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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수(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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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KBO 리그에서 뛰었던 전직 야구선수로,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꽤나 옛날 선수라 그닥 알려지지는 않은 편이지만 최익성이나 동봉철, 이동수보다도 앞서 대표적인 저니맨이었던 선수로 4개의 팀에서 뛴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3]
2. 선수 경력[편집]
경상중, 대구상고, 한양대 졸업 후 1988 서울 올림픽 참가를 위해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했고, 1989년 1차 2순위 지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원래 포지션은 내야수로 대구상업고등학교 때는 유격수를, 한양대학교 때에는 3루수를 맡았지만 프로 입단 후 외야수로 전향했다. 프로 입단 후 2년간 주로 백업으로 나왔고 1991년 1월 1루수 신경식을 상대로 OB 베어스에 트레이드됐다.
OB 시절에는 1994년 항명 파동에 의한 보복으로 방출되었으나 태평양에서 바로 영입, 그 이듬해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였다.[4]
통산타율 .222에서 보듯 정확도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볼넷과 삼진이 많았으며, 잠실을 홈으로 쓰면서도 매년 두자릿수 홈런을 칠 정도로 파워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하여 매년 8할에 가까운 ops를 찍었다. 타율이 좀 낮은 대신 장타율과 출루율이 좋았던 소위 말하는 OPS 히터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이 삼성 시절 빙그레 한희민을 상대로 무려 16개의 공을 커트한 기록이 있다. 이는 훗날 2008년 정원석이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 약 18년 가량 한국프로야구 최다 기록이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은 태평양 시절이었던 1995년으로 타율 .243에 21홈런 68타점 ops .778을 기록, 김상호, 이동수와 홈런왕 경쟁을 펼치며 박재홍의 입단 전 거포가 부족했던 타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박재홍이 입단하면서 주전경쟁에서 밀렸고, 이후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IMF 사건 재정난으로 어려워지기 전의 1997년 6월 1:2 트레이드(김광림 ↔ 강영수, 공의식)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한 후 대타로 가끔 나오다가 1998년 은퇴하였다.
여담으로 이명수-김동주로 이어지는 OB-두산 비행기 응원가의 원조이다. '영수 영수 강영수~'로 1993년쯤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경동고등학교 코치, SK 와이번스 타격코치, 원주고등학교 감독을 역임했다.
4. 연도별 성적[편집]
5. 관련 문서[편집]
[1] 1984학번[2] 이후 이명수, 김동주에게 넘어갔다.[3] 실업팀을 제외하면 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쌍방울 레이더스.[4] 태평양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OB와 태평양 모두 잘 되었다는 식으로 나왔다. 요약하자면 태평양은 강영수를 영입해서 좋고, OB는 그 반대로 강영수를 내보내서 좋은 상황(...)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OB 베어스 항명파동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