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엘리자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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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황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딸이자 남동생 카를 6세의 대리인으로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스페인령 네덜란드-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왕족 여성 총독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며, 왕비나 왕대비로서 섭정한 것도, 여군주로서 즉위한 것도 아니면서 공식적으로 정치적 직책을 맡아 통치할 권리를 지녔던 18세기 여성 통치자의 드문 사례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아버지 레오폴트 1세와 어머니 엘레오노레 막달레네가 전염병을 피해 빈을 떠난 탓에 린츠에서 태어났다. 제2차 빈 공방전 등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을 겪으며 성장한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총명한 아이였으며 당시 통치 가문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도 부모로부터 큰 인정을 받았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배워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빈 대학교의 교수들과 수사적 논쟁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녀는 또한 유럽 정치에 정통하여 1698년에 왕가의 역사를 다룬 라틴어 서적을 쓰기도 하였다.
2.2. 총독 재임 이전[편집]
한 때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의 혼담이 고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손자에게 영향을 미쳐 프랑스의 이익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경계한 루이 14세의 우려로 결렬되었다. 그녀는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외모가 손상된데다 적합한 결혼 상대도 없어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1]
가문을 위한 정략결혼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대신 가문을 위한 정치적 직책을 맡을 운명이었다. 그녀는 스페인 및 티롤 총독으로도 고려되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재임할 수 없었고, 결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하게 되었다.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재임하기 이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이는 선대 총독이었던 사부아 공자 외젠의 정책 실패에 그 원인이 있었다. 외젠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직접 현지에서 통치하지는 못했고, 대신 전권대사인 프리에 후작 에르콜레 루도비코 투리네티를 내세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프리에 후작의 정책은 폭정으로 간주되어 현지인들로부터 큰 증오를 샀고, 프리에 후작을 지지하던 외젠은 결국 총독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군주였던 카를 6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의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군인 총독 대신 누나인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다음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그 결과 일개 미혼 여대공이었던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황제의 대리인인 총독으로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2.3. 총독 재임[편집]
1725년 새롭게 총독이 된 마리아 엘리자베트의 브뤼셀 입성은 여성이라는 그녀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의 높은 출신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지닌 남성으로서의 정치적 성별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을 지니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 따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황후가 아닌 황제처럼 대우받았다. 또한 그녀의 미덕이 영향을 받지 않는 한 행동, 의식, 외교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카를 6세로부터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았는데, 군주의 승인을 통해 독립적으로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권리, 각 지방의 총독을 임명할 권리, 메헬렌 대평의회 및 담보 공의회의 위원을 임명할 권리 등을 지니고 있었다.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권위적으로 통치하는 강력한 행정가이자 강한 책임감을 지닌 인기 있는 총독으로 묘사되었다. 그녀는 카를 6세가 명령한 조치들에 불복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관점을 내세워 설득하기도 하였다. 1718년 브뤼셀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을 사면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 등 그녀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관계 개선에 영향을 끼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정부의 권위를 희생시켜 중앙 권력을 확대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강한 신앙심을 지닌 인물로, 궁핍하고 병든 사람들을 복지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많은 돈을 썼고 종교 행사와 순례에 참여해 인기를 끌었다. 매년 성목요일이면 그녀는 가난한 노부인 12명의 발을 씻어 주고, 즐겁게 해 주고, 새 옷을 입혀주었다. 한편 편협한 종교관을 지니고 있어 이단으로 분류된 신앙을 강하게 탄압하기도 하였는데, 이단을 추방하고 검열을 강화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녀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등 외부의 분쟁으로부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유지된 평화 덕분에 무역과 산업은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나 카를 6세가 추진한 1713년 국사조칙 통과의 대가로 그녀는 성공적이었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1727년에 정지, 1731년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인 카를 6세와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1737년 카를 6세가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해임하고 로렌 공국을 잃은 사위 프란츠 슈테판을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 추진되었더라면 그녀는 총독직을 잃고 빈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결국 프란츠 슈테판이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이 되면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계속 통치하게 되었다.
카를 6세의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 계승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조카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였으나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741년 8월 26일 에노주 모를란벨츠에서 사망하였다. 그녀의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와 그녀의 남편 카를 알렉산더가 총독으로 재임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4. 기타[편집]
- 사망 장소이기도 한 마리몽트 성을 선호하여 자주 시간을 보냈고, 연회나 무도회보다는 사냥을 즐겼다.
- 조카이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후임 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 측에서는 마리아 엘리자베트에게 그닥 우호적이지 않았고, 그녀가 사망하기 전인 1741년 4월부터 카를 알렉산더를 공동 총독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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