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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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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고구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와 28명의 군주를 가진 나라였다. 평균 재위 기간은 25년으로 한국사 역대 왕조 중 가장 긴 편이었다. 참고로 이로부터 700여 년 뒤의 왕조인 조선 군주의 평균 재위 기간이 19년 2개월인 걸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재위 기간이다.
다만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3대의 계보가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을 보았을 때 이 사이에 누락된 군주가 더 있었거나 신라나 백제의 초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건국 및 초기 연대에 약간의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렇다면 평균 재위 기간은 조금 깎일 여지가 있다. 아무튼 후대의 고려와 조선보다 훨씬 오래 존속했으면서도 군주의 수가 고려보다 적고 조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군주들의 평균 수명이 비교적 길었거나 왕권의 안정성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다수의 고구려 군주들의 시호가 완전하게 전하지 않으며, 광개토태왕의 경우를 보건대 완전한 시호는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1] 광개토태왕의 경우에는 그나마 광개토태왕릉비가 남아 있어서 완전한 시호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흔히 태왕이 묻힌 곳(장지명)으로 태왕을 호칭했다. 특히 그 가운데 광개토태왕이 묻힌 '국강상'은 당시 수도이던 국내성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고국원왕의 '고국원', 고국양왕의 '고국양'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호칭이 바로 '국강상왕'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하던 당시에는 국내성 인근을 가리켜 '국강(國崗)'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평양으로 도읍이 이전한 뒤에는 옛 수도라는 의미에서 '고국원(故國原)'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2] 군주가 묻힌 곳으로 군주를 호칭하는 방식은 훗날 고려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으로 세종을 능의 이름을 따서 영릉(英陵)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3][4]
삼국시대가 정복 국가 시대이고 특히 고구려가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진 만큼 정복 군주가 상당히 많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동명성왕, 대무신왕, 태조대왕, 미천왕, 광개토태왕, 장수왕 등이 있다. 이 중 한국 역사에서 꼽히는 대표적인 정복 군주가 바로 광개토태왕.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고, 남한 학계의 대다수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북한과 남한 소수 학설에서는 일부 고구려 일부 역사가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 건국 연도를 기원전 300년 근처로 보고 있다. 당나라의 한 장수가 언급한 고구려 900년설을 따른 것. 실제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년인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옛조선의 땅에 고구려라는 집단이 존재했다는 중국측 사료는 많이 있다. 그래서 기존에 토착세력인 고구려 집단 혹은 초기왕국을 부여에서 이주한 추모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왕위를 쟁취한 시점이 기원전 37년이며 이때를 고구려 건국년으로 보는것이다. 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설을 따르기도 하고, 위키백과 등에서 그렇게 서술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뢰성 문제로 실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태조대왕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백제 건국을 생각하면 지나친 고구려 역사 축소다.[5]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이 그랬듯이,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에서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대무신왕 때부터 산상왕 때까지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지만, 산상왕 때부터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됨에 따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개 고구려의 왕위는 부자간에 계승되기 시작했다.[6]
여담으로 현재 고구려 고씨 왕실의 후손들이 바로 횡성 고씨로 전국에 약 6,000여 명 정도 살고 있다. 고구려의 초대 군주였던 추모성왕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중시조는 고구려의 마지막 군주인 보장왕의 아들 고인승인데 바로 고구려 부흥운동 때 잠깐 군주로 추대됐었던 고안승의 형이다. 고인승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기타 왕족들처럼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고 강원도 횡성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족보로만 따진다면 초대 군주 고주몽의 21대손이자 고구려 군주들 중 가장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9대손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따르면, 고인승은 추모의 26대손이 된다.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가계도로, 일부《후한서》, 《위서》 등 중국 측 사서의 계보를 기입했다.
재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명왕의 아들이나,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대주류왕의 3세손, 즉 손자라고 추정했다. 이유는 그래야 광개토태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이 추모성왕의 17세손이라고 쓰인 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유리명왕의 현손자, 대무신왕의 증손자가 된다. 다만 17세손은 직계가 아닌 방계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서 여러모로 애매하다.
태조대왕의 즉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다.
