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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한제국)/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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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대비전에서 흥선군의 제2자에게 사위를 시킬 것을 명하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인 제2자(第二子)에게 사위(嗣位)시키라고 명하고, 영의정 김좌근(金左根)과 도승지 민치상(閔致庠)을 보내어 잠저(潛邸)[1]

에서 봉영(奉迎)하여 오게 하였다.

○大王大妃殿, 命興宣君嫡己第二子 嗣位, 遣領議政金左根, 都承旨閔致庠, 奉迎于潛邸。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卷之十五終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9번째기사.[2]











































"짐이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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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의 '헤이그 특사'인 이위종과 이상설이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 내용[3]





각 부문의 유사(有司)들은 자기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겠으나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박영효(朴泳孝),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도재(李道宰), 전 홍문관 학사(前弘文館學士) 남정철(南廷哲)은 직책이 더욱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거세게 직책을 회피하였으니 그 진상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7월 21일 양력 3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이완용, 조중응이 직책을 회피한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 등을 탄핵하다#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조민희(趙民熙)의 보고서를 받아보니, ‘피고 박영효(朴泳孝), 이도재(李道宰), 남정철(南廷哲)의 죄안을 심리한 결과 피고들은 모두 궁부(宮府)의 중임을 띠고서 황태자(皇太子)가 정사를 대리함을 진하(陳賀)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들어와 참가하지 않고 혹은 병을 핑계대기도 하고 혹은 통지를 받지 못하였다는 등의 말들로 공술하였습니다. 더없이 중대한 예식을 태연히 회피하였으니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피고들은 모두 《형법대전(刑法大全)》 제226조의 관리들이 임명받았거나 재임 기간에 일을 당하여 사고로 핑계대거나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회피하는 자는 중한 법조문에 의하여 각각 태형(笞刑) 80대에 처한다는 율문을 적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평리원에서 원래 제기한 법조문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2일 양력 3번째기사#




1908년(융희 2년) 봄 이위종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종황제의 독립자금 1만 루블(Ruble)을 가지고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코예(Novokiyevskoye)에 도착했다. 한러국경에 가장 가까운 러시아 마을인 연추는 전신국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집결지로서 이미 러일전쟁 초기부터 한러군사협력 및 항일의병전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황제의 자금이 이범윤, 안중근, 최재형 등이 참여한 연해주 대한독립군 조직인 同義會 창설에 소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大韓義軍은 1907년(광무 11년)에 해산된 구한국군대를 계승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이끌어 나갈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고종황제가 그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대한의군의 설립은 1908년(융희 2년) 11월에 구체화된 고종황제의 블라디보스톡 파천계획의 전제조건으로서 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수립 구상의 일환이었다. 1910년 7월 28일 “고종황제로 하여금 노령의 연해주로 조속히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하라고 청한 十三道義軍都總裁 유인석과 이상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항일전쟁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고종황제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하얼빈 의거고종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의군의 항일독립전쟁사의 序幕에 해당되는 바, 이는 1945년까지 항일독립전쟁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의군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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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안중근하얼빈 의거(1904~1910) 2012, vol., no.73, pp. 95-142 (48 pages)


본 연구는 러일개전(1904)에서 헤이그특사 이상설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기(1909)까지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황제의 강제 퇴위(1907)를 정점으로 양 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전기는 개전 이후 단교되었던 한러관계가 주한공사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상하이정보국과 고종황제의 비공식 정보협력 채널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전쟁기간 중 러시아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상하이정보국의 한국분과 요원들의 활동은 한러간의 정보협력뿐만 아니라 전후 이들이 의병활동에 투신함으로써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기는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측근들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통해 직접 독립운동을 지휘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 고종황제러시아 당국간의 비밀교섭 창구 역할은 상하이주재 러시아 상무관이던 고이예르와 현상건이 맡았으며 이들은 러일전쟁기 파블로프의 상하이정보국에서 공조했던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한러관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정보협력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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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81 (2014.12), pp.43-84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 (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선명히 나 있었다.

