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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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의 위주서 (위주 관아) 일대의 전경
장자커우의 그랜드 캐년이라 불리는 서전자량
蔚县
영어 Yu County
허베이성 장자커우시의 현. 인구는 약 47만명이다. 과거 대 (代)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중국 역사상 4차례[1] 있었던 대나라 및 한나라의 제후국인 대국의 수도이자 대군의 치소였다. 현재의 시가지는 명나라 대에 세워진 위주고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성내에는 옛 관아와 사찰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북쪽 8km 지점에 한대의 대왕성 (代王城) 유적이 남아있다.
전국시대 북적 계열의 대나라가 있었는데, 기원전 457년 진나라 (晉)의 권신 조양자에 의해 멸망하였다. 조양자 가문은 후일 조나라를 세웠고, 기원전 305년경 누번과 임호에 맞서던 조무령왕이 일대에 대군 (代郡)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 (秦)가 조나라를 멸하자, 왕자 조가는 잔당을 이끌고 대군으로 향하여 대왕 (代王)을 칭하였다. 이 대나라 역시 기원전 228년 진나라에 정복되었고, 일대에는 대현 (代縣)이 설치되어 대군의 치소가 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206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당시 조나라 왕실의 후예인 조헐이 대왕으로 봉해져 대나라가 재차 세워졌으나, 불과 2년 후 조헐이 정형 전투에서 한신의 배수진에 해하고 전사하며또다시 허망히 멸망하였다.
대왕성진 (代王城镇)에 남아있는 한나라 대의 대왕성 성벽 유적
전한 건국 후 기원전 200년 유방은 형 유중을 대왕에 봉하였고, 이렇게 설립된 제후국 대나라는 백등산 전투로 강성해진 흉노의 위협에 맞서는 중책을 담당하였다.[2] 다만 유중은 얼마후 흉노가 침공하자 봉국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따라서 유방은 자신의 차남 유여의를 대왕에 봉하였다. 다만 기원전 198년 조왕 장오가 폐위된 후 유여의가 조왕이 되자 당시 6세였던 막내 동생 유항이 계승하였다. 다만 기원전 197년 진희 (陳豨)의 반란군이 대에 이르렀기에 유항은 3년 후에야 봉국을 접수할 수 있었다. 유방 사후 여후의 폭정 시기 숨죽이며 있던 유항은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고 후소제가 폐위되자 백관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니, 문경지치의 시작을 알린 한문제였다.
한문제는 기원전 178년, 차남 유무를 대왕에 봉했으나 2년 후 회양왕으로 전임시키고 삼남 유찬을 대왕에 봉하였다. 유무는 후일 (유중의 아들 유비가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의 진압에 있어 활약한다. 유잔은 이후로 대왕 직을 유지하다 기원전 161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유등은 31년간 재위한 후 기원전 132년 아들 유의에게 물려주었다. 한무제는 군국제의 약화를 위해 유씨 황족들을 경계하였고, 기원전 114년 대왕의 권력을 축소시켜 청하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기원전 94년 유의가 사망한 후 대군은 군현제의 일환으로 재차 대군으로 편성되었다. 후한 건국 후 광무제는 양한교체기에 한무제의 증손이자 황제를 칭했던 노방이 투항하자 서기 40년 그를 대왕에 봉하였다.
이로써 한세기 반만에 대국이 부활했으나 불과 2년 후 노방은 광무제를 의심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흉노에 귀순하였다. 이로써 (한나라 하의) 대왕직은 완전히 철폐되었고, 유주 하의 대군으로 편성되었다. 동시에 대군의 치소는 후한 들어 고류 (高柳, 현 양가오현)로 이전되었으나 조위 시절 대현으로 돌아왔다. 진한대 대군은 산서 ~ 하북에 걸쳐 11 ~ 18개의 현을 통솔하였고 5만 7천 가구의 28만 인구를 거느렸다.
