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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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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웨스트민스터 성 베드로 참사회성당(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유명한 잉글랜드 국교회 성당이다. 영국 왕실 대관식 등의 장소로 쓰이거나 왕족/위인들의 무덤이 있으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바로 뒷편(동쪽)에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있다.
과거에는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회의 대수도원(Abbey)이었으나, 이후 헨리 8세에 의해 영국의 국교가 성공회로 바뀌고 그의 차녀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을 내쫓으며 현재의 형태로 바꾸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의 의도가 반영된 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보다는, Westerminster Abbey(웨스트민스터 수도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다만 한국에서는 성공회의 교세가 작아서인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대한성공회에서도 정식 한국어 명칭을 정하지는 않은 듯, 대한성공회 홈페이지에서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6] , '웨스트민스터 사원 성당' 등 명칭을 혼용하고 있다.
영국 왕실의 성당이자 영국 수도의 대표 성당으로서, 주교좌성당(cathedral)에 준하는 위상을 지녔지만 근원이 대수도원(abbey)이기 때문에 주교좌성당은 아니다. 성공회 런던교구[7] 의 주교좌성당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다만, 종교개혁기[8] 에는 런던교구에서 분할된 웨스트민스터교구[9] 의 주교좌성당으로 잠시 사용되었고, 이후 1550년 웨스트민스터교구가 창립 10년만에 런던교구로 재편입되었으나, 그 후 6년 더 런던교구의 공동주교좌성당의 기능을 수행했다.
현재는 영국의 성공회 성당들 중에서도 가장 고교회파에 속한다. 벽제대를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성공회 전례 중 가장 전통적인 형식으로 전례를 거행한다. 층계송이나 복음환호송도 성가대가 앵글리칸 찬트보다 그레고리오 성가로 부르는 경우가 제법 많다.
2. 역사[편집]
서기 170년 루키우스 왕의 어명으로 처음 교회가 세워졌고, 960년경 혹은 970년경 초에 성 던스턴이 베네딕토회의 수도자들을 위한 공동체를 세웠고, 1042년에서 1052년 사이 어느 해인가에 참회왕 에드워드가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세우기 시작하는 것으로 웨스트민스터의 역사가 시작된다.
13세기부터 16세기(1503)까지 지어졌다. 고딕 양식에 충실하게 지어졌다. 천장의 리브로 만들어진 워플 슬라브의 형태가 대단히 화려하다.
캔터베리 대성당, 세인트 폴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가톨릭 성당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원주인이던 가톨릭 베네딕토회를 축출하고 성공회가 차지하였다.
가장 최근에 열린 결혼식은 2011년 4월 29일에 거행된 윌리엄 왕자와 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식이었다.
3. 명칭[편집]
a large church with buildings next to it where monks and nuns live or used to live
-『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 'abbey' 항목
영어: Abbey
남자 아빠스나 여자 아빠스가 다스리는 수도원으로 보통 교회와 손님을 위한 집, 기숙사, 참사회 집회소, 연수회 등 일련의 건물들로 구성된다. 하느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은 여기서 회칙에 따라 일과 기도의 삶으로 하느님을 섬긴다.
-주비언 피터 랑 지음, 박영식 옮김, 『전례사전』 '대수도원' 항목
abbey는 베네딕도회 등의 대규모 수도원을 뜻하며,[10] 따라서 Westminster Abbey의 올바른 번역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이다. 비록 엘리자베스 1세가 1559년에 베네딕도회 수사들을 내쫓으면서 Royal Peculiar(국왕 직속)인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피터 참사회성당(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으로 바꾸긴 했으나, 가톨릭 베네딕도 수도원이였던 역사가 Westminster Abbey라는 이름으로 남은 것.
한국에서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성당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가 교통사고로 사망해 이곳에서 장례식이 열릴 당시, 조선일보에서 이 장례식을 다룬 기사로 사원이라고 적었다가 독자란에서 "성공회 신자인데, 사원이라면 힌두교 같은 사원을 떠오르니까 사원이 아닌 성당으로 적어달라"는 항의를 듣고 이후론 성당으로 쓴다고 한 적도 있다. 한국 여행객들에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인근에 가톨릭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이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택시기사에게 church라고 하면 대성당(cathedral)으로 가버리는 수도 있으니 반드시 abbey라고 할 것! 단어가 기억이 안 나면 웨스트민스터 궁전(palace, 국회의사당을 지칭)으로 가자고 해도 된다. 바로 옆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이 있으니까.