고구려 군주의 공식 시호가 멀쩡하게 남아있는 용례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 유일하다. 여기서 '국강상'은 태왕이 묻힌 장지명으로, '광개토경 평안'은 태왕의 공을 기리는 훈적형 왕호[10] , '호태왕'은 공식 존호나 시호 끝에 붙이는 ~신대왕, ~선제, ~명제 등과 같은 미칭으로 파악된다. 호태왕의 칭호는 호우명 그릇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전승되는 고구려 군주들의 여러 가지의 이명들이 위에 언급된 양식의 일부가 파편적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다만 국초부터 제정되어 통용된 양식으로 보이지는 않고 일부 왕호는 당대에 쓰이지 않고 후대에 별칭으로 전해지거나 추봉된 왕호로 보이기도 한다.
말 그대로 휘, 이름 그대로 지칭한 왕호를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동명성왕을 추모성왕, 주몽왕 등으로 표기한 것이나 유리명왕을 유류왕, 대무신왕을 대주류왕 등으로 일컫은 것 등이 있다. 또한 마지막 군주인 보장왕 역시 나라가 망하고 존호가 전하지 않기에 이름으로 불린다.
군주가 묻힌 곳을 부르는 발상은 묘호나 능호와 비슷한데 건국 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왕호 양식이다.
민중왕, 모본왕은 민중원, 모본원 등에서,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등은 특정 하천에서,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묻힌 것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국강상성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부터 고구려 평원왕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이명들 역시 대부분 묻힌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무신, 광개토, 평안, 장수, 문자, 명치 등등 고구려 중기, 광개토대왕 이래로 기록에 등장하는 왕호로 생애의 훈적(업적)을 기린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경우나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11] 등 역시 일정한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는 보이지만 추정이 어려운 왕호들도 있다.
신찬성씨록 3장 "제번" 편 참조
독음이 달린 포스트.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미 성씨가 일본화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고 길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는 성씨를 우지(氏)와 카바네(姓)로 구분했기 때문인데, '우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현대의 성씨로, '카바네'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문의 유래나 등급으로 보면 편리하다. 연전왕 항목의 코마노 아소미씨를 보면 '코마'가 '우지'에 해당하고, '아소미'가 '카바네'에 해당한다.
'우지'와 '카바네' 사이에 있는 조사인 '노(の)'로 구분하면 된다. 안류왕 항목의 카후치노 미타미노 오비토씨는 굉장히 긴데 '우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미타미'이고, '카바네'에 해당하는 부분은 '오비토'이다. 그럼 앞의 카후치는 왜 붙었나 하면 백제에서 유래한 미타미노 오비토씨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지리명을 붙인 것이다. 반면에 수모기왕 항목의 코마소메베씨와 코마히토씨는 '카바네'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우지'만 있어서 성씨가 짧다. 또 특기할 만한 성씨는 연나왕 항목의 카우노 후히토씨인데 '카우'는 '고(高)'를 그냥 일본식으로 음독한 것에 불과하다(정확히는 현대가 아닌 고대 일본의 한자 발음이다). 즉 '고씨'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코마(狛)'라는 단어가 고구려계 성씨에 굉장히 많이 쓰인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고구려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름 뒤에 '기(祁)'가 붙은 군주가 많은데 이는 이름의 일부라기보다는 존칭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한국어에서 '기'나 '지'를 이름 뒤에 붙여 존칭하는 용법은 삼국 공통으로 두루두루 나타난다. 또한 수모기왕의 '수모' 부분의 훈은 '스무'로 시조 추모왕의 훈과 같기 때문에 추모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을 가리키는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1. 개요[편집]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와 28명의 군주를 가진 나라였다. 평균 재위 기간은 25년으로 한국사 역대 왕조 중 가장 긴 편이었다. 참고로 이로부터 700여 년 뒤의 왕조인 조선 군주의 평균 재위 기간이 19년 2개월인 걸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재위 기간이다.
