꾸민 음모로 곽소천이 살해되고 양철심은 실종되자, 단천덕의 진영에 나타나 그를 추궁하려 하지만 단천덕이 교활한 속임수를 부린 탓에 단천덕의 삼촌인 고목대사, 그리고 그 사제인 초목대사와 실랑이가 벌어지고 초목대사의 친구인 강남칠괴와도 싸움이 붙게 되었다. 사실 이야기만 잘 했어도 잘 풀릴 문제였지만, 구처기가 워낙 과격하게 나가고 강남칠괴도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 서로 오해를 풀지 못하고 말다툼을 하다가 실력 대결로 나서게 된다. 취선루(醉仙樓)에서의 술 대결에서 승부가 나지 않자 법화사로 가서 무공을 대결하다가 양쪽 다 부상을 심하게 입고, 단천덕이 곽철심의 아내인 이평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자신들이 모두 속았음을 알고 분노한 초목대사가 단천덕을 죽이려다가 목숨을 잃는 것을 보게 된다. 그제서야 자신이 또 성질을 못죽인 탓에 일이 커진 것을 깨닫고 후회하면서 사과하지만 강남칠괴가 그 사과를 들어줄리 만무. 가진악은 "너님 덕분에 우리 체면이 뚝 떨어졌으니 이제 촌에 가서 밭이나 갈고 살겠음. 너님께서 아득바득 쫓아오지 않으시면 남은 여생은 그나마 편히 지낼 수 있을 듯."하고 쏘아 붙이기까지 한다. 구처기는 자존심이 강한 강남칠괴의 고집을 꺾고, 곽소천과 양철심의 후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각자 이평과 포석약을 찾아 그 아이들을 제자로 길러 18년 후에 제자들 간에 무공승부를 내기로 약속한다.
구처기는 포석약의 행방을 찾다가 우연히 우가촌에서 금나라 병사들이 양철심의 집에서 세간들을 옮기는 것을 보고[48] 추적하여 중도까지 와서 포석약이 완안열의 왕비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그녀가 정절을 버렸다고 생각해서 처단하려 하였지만 밤마다 그녀가 양철심의 유품을 안고 전남편 생각에 통곡하는 것을 보자 측은지심을 느끼고 그녀의 아들인 양강(완안강)을 제자로 받는다. 하지만 양강은 이미 오냐오냐 곱게 자라서 심성이 비뚤어져 있었고, 구처기가 바로잡아보려고 해도 양강이 말빨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갔다. 하여 인성교육은 뒤로 미루고 일단 강남칠괴와의 내기부터 끝내려 한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양철심과 포석약이 재회하게 되고, 포석약을 데리고 도망치던 양철심을 마주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완안열 휘하의 고수들과도 서슴없이 싸웠다. 그리고 왕처일을 도와주고 있던 곽정과 강남칠괴와 재회하자 무공 이전에 자신의 제자인 양강의 인품이 곽정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고 시인하고, 18년 전의 약속에 대해서 패배를 인정한다.
양강이 임안부 우가촌에서 구양극을 살해하고 툴루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때 윤지평에게 황약사의 얘기를 들은 나머지 전진칠자와 함께 나타나서 양강의 불의함을 추궁했지만, 양강이 반성하는 척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훈계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해서 놓아준다. 이후에 매초풍이 나타나자 처음엔 마옥과 매초풍이 서로 별고없이 잘 지내셨냐고 평화롭게 얘기를 시작하는데 대뜸 "요부야, 사부에게 전진칠자 맛 좀 보여줄테니 빨리 데려와라."라는 식으로 던져서 또 싸움을 시작했다. 이건 뭐...
이후 황약사가 나타나자 취선루에서 곽정에게 강남칠괴가 황약사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었고, 원래 주백통과 담처단이 황약사에게 죽었다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전진칠자 및 가진악과 힘을 합쳐 황약사와 싸운다. 그리고 곽정에게 진실을 알고 마침 구양봉이 나타나자 그와 싸우다가 홍칠공의 제지로 멈추었다.
곽정의 소개로 칭기즈 칸에게 불려가 도교의 교리를 설법하며 무익한 전쟁을 자제하라며 권유했다. 이 때는 몽골이 송나라와 동맹 관계였기도 하고, 구처기로서는 전쟁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만남이 이루어진 것. 본인 성격도 어지간히 개차반이고 사람 쳐죽이는 것도 꺼리지 않으면서 전쟁의 무익함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우습다는 의견도 있다(...). 칭기즈 칸은 구처기가 불로불사의 양생법을 전수해 주는 것도 아니고 전쟁 좀 그만하라는 충고나 하자 실망했는지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구하지는 않고 융숭한 대접만 했다.