4. 20세기의 순교자 10인 조각상[편집]
1998년 서쪽 문 위쪽 외벽의 빈 벽감에 20세기에 순교한 대표적인 기독교 신자 10인의 조각상(성상)을 세웠다. 위 사진에 늘어서 있는 조각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홈페이지에 따르면, 조각상이 놓인 이 곳은 중세 이래로 조각상 없이 비어있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조각을 교체한 것은 아니다.# 성공회 신자들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에큐메니컬 신앙에 가장 적극적인 성공회답게 성공회에서 귀감이 될 만한 그리스도인들을 교파 상관없이 기리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개신교(침례회, 루터교회) 목사와 가톨릭 대주교, 수사신부, 정교회 수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해당 인물들은 왼쪽에서 오른쪽 순서로 다음과 같다.
- 막시밀리안 콜베 (Maximilian Maria Kolbe, 1894.1.8~1941.8.14) : 폴란드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제.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수감자를 대신해 죽음을 자청해 순교함.
- 만체 마세몰라 (Manche Masemola, 1913~1928)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성공회 신자. 성공회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피살당함.
- 자나니 루움 (Janani Jakaliya Luwum, 1922~1977.2.17) : 우간다의 성공회 대주교. 독재자 이디 아민에 반대하다 암살당함.
- 옐리자베타 표도르브나 대공비(Елизавет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1864.11.1~1918.7.18) [11] : 러시아 제국의 왕족이자 정교회 수녀. 남편과 사별한 후 수녀가 되어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여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나,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함.
-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1.15~1968.4.4) : 미국의 침례회 목사. 흑백차별 철폐와 공민권 운동을 펼치다가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암살당함.
- 오스카르 로메로 (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1917.8.15~1980.3.24) :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대주교. 엘살바도르를 지배 중인 군사정권에 항거하다 암살당함.
-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2.4~1945.4.9) : 독일의 루터교회 목사. 반나치 운동을 벌였으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전 직전 처형당함.
- 에스터 존(استر جون, 1929.12.14~1960.2.2) : 파키스탄의 수녀. 이슬람에서 개종 후 선교활동을 벌이다 과격 무슬림에게 피살당함.
- 루시안 타피에디(Lucian Tapiedi, 1921~1942) : 파푸아뉴기니의 성공회 교육자.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에 부역한 타 부족민에 의해 피살당함.
- 왕즈밍(王志明, 1907~1973.12.29) : 묘족 출신의 개신교회 목사. 문화대혁명 때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당함.
5. 무덤[편집]
영국 왕의 대관식, 결혼식, 장례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자 잉글랜드와 영국 왕의 장지(葬地)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특히 무덤으로써의 의미가 대단히 큰 곳이기도 하다. 성당 지하에 따로 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당 본당 내에 유해를 안치한다. 덕분에 다른 성당에 비하면 내부 공간이 복잡한 편이다.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비롯한 역대 왕은 물론이거니와 영국 총리들, 그리고 아이작 뉴턴를 비롯한 위인들의 무덤이 성당 곳곳에 있다.
성공회 교회이기는 하나 영국의 국가 영묘로서의 성격이 더 강한 곳이기 때문에 성공회 신자가 아닌 인물들도 많이 묻혀있고, 심지어 스티븐 호킹 같은 무신론자조차도 영국의 위인이라면 이곳에 안치될 수 있다.
이곳에 안장되었다가 사후에 무덤이 파괴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1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사망한지 약 3년 뒤인 1661년 1월 30일에 그를 증오하여 복수심에 불타던 찰스 2세가 명령을 내려 관을 꺼내고[12] 부관참시했다. 현재 올리버 크롬웰의 무덤이 있던 자리는 공석으로 비어있고, 그의 이름과 생몰년이 적힌 작은 석판만이 남아있다.
5.1. 무명 용사의 무덤[편집]
내부 바닥에는 1920년 11월 11일에 안장된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 영국 육군 전사자 중 한 명으로, 1차 대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대표하여 매장되기 위해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던 전후 발굴 유해들 가운데 선발되었다. 벨기에에서 발굴된 뒤 관에 안치한 유해들을 늘어놓고, 육군 장교 한 사람이 눈을 가린 채 몇 바퀴 돈 후 관들 사이로 지나가다 그중 하나에 손을 대는 방식으로 뽑았다. 이 무명 용사는 훗날 미국으로부터 참전한 모든 영국군을 대표하여 메달 오브 아너를 받았으며 무덤 근처 기둥에 훈장이 있다. 이 무덤은 전쟁에서 전사한 영국 군인 모두를 기리는 상징이며, 유럽 문화 특성상 성당 바닥에 안치된 다른 무덤은 밟아도 별 상관없지만[13] 이 무덤만은 밟는 게 금지라, 장례식을 할 때에도 관을 운구하는 사람들이 여기만은 피해서 걸어가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왕실 역시 예외가 아니다.