서진의 쇠퇴를 틈타 310년 대공 (代公)을 칭한 선비족 탁발부의 지도자 탁발의로는 5년 후, 영가의 난으로 망해가던[3] 진민제에게서 대왕으로 봉해졌다.[4] 이렇게 세워진 대나라[5] 는 376년 탁발십익건의 치세에 전진의 부견에게 정복되어 일시 멸망했으나, 비수대전 이후의 혼란을 틈타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386년 재차 대왕을 칭하여 세력을 회복했다. 이로써 대나라가 다시 이어지나 했지만, 중흥 후 불과 1년이 지난 387년 탁발규는 국호를 위로 정하고 대군의 서북쪽 끝에 해당하는 성락 (후허하오터)을 수도로 삼았다.
388년 탁발규는 대군을 폐지하였고, 이후 10년 간의 전쟁을 통해 후연을 격파하며 하북을 정복하였다. 520년대 쇠퇴기에 접어든 북위는 육진의 난 전후로 대군을 재설치하였는데, 기존 대현 쪽이 아닌 서북쪽 평성 (다퉁) 인근에 치소를 두었다. 585년 수문제는 대군을 대주 (代州)로 개편하며 치소를 대현의 서남쪽 150km 지점인 현재의 다이현에 두었다. 대현 일대에는 대신 현 지명의 기원인 울주 혹은 위주 (蔚州)로 편성되었고[6] , 후주의 석경당이 요나라에 넘긴 연운 16주 중 하나였다. 명나라 대에 울주는 만리장성의 여러 변방 요새 도시 중 하나였고, 옛 대왕성의 서남쪽에 세워진 당시의 성벽이 현존하고 있다. 중대사가 많았던 고대와 달리 근대에 들어서 일대는 역사에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서쪽 10km 지점의 서고보 (西古堡)
샤오우타이산 (小五台山)
위주성 남문 위주 고성 답사기
위주 고루
위주 문묘
시내의 고찰인 석가사 (释迦寺)
시내의 고찰인 영엄사 (灵严寺)
대왕성 유적
위현 남쪽의 서전자량 (西甸子梁)
명대의 위주서 (위주 관아) 일대의 전경
장자커우의 그랜드 캐년이라 불리는 서전자량
1. 개요[편집]
蔚县
영어 Yu County
허베이성 장자커우시의 현. 인구는 약 47만명이다. 과거 대 (代)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중국 역사상 4차례[1] 있었던 대나라 및 한나라의 제후국인 대국의 수도이자 대군의 치소였다. 현재의 시가지는 명나라 대에 세워진 위주고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성내에는 옛 관아와 사찰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북쪽 8km 지점에 한대의 대왕성 (代王城) 유적이 남아있다.
2. 역사[편집]
전국시대 북적 계열의 대나라가 있었는데, 기원전 457년 진나라 (晉)의 권신 조양자에 의해 멸망하였다. 조양자 가문은 후일 조나라를 세웠고, 기원전 305년경 누번과 임호에 맞서던 조무령왕이 일대에 대군 (代郡)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 (秦)가 조나라를 멸하자, 왕자 조가는 잔당을 이끌고 대군으로 향하여 대왕 (代王)을 칭하였다. 이 대나라 역시 기원전 228년 진나라에 정복되었고, 일대에는 대현 (代縣)이 설치되어 대군의 치소가 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206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당시 조나라 왕실의 후예인 조헐이 대왕으로 봉해져 대나라가 재차 세워졌으나, 불과 2년 후 조헐이 정형 전투에서 한신의 배수진에 해하고 전사하며
2.1. 한나라의 제후국[편집]
대왕성진 (代王城镇)에 남아있는 한나라 대의 대왕성 성벽 유적
전한 건국 후 기원전 200년 유방은 형 유중을 대왕에 봉하였고, 이렇게 설립된 제후국 대나라는 백등산 전투로 강성해진 흉노의 위협에 맞서는 중책을 담당하였다.[2] 다만 유중은 얼마후 흉노가 침공하자 봉국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따라서 유방은 자신의 차남 유여의를 대왕에 봉하였다. 다만 기원전 198년 조왕 장오가 폐위된 후 유여의가 조왕이 되자 당시 6세였던 막내 동생 유항이 계승하였다. 다만 기원전 197년 진희 (陳豨)의 반란군이 대에 이르렀기에 유항은 3년 후에야 봉국을 접수할 수 있었다. 유방 사후 여후의 폭정 시기 숨죽이며 있던 유항은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고 후소제가 폐위되자 백관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니, 문경지치의 시작을 알린 한문제였다.