몽골에서 도망쳐온 곽정과 만나 화산으로 향한다. 화산에서 팽련호, 사통천, 후통해, 영지상인등과 싸우다가 주백통의 도움으로 네 악당을 제압하고 전진교로 끌고가 20년간 감금했다.
작중 초기에는 최상위권의 무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서 급락하고 말았다. 강남칠괴 모두와도 싸우는 등 실력은 있으나 사실 강남칠괴는 의협심으로 유명한거지 무공은 그다지... 그래도 천하오절 다음가는 정도의 능력은 있는 듯하다. 전진칠자 중 5명이 황약사한테 뺨을 맞으며 일방적으로 능욕당할 때 유일하게 반격을 날려 성공시키기도 했다. 물론 버금가거나 하지는 않는다. 천하오절이나 주백통, 구천인정도만 되어도 강남칠괴는 눈에도 안 차는 수준이니 뭐... 게다가 계속 같이 비교되는 팽련호, 사통천, 후통해, 영지상인은 중간 보스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4.2. 신조협려[편집]
역사적으로는 칭기즈 칸보다 한 달 전에 사망하기 때문에 사실을 따지자면 사조영웅전의 끝 부분까지만 등장이 가능하나, 신조협려에서는 소설적 허구에 따라 등장하고 있다. 노환으로 초반부에 사망한 마옥의 뒤를 이어 장교의 지위를 맡는다.
곽정이 양과를 데려오자, 양과의 아버지인 양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에 그가 악인이 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구처기는 양과를 제대로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배분 따지느라(제자의 아들이다.) 직접 가르치지 않고 하필 조지경에게 맡긴 탓에 양과가 학대를 받다가 도망쳐서 고묘파에 입문해버리는 낭패를 보게 된다. 하다못해 윤지평에게 맡겼다면 양과는 특유의 재능과 뛰어난 머리로 전진교의 고수로 성장하고 윤지평도 견지병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사람보는 눈이 정말 없다. 원본 장춘진인의 정치적 수완은 다 어디에 팔아버리고 이렇게 됐을지 좀 의문이 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자 복이 정말 없다. 한명은 패륜아, 한명은 강간범...[49] 물론 이지상이나 왕지탄처럼 의로운 제자도 있긴 했지만 이 둘은 비중이 낮다.
나중에 다른 전진칠자와 함께 칠성취회를 완성한다. 다만 그 완성했다는 칠성취회가 일곱명이서 금륜법왕과 동수를 취했는데 쌍수호박을 배워온 소용녀가 혼자서 쌍검합벽으로 금륜법왕과 동수를 이루는 걸 보고는 좌절했다. 16년 후에는 노환으로 쓰러져서 활동이 없게 된다. 이 양반의 사숙되시는 주백통은 회춘하고 황약사도 정정한 마당에...
4.3. 징기스칸 4[편집]
코에이의 게임인 징기스칸 4에서는 도호인 장춘진인으로 등장하는데 역사적으로 정치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인지 정치력이 매우 좋게 나온다. 다만 사조영웅전에 익숙한 팬들에게는 한자릿수 전투력으로 충공깽을 선사한다. 그리고 금 장종의 도교 금지령을 반영했는지 따로 등용 커맨드로 찾아야 출현하며 초기 충성치도 낮은 편이다.[50]
4.4. 징기스칸전[편집]
조조전 모드인 징기스칸전에서는 징기스칸 4와 마찬가지로 도호인 장춘진인으로 등장한다. 두 번째 전투인 사막 수련전에서 위기에 빠진 테무진과 보르테를 구해주고 원본 조조전의 허자장처럼 튜토리얼의 역할을 수행한다.
칼카 강 전투가 끝난 후 테무진의 부름을 받고 니샤푸르에서 그와 재회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불로장생에 대해 묻는 테무진에게 그런 비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야하고 답은 그의 마음 속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제국은 피로 일궜으니 이제는 그 피를 버리고 왕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언급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등장 종료.
진 엔딩에서는 자무카와 테무룬이 영원한 도를 찾아 돈황에 있는 그를 찾아 떠난다고 언급된다.