1923년 4월 26일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결혼식에서 엘리자베스가 입장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오빠 퍼거스를 추도하며 무명 용사의 무덤 위에 부케를 올렸는데, 이후 로열 웨딩이 있을 때마다 신부의 부케를 무명 용사의 무덤 위에 올려놓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2011년, 캐서린 미들턴의 부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영국 국빈 방문 때 참배한 적이 있다. 무덤 주변의 조화는 개양귀비로, 영국에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를 추도하는 꽃으로 지정되어 있다.
5.2. 왕족[편집]
이곳에 묻힌 왕족들 중에서 군주는 굵은 붉은색 글씨로 강조했다.
5.3. 신랑(Nave)[편집]
5.4. 북쪽 익랑(North Transept)[편집]
5.5. 남쪽 익랑(South Transept)[편집]
이곳에는 사원 내부에서도 문인들이 많이 안장되어 있어서 통칭 '시인의 코너(Poets' Corner)'라고도 한다.
6. 로열 웨딩[편집]
영국(잉글랜드) 왕족은 볼드체로 표시.
7. 기타[편집]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제정한 곳이다.
- 영국과 미국에서는 위인들이 안장되는 영예로운 장소로 여겨진다.
- 호머 헐버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 윈스턴 처칠은 자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원에 묻히지 않았는데, 부모의 무덤 곁에 묻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후 무명용사의 무덤과 사원 정문 사이의 바닥 빈 공간에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라(REMEMBER WINSTON CHURCHILL)"는 문구가 새겨진 석판이 설치되어 그를 기리고 있다.
- 마이클 패러데이는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사후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장될 것을 제안했으나, 그에게 제안된 대부분의 혜택을 포함해 사양했다.
-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찰스 다윈 역시 이곳에 묻혀 있다. 여기
- 프랑스의 작가이자 학자인 볼테르는 아이작 뉴턴이 국장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을 본 후 "영국에서는 일개 교수가 자신의 천직에 뛰어났단 이유만으로 위대한 왕처럼 묻히는 일이 벌어진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프랑스에 비해 영국은 과학을 중시했었고, 비교적 계급보다는 실리를 추구했었다는 이야기.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원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편 볼테르는 말년에 교회에 대한 비판을 했기 때문에 파리에선 기독교식으로 매장되는 것이 거부되었고, 친구들이 몰래 상파뉴의 한 교회에 묻어야 했다. 훗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국립묘지로 개장된 팡테옹에 이장되었다.
- 사원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 중에는 배틀 오브 브리튼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조국을 구한 영국 공군 장병들을 기리기 위한 것도 있다.
- 성당 정면쪽의 신랑(nave)과 외부의 클로이스터(회랑)는 입장이 무료이지만, 성당 안쪽인 성가대석(choirs) 등은 입장료가 20파운드 이상이다. 실내에서의 촬영은 금지이며, 클로이스터 근처는 사유지라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매표소에서 요청시 음성 안내 기기를 대여해 주는데, 일본어 등 여러 언어가 녹음돼 있다. 한국어는 없다.
- 역사유적이기에 앞서 그리스도교회의 성당이므로 매주 일요일 성공회의 미사/예배에 해당하는 감사성찬례[49] 나 성무일과(아침기도와 저녁기도)에 참석할 수 있다. 장엄하기로 유명한 감사성찬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고 싶으면 일요일 오전 11:15 감사성찬례에 참석하면 된다.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어도 참석은 가능하며, 양 팔을 가슴에 교차하고 신자가 아님을 표시하고 있으면 사제가 축복기도를 해준다. 단, 영성체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포함)들만 참여가 가능하다. 참석 희망시 동쪽 문 앞에서 줄을 서야한다. 또 매일 저녁 5시에 "코랄 이븐송(choral evensong)"[50] 에도 참석할 수 있다.
- 런던 지하철 웨스트민스터 역과 세인트 제임스 파크 역에서 내리면 지척이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역은 관광객으로 매우 혼잡하다(...).
-
라이벌로는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이 있다. - 공식 트위터 계정도 있다
- 1947년 11월 20일 엘리자베스 2세가 필립 마운트배튼과 결혼했으며 1953년 6월 2일에는 대관식을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2022년 9월 19일, 엘리자베스 2세의 국장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말그대로 엘리자베스 2세의 인생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왔던 의미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8. 대중문화의 웨스트민스터 사원[편집]
- 다빈치 코드에서 비밀이 숨겨진 곳 중 하나로 나왔다.
- 런던 해즈 폴른에서 런던의 주요 건물들이 테러당할 때 함께 파괴되었다.
-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대관식 연습 장소로 나온다.