다만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3대의 계보가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을 보았을 때 이 사이에 누락된 군주가 더 있었거나 신라나 백제의 초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건국 및 초기 연대에 약간의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렇다면 평균 재위 기간은 조금 깎일 여지가 있다. 아무튼 후대의 고려와 조선보다 훨씬 오래 존속했으면서도 군주의 수가 고려보다 적고 조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군주들의 평균 수명이 비교적 길었거나 왕권의 안정성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다수의 고구려 군주들의 시호가 완전하게 전하지 않으며, 광개토태왕의 경우를 보건대 완전한 시호는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1] 광개토태왕의 경우에는 그나마 광개토태왕릉비가 남아 있어서 완전한 시호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흔히 태왕이 묻힌 곳(장지명)으로 태왕을 호칭했다. 특히 그 가운데 광개토태왕이 묻힌 '국강상'은 당시 수도이던 국내성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고국원왕의 '고국원', 고국양왕의 '고국양'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호칭이 바로 '국강상왕'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하던 당시에는 국내성 인근을 가리켜 '국강(國崗)'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평양으로 도읍이 이전한 뒤에는 옛 수도라는 의미에서 '고국원(故國原)'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2] 군주가 묻힌 곳으로 군주를 호칭하는 방식은 훗날 고려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으로 세종을 능의 이름을 따서 영릉(英陵)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3][4]
삼국시대가 정복 국가 시대이고 특히 고구려가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진 만큼 정복 군주가 상당히 많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동명성왕, 대무신왕, 태조대왕, 미천왕, 광개토태왕, 장수왕 등이 있다. 이 중 한국 역사에서 꼽히는 대표적인 정복 군주가 바로 광개토태왕.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고, 남한 학계의 대다수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북한과 남한 소수 학설에서는 일부 고구려 일부 역사가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 건국 연도를 기원전 300년 근처로 보고 있다. 당나라의 한 장수가 언급한 고구려 900년설을 따른 것. 실제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년인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옛조선의 땅에 고구려라는 집단이 존재했다는 중국측 사료는 많이 있다. 그래서 기존에 토착세력인 고구려 집단 혹은 초기왕국을 부여에서 이주한 추모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왕위를 쟁취한 시점이 기원전 37년이며 이때를 고구려 건국년으로 보는것이다. 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설을 따르기도 하고, 위키백과 등에서 그렇게 서술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뢰성 문제로 실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태조대왕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백제 건국을 생각하면 지나친 고구려 역사 축소다.[5]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이 그랬듯이,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에서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대무신왕 때부터 산상왕 때까지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지만, 산상왕 때부터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됨에 따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개 고구려의 왕위는 부자간에 계승되기 시작했다.[6]
여담으로 현재 고구려 고씨 왕실의 후손들이 바로 횡성 고씨로 전국에 약 6,000여 명 정도 살고 있다. 고구려의 초대 군주였던 추모성왕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중시조는 고구려의 마지막 군주인 보장왕의 아들 고인승인데 바로 고구려 부흥운동 때 잠깐 군주로 추대됐었던 고안승의 형이다. 고인승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기타 왕족들처럼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고 강원도 횡성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족보로만 따진다면 초대 군주 고주몽의 21대손이자 고구려 군주들 중 가장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9대손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따르면, 고인승은 추모의 26대손이 된다.
2. 계보도[편집]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가계도로, 일부《후한서》, 《위서》 등 중국 측 사서의 계보를 기입했다.
2.1. 태조 이전[편집]
재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명왕의 아들이나,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대주류왕의 3세손, 즉 손자라고 추정했다. 이유는 그래야 광개토태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이 추모성왕의 17세손이라고 쓰인 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유리명왕의 현손자, 대무신왕의 증손자가 된다. 다만 17세손은 직계가 아닌 방계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서 여러모로 애매하다.
태조대왕의 즉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다.
- 47년에 태어나서 53년부터 146년까지 총 93년을 재위했으며 심지어 165년에 사망해 무려 118세를 살았는데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 6대 군주인데 왜 시호가 '태조'인가?
- 2대 군주 유리명왕부터 5대 군주 모본왕은 《삼국유사》에 '해씨'라고 나오는데 왜 6대 군주 태조대왕부터는 '고씨'라고 기록되었나? 이에 대한 해석은 해씨 고구려설 항목 참조.
2.2. 태조 이후[편집]
2.3. 평양 천도 이후[편집]
고익과 장수왕의 정확한 관계는 불명이나, 장수왕의 즉위를 고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이 왕족인 고씨이고 장사(長史)라고 표기된 점을 볼 때 왕과 가까운 친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연표[편집]
4. 왕호[편집]
고구려 군주의 공식 시호가 멀쩡하게 남아있는 용례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 유일하다. 여기서 '국강상'은 태왕이 묻힌 장지명으로, '광개토경 평안'은 태왕의 공을 기리는 훈적형 왕호[10] , '호태왕'은 공식 존호나 시호 끝에 붙이는 ~신대왕, ~선제, ~명제 등과 같은 미칭으로 파악된다. 호태왕의 칭호는 호우명 그릇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전승되는 고구려 군주들의 여러 가지의 이명들이 위에 언급된 양식의 일부가 파편적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다만 국초부터 제정되어 통용된 양식으로 보이지는 않고 일부 왕호는 당대에 쓰이지 않고 후대에 별칭으로 전해지거나 추봉된 왕호로 보이기도 한다.