- 윤치호 일기 (1920.10.13.)






  •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지병인 뇌일혈인데, 전조 증상이 분명한 뇌일혈에 비해 고종은 붕어한 당일까지 건강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 고종 사후 염습(殮襲, 시신을 깨끗한 여러 옷으로 감싸 봉인하는 일)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3일 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뚝뚝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砒傷; 비소 화합물)의 비소 성분으로 사망 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4] 고종의 붕어일은 양력 1월 21일, 한 겨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3일만에 부패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 고종에게 최후의 간식을 올리고 기미한 것으로 보이는 궁녀들도 이후 의문사하였다.
  • 그의 승하가 기록된 《고종실록》 및 《순종실록》이 일제에 의해 편찬된 점으로 보아 미심쩍은 구석도 있었다. 《순종실록》 부록에선 1919년 1월 20일 고종의 와병 기록이 있고, 여기선 정확한 병명에 대한 언급 없이 도쿄에 있는 이왕세자 영친왕에게 전보를 쳐서 알렸고, 이완용이기용이 숙직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또한 사망일 역시 《고종실록》의 1월 21일인지, 《순종실록》의 1월 20일인지 불분명한 경우도 있다.
  • 조선총독부가 칙령 9호로 이태왕 승하에 따라 3일 간 가무음곡을 중지한다고 결정했는데, 1주 뒤에 칙령을 내린 점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5]
  •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총리대신을 비롯한 고위층에서 이 무렵에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를 고종 암살설과 연계시킬 수도 있다.[6]





  • 1월 20일
    • 오전 11시 - 고종 기상, 안상호 촉탁의 배진, 아침식사 (매일신보 1919.1.22.)
    • 오후 3시 - 고종 가미온담탕 진어 (매일신보 1919.1.22.)
    • 오후 가미오카 대표 촉탁의 2회 배진 (경성일보 1919.1.24.)
    • 오후 6시 도가와 촉탁의 배진 진맥 (경성일보 1919.1.24.)
    • 오후 10시 저녁식사(평소 저녁식사 11시) (매일신보 1919.1.27.)
  • 1월 21일
    • 오전 1시경 발병 (매일신보 1919.1.29.)
    • 발병직후 상황 김형배 전의 청심환 처방 (매일신보 1919.1.22.)
    • 전의가 도가와 촉탁의에게 연락 (경성일보 1919.1.23.)
    • 2시경 도가와 촉탁의 제일 먼저 배진, 뇌일혈 진단, 고종 20분마다 총 12회 경련 (경성일보 1919.1.23.)
    • 4시 53분 가미오카 배진, 뇌일혈 진단 (경성일보 1919.3.16.)
    • 5시 30분 모리야스 배진, 뇌일혈 진단 (매일신보 1919.1.23.)
    • 6시경 고종 붕어 직전 순종 참궁, 이후 사망 (경성일보 1919.1.23.)












[1] 잠저(潛邸) : 창업(創業)한 임금이나 종실(宗室)에서 들어온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컬음. 또는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즉 여기서 말하는 잠저는 운현궁이다.[2] #.[3] 인터뷰에서는 "황제의 마지막 전언"이라고 했다.[4] 비소 중독의 경우는 세포 조직이 먼저 괴사하며 사망하기 때문에 부패가 이른 편이다.[5] 해당 책에서 이덕일은 이러한 일을 통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간에 뭔 일이 있었을 걸로 추측될 여지가 있다고 봤다.[6] 당시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이 아니라 본토 총리대신으로 승진해 있었고 총독은 하세가와 요시미치였다. 암살에 개입했을 가능성이야 있지만 내지 정무로도 충분히 바빴었을 사람이 현직 조선 총독을 점프하여 암살에 개입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낮다는 반박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