[1] 실제로는 좀 더 어두운 편. 그리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으며, 이 사진은 사원 측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 사진이다.[2] 2008년 수정[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6] 가톨릭의 웨스트민스터 대교구 주교좌 성당과 혼동하면 안된다.[7] 성공회 런던교구에 대응되는 가톨릭 교구가 웨스트민스터 대교구다. 그 웨스트민스터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은 바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8] 1540년~1550년.[9] 당시 웨스트민스터는 런던이 아닌 미들섹스 주에 속한 도시였다.[10] 가령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영어 위키백과에 Waegwan Abbey라는 표제어로 올라와 있다.[11] 독일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4세의 차녀.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언니이자, 필립공의 이모 할머니이다[12] 참고로 찰스 1세 처형 12주년이 바로 이날. 아들 찰스 2세가 작정하고 노린 셈.[13] 아무래도 하느님의 성전인 성당을 천국과 동일시하여, 천국 바로 곁에서 묻히고 싶은 염원으로 인해 성당 바닥에 안치되고 싶어하는 문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 무명 용사의 무덤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당 바닥에 만들어진 무덤들은 밟고 다녀도 상관없는데, 이건 안치된 고인이 아예 성당의 일부가 되었다는 식의 취급이다. 참고로, 당연하지만, 아무나 성당 내부에 안치될 수 없다!![14] 1623년 남편인 프리드리히 5세가 페르디난트 2세의 보헤미아 왕위를 찬탈하여 제국 파면 당함에 따라 선제후비의 지위 상실. 1648년 복권. 자세한 것은 30년 전쟁 참고. [15]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팔츠-짐메른계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로 프리드리히가 30년 전쟁 초반에 투른 백작 등 보헤미아 신교도에 의해 페르디난트 2세 대신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페르디난트 휘하 장수인 틸리 백작에게 패해서 망명한 후 이 사람은 영국으로 오게 된다. 이후 영국 내전에서 왕당파로 참전한다. 작위는 컴벌랜드 공작. 참고로 팔츠 선제후위는 1623년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가지만 1648년 30년 전쟁의 결과 다시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돌아온다. 이후 직계는 1685년 단절되고 종친인 팔츠-노이부르크 가문이 뒤를 잇는다. 그러나 이 집안도 1742년 단절되고 바이에른계도 1777년 단절됨에 따라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를 테오도르가 바이에른과 팔츠의 선제후로서 비텔스바흐의 두 영지를 통합한다. 이후 그가 후사 없이 죽어 12촌인 막시밀리안 요제프가 뒤를 잇고 지금까지 그의 후손들로 이어진다.[16] 윌리엄 3세의 어머니[17] 프리드리히 대왕의 약혼자였으나 파혼.[18] 영국 시계제조업의 아버지.[19] 미국 독립전쟁 때 스파이로 활동하던 중 대륙군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20]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조지 스티븐슨의 아들.[21] 영국 국회의사당을 재건한 사람으로 유명하다.[22] 근대 지질학의 체계를 정립해 '지질학의 아버지'로 불린다.[23] 할아버지 토마스 쿠츠로부터 쿠츠 은행의 주식 절반을 상속받아 갑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재산을 자선활동에 아낌없이 출연한 공로가 인정되어 1871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다.[24] 전자기학·열역학·지구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대서양 횡단 케이블의 부설을 성공시켰다. 절대온도의 단위인 켈빈이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으로 유명하다.[25]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원소붕괴와 방사화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26] 전자와 동위원소의 발견자로, 190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7명이 노벨상을 받았는데, 어니스트 러더퍼드도 톰슨의 제자였다.[27] 시드니 웨브의 아내.[28] '아파르트헤이트의 골칫거리'라고 불릴 정도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차별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29] 통칭 '대(大) 피트'.[30] 통칭 '소(小) 피트'.[31] 빈 회의의 영국측 대표인 캐슬레이 자작[32]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이끈 지도자.[33] 영어권 작가로는 처음으로 1907년 노벨문학상 수상.[34] 존 왕의 차남.[35] 헨리 3세의 차남.[36] 에드워드 1세의 차녀.[37] 에드워드 1세의 3녀.[38] 에드워드 4세의 장녀.[39]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40] 조지 5세의 장녀.[41] 훗날의 조지 6세[42] 조지 5세의 4남.[43] 훗날의 엘리자베스 2세[44] 조지 6세의 차녀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이다.[45] 조지 5세의 손녀이다. 켄트 공작 조지 왕자와 마리나 왕자비의 외동딸(둘째)[46] 엘리자베스 2세의 장녀.[47] 엘리자베스 2세의 차남.[48] 찰스 3세의 장남.[49] 사실 몇년 전까지 '미사'라 했었다.[50] '1. 그날의 시편 2. Magnificat(성모송가) 3. Nunc Dimittis(시므온송가) 4. 그날의 기도'를 기본 형태로 하는 '노래(Choral)로 드리는 저녁기도(evensong)'이다. 중세 초기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영국의 뿌리 깊은 전통으로, 국교회 성립 이후 텍스트가 영어로 번역되었다. 영국의 성공회&천주교 대성당에서 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