4.1. 휘형[편집]
말 그대로 휘, 이름 그대로 지칭한 왕호를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동명성왕을 추모성왕, 주몽왕 등으로 표기한 것이나 유리명왕을 유류왕, 대무신왕을 대주류왕 등으로 일컫은 것 등이 있다. 또한 마지막 군주인 보장왕 역시 나라가 망하고 존호가 전하지 않기에 이름으로 불린다.
4.2. 장지형[편집]
군주가 묻힌 곳을 부르는 발상은 묘호나 능호와 비슷한데 건국 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왕호 양식이다.
민중왕, 모본왕은 민중원, 모본원 등에서,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등은 특정 하천에서,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묻힌 것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국강상성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부터 고구려 평원왕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이명들 역시 대부분 묻힌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4.3. 훈적형[편집]
대무신, 광개토, 평안, 장수, 문자, 명치 등등 고구려 중기, 광개토대왕 이래로 기록에 등장하는 왕호로 생애의 훈적(업적)을 기린 것으로 추정된다.
4.4. 기타[편집]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경우나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11] 등 역시 일정한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는 보이지만 추정이 어려운 왕호들도 있다.
4.5. 불명[편집]
5. 《신찬성씨록》 등장 제후왕[편집]
신찬성씨록 3장 "제번" 편 참조
독음이 달린 포스트.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미 성씨가 일본화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고 길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는 성씨를 우지(氏)와 카바네(姓)로 구분했기 때문인데, '우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현대의 성씨로, '카바네'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문의 유래나 등급으로 보면 편리하다. 연전왕 항목의 코마노 아소미씨를 보면 '코마'가 '우지'에 해당하고, '아소미'가 '카바네'에 해당한다.
'우지'와 '카바네' 사이에 있는 조사인 '노(の)'로 구분하면 된다. 안류왕 항목의 카후치노 미타미노 오비토씨는 굉장히 긴데 '우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미타미'이고, '카바네'에 해당하는 부분은 '오비토'이다. 그럼 앞의 카후치는 왜 붙었나 하면 백제에서 유래한 미타미노 오비토씨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지리명을 붙인 것이다. 반면에 수모기왕 항목의 코마소메베씨와 코마히토씨는 '카바네'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우지'만 있어서 성씨가 짧다. 또 특기할 만한 성씨는 연나왕 항목의 카우노 후히토씨인데 '카우'는 '고(高)'를 그냥 일본식으로 음독한 것에 불과하다(정확히는 현대가 아닌 고대 일본의 한자 발음이다). 즉 '고씨'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코마(狛)'라는 단어가 고구려계 성씨에 굉장히 많이 쓰인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고구려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름 뒤에 '기(祁)'가 붙은 군주가 많은데 이는 이름의 일부라기보다는 존칭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한국어에서 '기'나 '지'를 이름 뒤에 붙여 존칭하는 용법은 삼국 공통으로 두루두루 나타난다. 또한 수모기왕의 '수모' 부분의 훈은 '스무'로 시조 추모왕의 훈과 같기 때문에 추모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을 가리키는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6. 여담[편집]
- 《삼국사기》의 태조대왕의 재위 기간과 생몰년이 매우 길다. (94년 재위, 119세) 또한 이후 군주인 차대왕, 신대왕 또한 '형제'로 기록되어 있으면서 지나치게 나이가 많다. 이는 후대의 기록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 시호가 굉장히 직설적인 군주들이 많다.
미천하게 살다가 왕위에 오른 미천왕, 땅을 넓혀서 광개토대왕, 오래 살아서 장수왕. 영양왕 같은 경우는 대하 사극 연개소문에서 영양'제'로 나와주시는 바람에 안그래도 웃긴 시호가 더 코믹. 잘보면 동, 중, 서천왕 시리즈도 꽤 규칙적인 작명센스를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몇몇 군주의 경우는 장지명에 따라 시호가 지어져있기 때문이다. 숲(소수림)이 근처에 있으면 소수림왕, 중천의 들에 장사지냈으니 중천왕. 이런 식으로 시호를 붙였다. 게다가 시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도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보이는 시호와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시호가 많이 차이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4] - 보장왕이 연개소문에 의해 왕위에 오르고나서 자신의 아버지를 군주로 추존하는데 시호가 다름이 아니라 태양왕(...).