4.5. 징기스칸: 지살령[편집]
한중일 합작영화인 징기스칸: 지살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구처기가 칭기즈칸을 만나기 위해 서역으로 갔을 때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이 부분은 『장춘진인서유기』보다 조금 축약되었을 뿐 내용과 맥락은 같다.[31] 『금련정종기』에서는 "백운관의 처순당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3년이 지난 후 (구처기의 시신에)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관을 열었더니 손과 발이 부드러웠고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다(殯於白雲觀之處順堂焉。三年之後,啟棺更衣,手足如綿,顔采如生)"라고 기록되었다.[32] 『금련정종기』, 활발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박학다식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눈썹이 크고 넓었다(敏而强記 博而高才 眉宇閑曠)[33] 『원사』 「석노전」에는 본문과 같이 어릴 때 관상을 보는 사람이 "훗날 마땅히 신선들의 우두머리가 되리(兒時有相者謂其異日當爲神仙宗伯)"라 하였다고 기록되었고, 『금련정종기』에는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구처기에게 "귀문(龜文)이 있으니 반드시 제왕의 스승이 될 것(善相者言足下有龜文必爲帝王師)"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었다.[34] 『금련정종기』, 집안의 세도가 서하에서 가장 이름났다(家世棲霞,最爲名族。).[35] 『철경록(輟耕錄)』, 등주 서하현 빈도리 사람이다. 조부는 농업에 종사했는데 주변에 덕을 잘 베푸는 사람으로 이름났다(登州棲霞縣濱都里人也。祖父業農,世稱善門。).[36] 진지안의 『금련정종기』와 이도겸(李道謙, 1219~1296)의 『감수선원록(甘水仙源錄)』에서는 이 설에 따라 기록하였다.[37] 사서섬과 유지현의 『금련정종선원상전』과 조도일(趙道一)이 지은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에서 이 설에 따라 기록하였다.[38]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 일찍이 (마옥이) 진도(秦渡)의 진무묘(眞武廟)에서 구처기, 유처현, 담처단 세 사람과 밤중에 각각의 뜻을 말하였는데, 스승은 투빈(鬪貧), 담처단은 투시(鬪是), 유처현은 투지(鬪志), 구처기는 투한(鬪閑)이라 하였다(嘗與邱劉譚三人,在秦渡眞武廟,月夜各言其志。師曰鬪貧,譚曰鬪是,劉曰鬪志,邱曰鬪閑。).[39] 해당 다큐의 13분 8초~13분 12초 사이에 그의 초상화와 함께 '옥조각의 시조 구처기(玉雕鼻祖邱處機)'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40] 이쪽은 좋게 술 대접하려는 걸 무공 조금 할 줄 아는 금나라 끄나풀인 줄 알고 살해하려 들었다. 양철심의 무공인 양가창법이 그나마 좀 알려진게 아니었다면 진짜로 죽였을 것이다. 양가창법을 알아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호감을 보인다.[41] 단천덕과 이평 건 때문에 초목대사 등과 함께 있었는데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못 믿는거냐며 다짜고짜 공격해서 싸움이 붙었다.[42] 단, 두 사건 모두 저쪽에서도 어느 정도 빌미를 주긴 했다. 곽소천과 양철심은 둘 다 현지 말투가 아니인데다, 농부 차림인데도 무공이 있었고, 양철심도 구처기의 태도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약간 시비를 털기도 했다. 강남칠괴 역시 고집과 자존심이 센 인물들인데다, 취선루 대결 때 하필이면 완안열의 부하들이 나타나기까지 했으니...[43] 사실 1티어급 고수인 오절들은 이미 죽었거나 혼자 다니거나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거나 아예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비춘 적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에게는 거의 전설의 고수 취급을 받았으며 오히려 2티어급인 전진칠자나 구양공자, 어초경독 등이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더 잘 알려져 있었다.[44] 단, 일곱사람 모두 한꺼번에 덤비진 않았다. 일곱이 동시에 덤비면 매초풍도 감당 못할 정도이니 구처기 역시 상대하기 어려울듯 하다.[45] 사통천과 잠깐 겨룰 때도 먼저 공격을 적중시켰고, 3대 1의 형세가 되어서도 오랜만에 강적들을 만났다며 신나게 싸워대는 장면이 있다. 물론 진짜 세 명을 이길 수 있을 만큼 월등한 것은 아니겠지만, 일시적으로나마 열세에 몰리지 않고 공격을 퍼부어대는 무공으로 보아 일대 일로 비교하면 단연 한 수 위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사통천, 팽련호, 구양극 등은 작품 내 직간접적 묘사에 의하면 전진칠자 중 왕처일 급인데, 전진칠자 중 최강자로서 왕처일보다 강하다고 명시되어 있는 구처기는 자연히 저들보다 한 수 위일 것이다. 작중에서도 방심한 황약사의 가슴에 일 장을 먹여 잠깐 주춤하게 만드는 위엄을 발휘했다. 물론 그 다음 장면이 7대 1로 진 치고 덤벼들어서 무승부가 나는 장면이니 천하오절급의 고수들에 비할 수준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