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어거스타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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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공주. 조지 2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의 장녀이자 조지 3세의 누나이다. 영국의 왕비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의 어머니이다.
2. 작위[편집]
- 웨일스의 어거스타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Augusta of Wales (1737년 8월 31일 ~ 1760년 10월 25일)
- 어거스타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Augusta (1760년 10월 25일 ~ 1764년 1월 16일)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Hereditary Duchess of Brunswick-Wolfenbüttel (1764년 1월 16일 ~ 1780년 3월 26일)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Brunswick-Lüneburg (1780년 3월 26일 ~ 1806년 11월 10일)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대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owager Duchess of Brunswick-Wolfenbüttel (1806년 11월 10일 ~ 1813년 3월 23일)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737년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웨일스 공 프레더릭과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의 첫 자식으로 태어났다. 어거스타는 영국의 왕족들 중에서 손꼽히게 특이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아우구스타가 어거스타를 가졌을 당시 웨일스 공 프레더릭은 산달이 가까워질 때까지 아내의 임신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다. 웨일스 공은 부모님인 조지 2세와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부부와 대단히 사이가 안 좋았는데, 국왕 부부는 왕세자 부부가 자식을 못 가진 상태에서 프레더릭을 폐하고 다른 아들을 웨일스 공 자리에 앉히고 싶어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왕비 안스바흐의 카롤리네는 큰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자신이 참관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정일보다 일찍 양수가 터지자,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 어머니가 있길 원하지 않은 웨일스 공은 부모님에게 아이가 나온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리고 피와 양수를 흘리는 아내를 마차에 태우고 멀리 떨어진 세인트 제임스 궁전으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웨일스 공 부부를 맞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은 당연히 아이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깨끗한 시트가 부족해 아우구스타는 식탁보 위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그렇게 어거스타는 영국 왕세자의 첫 아이로는 매우 형편없는 환경에서 태어났다.
뒤늦게 아이가 나온다는 소식을 접한 국왕 부부는 새벽 중에 어거스타를 보러갔다. 미워하는 자식의 아이인지라 어거스타는 조부모님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카롤리네 왕비는 손녀를 처음 봤을 때 "작고 못생긴 암컷 생쥐같은 아이"라며 어거스타를 비웃었다. 국왕 부부는 어거스타의 세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대리인들이 참관하게 했다.
어거스타에겐 8명의 동생들이 생겼다. 어거스타는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매우 활발한 성격의 소녀였다. 그녀는 음악과 춤, 연극을 매우 좋아했다. 바로 밑에 동생인 조지는 형제자매들 중에서 누나 어거스타를 가장 좋아했다.
3.2. 결혼[편집]
어거스타가 13살 때 아버지 웨일스 공이 사망하고 1760년에 조부 조지 2세가 사망하면서 동생 조지가 조지 3세로 즉위했다. 영국 국왕의 누나로써 어거스타는 매우 인기있는 신붓감 후보가 되었다.
1761년 즈음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와 어거스타의 혼담이 오고갔다. 그는 조지 1세의 증손자로, 어거스타와 6촌지간이었다. 1764년 1월 16일, 두 사람은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곧바로 브라운슈바이크로 향했다. 어거스타는 영국의 궁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소박한 브라운슈바이크의 저택에 크게 실망했다. 이후 몇년이 지나도 브라운슈바이크에 적응하지 못하고 영국식을 고집했다. 그러나 남편과 금슬이 좋아 자신들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다. 신혼 때는.
부부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첫 아들인 카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눈이 잘 안 보이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차남과 3남 또한 장애가 있었는데, 장남보다 상태가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들은 원인을 어거스타에게서 찾으며 그녀를 비난했다. 상심한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어거스타에게 싫증을 내고 애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거스타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영국에 보내는 서신에는 항상 자신이 잘 지내는 것처럼 썼다.
1780년에 남편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에 오르면서 공작부인이 되었다.
3.3. 말년[편집]
1806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고령의 나이에 프로이센군 원수로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휘했다. 공작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탄환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프랑스군에 점령당하고 무일푼이 된 어거스타는 과부가 된 며느리,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이듬해 동생 조지 3세가 해군 함선을 보내면서 어거스타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어거스타는 블랙히스의 몬태규 하우스에서 남편 웨일스 공 조지와 별거 중인 딸 웨일스 공비 카롤리네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모녀 사이는 금방 틀어져 근처에 브런즈윅 하우스로 이사를 가야 했다. 여생을 그곳에서 보낸 어거스타는 1813년에 향년 75세로 숨을 거두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4.2. 자녀[편집]
5. 여담[편집]
- 동생 조지 3세의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와 사이가 안 좋았다. 어거스타는 동생 조지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영국에서 인기가 있었기에 샤를로테에게 질투의 대상이었다. 샤를로테 왕비는 어거스타가 결혼 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일부러 형편없는 곳에 거주하게 하거나 동생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 차례 어거스타를 견제했다.
- 부모로써 최악이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들에 대한 보상심리였을지 몰라도 어거스타는 딸들을 좋은 집에 시집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두 딸들은 무도회에도 가지 못하고 늘 집에 박혀있어야 했으며, 그 어떤 남자와도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4]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살뜰한 것도 아니라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이가 나쁜 남편과 딸의 애정을 경쟁해 딸이 남편에게 잘해주면 화를 냈다고 한다. 불행히도 큰 딸 아우구스테는 훗날 뷔르템베르크의 초대 국왕이 되는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와 결혼했지만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요절했고, 둘째 딸 카롤리네는 외사촌인 조지 4세와 결혼했지만 신혼 때부터 사이는 최악에 치달았고 결혼 생활 내내 서로 으르렁거리다 별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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