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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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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47년 4월 25일 열린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가타야마 데쓰가 이끄는 일본사회당이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일본자유당과 아시다 히토시가 이끄는 일본민주당을 누르고 1당에 오른 뒤 민주당과 연정을 맺으면서 일본국 헌법 제정 이후 첫 정권 수립[2] 이자 일본 역사상 첫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사회당의 좌·우파가 분열되면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가타야마가 1948년 3월 10일,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후임 총리로 아시다 히토시가 지명받으면서 기대를 모았던 사회당 정권은 1년이 가지 못하고 몰락했다.
1.1. 성립 과정[편집]
1946년 11월 3일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따라 1947년 4월 25일 처음 치러진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일본사회당은 두 보수 정당(일본자유당, 일본민주당)을 누르고 제1당이 되었으나 단독으로 내각을 출범시킬만한 의석은 얻지 못했다.
당초 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쓰 위원장은 당연히 일본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보수 연립정권을 출범시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일본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일본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 대표 간의 갈등으로 보수 연립정권은 수립되지 않았고 결국 내각 구성 권한은 개선 1당 대표인 가타야마 데쓰 위원장에게 넘어왔다.
갑작스럽게 정권을 인수받게 된 가타야마 위원장은 일본자유당을 포함한 거국내각을 구상하면서 자유당에도 손을 내밀었지만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일본사회당 내 좌파 배제 등을 요구하며 난색을 표했고[3] 결국 일본자유당을 배제한채 아시다 히토시의 일본민주당, 국민협력당, 녹풍회와 연정을 출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각 구성이 다소 지연되면서 9일간 가타야마 1인 내각[4] 이 구성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2. 총리 지명 투표[편집]
- 각 원마다 각각의 총리후보를 지명한다. 중의원과 참의원의 지명후보가 일치한 경우 그 자가 총리지명자가 된다. 각 원에서 지명한 후보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양원 간의 협의회를 열고 협의회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중의원에서 지명한 자가 총리지명자가 된다.
- 전체투표수의 과반을 넘는 후보가 없을 경우 최다 득표자와 2위 득표자 간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며, 결선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한 자가 총리로 지명된다.
[1] 내각 출범 직후가 아닌 내각 출범 9일 뒤에 찍게 되었다. 왜 그런지는 하단에 서술.[2] 제1차 요시다 내각까지는 기존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내각이 수립되었고, 헌법 제정 이은 요시다 내각 시절 이루어졌으나, 정권 수립으로써는 가타야마 내각이 처음이다.[3] 본질적으로는 좌우를 망라하는 거국내각이 오래 갈 수 없다는 판단으로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결국 사회당의 분열로 이것이 맞아떨어진다.[4] 관례상 겸임해도 겸직으로 간주해 대수로 취급되는 외무대신과 복원청 총재,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행정조사부 총재를 제외하고 모든 직위를 임시 겸임하였다. 외무대신은 대수로만 들어갈 뿐 사실상 임시 겸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가청 장관은 내각발족 직후에는 겸직하지 않았으나 그 이후 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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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의 지명 투표를 거쳐 가타야마 데쓰가 일본국 헌법 제6조에 의거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의 지명을 받아 쇼와 덴노로부터 총리로 임명되었다.
비록 일본자유당은 내각에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1당이 총리를 배출해야한다는 요시다 전 총리의 뜻에 따라 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쓰 위원장에게 투표권을 행사했다. 이후 일본 현대사에서는 보기 힘든 전례.
3. 각료 목록[편집]
3.1. 국무대신[편집]
- 내각총리대신인 가타야마 데쓰(1947년 5월 24일 취임)와 비고란에 쓰여진 것을 제외하고는 1947년 6월 1일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