- 고구려 말기에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약광이 일본에 귀화하여 고려씨(코마씨)를 내려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현무약광(玄武若光)'이라는 자가 고려약광과 동일 인물이라면, '현무'가 외척을 의미하기 때문에 약광이 고씨 왕족이 아니라는 가설도 있기는 하다. 물론 '현무'라는 말을 반드시 외척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외척으로 해석할 경우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약광이 보장왕의 아들이거나 고씨 왕족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고구려 왕실 인사에 대한 사료가 원체 부족해서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록에 남지 않으니 그냥 군주가 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만 남아있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다른 왕족이 언급되는 수준. 가령 태자 내정자였다가 요절한 고조다라든가,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를 갈아엎어버린 고발기라든가...
7. 둘러보기[편집]
[1] 이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군주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려 태조의 시호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인데 후대로 내려갈수록 후대 군주들이 두 글자씩 덧붙인 것이다. 이 긴 시호를 줄인 것이 신성왕(神聖王) / 신성대왕이다. 아니면 묘호만 써서 태조라고 부르거나 군주가 묻힌 능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2] 羅神, <有關高句麗王號制度的幾點推測(고구려 왕호 제도에 관한 몇 가지 견해)>,《고구려 광개토왕과 동아시아》, 한국 고대사 학회, 2012년 참조.[3] 예를 들어 훗날 세종 시절의 일을 이야기하려거든, "영묘조(英墓祖)때 있었던 일인데…" 하는 식.[4] 다만 이는 세종의 묘호가 아들의 묘호와 시자(諡字)가 '세(世)'로 겹쳐,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폭넓게 사용된 면이 크다. 보통 -묘조(-廟祖)로 지칭하는건 묘호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선조→선묘)[5] 현행 한국 국사 교과서는 대무신왕의 이름까지도 등장하기는 한다.[6] 이렇게 왕위 계승 형태가 변동되는 과정에서 군주의 형제들이 왕위를 노리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7] 해당 벽화는 미천왕을 그린 벽화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내용은 안악 3호분 문서 참조.[8] 해당 벽화는 고국원왕을 그린 벽화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안악 3호분 문서 참조.[9] 79년 치세. 나이는 97세.[10] 일각에서는 '"평안'" 부분을 임금의 휘, 본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1] 보장왕의 추존된 아버지.[12]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인 '호태왕(好太王)'과 관련있는지는 불명. 일본어 기준으로 '台'는 '토(と)'로 읽고 '호(好)' 자체도 시호에 많이 포함되는 글자여서 다소 불명확. 일단 호태가 고구려왕이었다고는 기록되어 있다.[13] 《수서》 기준의 고구려 관등으로 '소사자'의 다른 이름인 '을사(乙奢)'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14] 하지만 군주가 되기에는 세력이 너무 미미해서(어머니 신분이 천했거나 혹은 정쟁 등으로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거나) 혹은 군주가 되기도 전에 요절해버려서 기록에서 빠졌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 족보에도 일찍 죽은 아들을 족보에 싣지 않은 사례가 많은데, 조선 후기 선산 출신의 무관이었던 노상추는 자신의 일기에 어린 아들 하나가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고 적은 기록이 있지만 정작 노상추의 집안인 《선산 노씨 족보》에는 그 아들의 이름은 커녕 존재도 수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래의 부련왕이 복귀왕의 아들이라 기록된 걸 보면 요절한 것 같진 않다. 한씨 미녀 설화가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면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아들일 수도 있다.[15] 《신찬성씨록》의 훈에 의하면 추모는 '스무'라고 읽는다고 되어 있다.[16] 왕(王)이라고는 하는데 광개토대왕의 다른 표기인 호태왕(好太王)과는 일단 미묘하게 다르다.[17] 호칭에 왕(王)이 들어가있지만 신분은 국인(国人), 즉 신하다.[18] 法名東楼。[19] 法名信成。[20] 一名朱蒙。[21] 謚欽明。[22] 栄井宿祢。[23] 日置倉人。[24] 물론 이 차이라는 것도 한문 표기 방식의 차이라는 것일 뿐이고. 한 사람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다른 한자를 써서 적는 것은 고려 시대까지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25] 보장왕의 아들로 추정.[26] 일본명은 '코마노 코키시 쟛코'(高麗王若光).[27] 약광의 57대손[28] 약광의 58대손.[29] 약광의 60대손으로 현재 코마 신사의 궁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