한문제는 기원전 178년, 차남 유무를 대왕에 봉했으나 2년 후 회양왕으로 전임시키고 삼남 유찬을 대왕에 봉하였다. 유무는 후일 (유중의 아들 유비가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의 진압에 있어 활약한다. 유잔은 이후로 대왕 직을 유지하다 기원전 161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유등은 31년간 재위한 후 기원전 132년 아들 유의에게 물려주었다. 한무제는 군국제의 약화를 위해 유씨 황족들을 경계하였고, 기원전 114년 대왕의 권력을 축소시켜 청하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기원전 94년 유의가 사망한 후 대군은 군현제의 일환으로 재차 대군으로 편성되었다. 후한 건국 후 광무제는 양한교체기에 한무제의 증손이자 황제를 칭했던 노방이 투항하자 서기 40년 그를 대왕에 봉하였다.
2.2. 후한 ~ 서진의 군현[편집]
이로써 한세기 반만에 대국이 부활했으나 불과 2년 후 노방은 광무제를 의심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흉노에 귀순하였다. 이로써 (한나라 하의) 대왕직은 완전히 철폐되었고, 유주 하의 대군으로 편성되었다. 동시에 대군의 치소는 후한 들어 고류 (高柳, 현 양가오현)로 이전되었으나 조위 시절 대현으로 돌아왔다. 진한대 대군은 산서 ~ 하북에 걸쳐 11 ~ 18개의 현을 통솔하였고 5만 7천 가구의 28만 인구를 거느렸다.
2.3. 북위의 전신[편집]
서진의 쇠퇴를 틈타 310년 대공 (代公)을 칭한 선비족 탁발부의 지도자 탁발의로는 5년 후, 영가의 난으로 망해가던[3] 진민제에게서 대왕으로 봉해졌다.[4] 이렇게 세워진 대나라[5] 는 376년 탁발십익건의 치세에 전진의 부견에게 정복되어 일시 멸망했으나, 비수대전 이후의 혼란을 틈타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386년 재차 대왕을 칭하여 세력을 회복했다. 이로써 대나라가 다시 이어지나 했지만, 중흥 후 불과 1년이 지난 387년 탁발규는 국호를 위로 정하고 대군의 서북쪽 끝에 해당하는 성락 (후허하오터)을 수도로 삼았다.
2.4. 수나라부터의 주현[편집]
388년 탁발규는 대군을 폐지하였고, 이후 10년 간의 전쟁을 통해 후연을 격파하며 하북을 정복하였다. 520년대 쇠퇴기에 접어든 북위는 육진의 난 전후로 대군을 재설치하였는데, 기존 대현 쪽이 아닌 서북쪽 평성 (다퉁) 인근에 치소를 두었다. 585년 수문제는 대군을 대주 (代州)로 개편하며 치소를 대현의 서남쪽 150km 지점인 현재의 다이현에 두었다. 대현 일대에는 대신 현 지명의 기원인 울주 혹은 위주 (蔚州)로 편성되었고[6] , 후주의 석경당이 요나라에 넘긴 연운 16주 중 하나였다. 명나라 대에 울주는 만리장성의 여러 변방 요새 도시 중 하나였고, 옛 대왕성의 서남쪽에 세워진 당시의 성벽이 현존하고 있다. 중대사가 많았던 고대와 달리 근대에 들어서 일대는 역사에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3. 볼거리[편집]
서쪽 10km 지점의 서고보 (西古堡)
샤오우타이산 (小五台山)
3.1. 위주고성[편집]
위주성 남문 위주 고성 답사기
3.1.1. 옥황각, 고루, 문묘[편집]
위주 고루
위주 문묘
3.1.2. 성내의 사찰[편집]
시내의 고찰인 석가사 (释迦寺)
시내의 고찰인 영엄사 (灵严寺)
3.2. 대왕성[편집]
대왕성 유적
3.3. 서전자량[편집]
위현 남쪽의 서전자량 (西甸子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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