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부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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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구의 주교좌성당인 부산대성당
1. 개요[편집]
성공회 부산교구 (聖公會 釜山敎區, Diocese of Busan)는 대한민국의 부산광역시와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와 경상남·북도, 제주특별자치도를 관할하는 성공회 교구이다.
2. 상세[편집]
부산교구는 1974년 대전교구로부터 분할되어, 한국에서 3번째로 설정된 성공회 교구이다. 가장 최근 설정된 교구인 동시에 한국관구 3개 교구 중 신자 수가 가장 적은 교구이기도 하며, 또한 후술하겠지만, 고교회 성향이 주를 이루는 서울교구와 대전교구에 비해 복음주의적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세이다.
3. 역대 교구장[편집]
자세한 내용은 성공회 부산교구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역사[편집]
4.1. 1890년 ~ 1965년[편집]
자세한 내용은 성공회 조선-한국교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1965년 ~ 1974년 6월[편집]
자세한 내용은 성공회 대전교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3. 1974년 6월 ~[편집]
5. 교구 조직[편집]
5.1. 교무국[편집]
5.2. 사회선교원[편집]
6. 관할구역[편집]
교무구가 2개밖에 없을 정도로 한국 성공회 내에서도 교세가 가장 열악한 지역으로, 성직자 숫자도 부족해 은퇴한 주교나 사제들을 관할사제로 모셔오는 경우가 많다.[8][9] 사실 경상도와 제주도, 이 두 지역들은 역사적 이유로[10] 성공회 뿐만 아니라 천주교와 다른 개신교 등 그리스도교 전반의 교세가 다른 지역보다 약한 지역이다. 다만, 부산교구가 겨우 6개의 교회로 시작한 것을 감안할 때, 이 정도면 성공회의 교세가 꽤 확장된 것이라 볼 수 있다.
6.1. 중앙교무구[편집]
6.2. 북부교무구[편집]
7. 여담[편집]
- 대한성공회 최초의 주교인 찰스 존 코프 주교[11] 가 1890년 인천시 제물포에 발을 내딛기 전이었던 1880년에 이미 캐나다성공회 소속이면서 일본성공회의 개척자였던 알렉산더 크로프트 쇼(Alexander Croft Shaw, 1846년 6월 26일 ~ 1902년 3월 13일) 신부가 부산에 교회를 세워 사목 하고 있었고,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존 리처드 울프(John Richard Wolfe) 신부도 부산에서 선교를 한 바 있다. 이후 부산을 비롯한 영남 지역은 자연스럽게 서울에 있는 주교[12] 의 치리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 대한성공회 최초의 여성 사제를 배출한 교구이다. 주인공은 민병옥 카타리나 신부. 민 신부는 1978년에 성공회 신학교를 졸업했으나, 당시에 여성은 서품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전도사 직분에만 머물렀고, 23년이 지난 2001년에야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그는 10년간 사제로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2011년에 은퇴했다.
- 대한성공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저교회·복음주의 성향을 많이 띠는 교구다. 대한성공회 내에서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변화에서 부산교구는 상대적으로 저교회파·복음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울교구와 대전교구에서는 성당에서 통성기도나 방언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곳 부산교구의 성당들은 종종 하는 편이다. 또한 흔한 일은 아니지만 평신도가 주교의 관면을 받아 감사성찬례에서 설교를 하기도 한다.[13]
8. 합의사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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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구헌장 제3절 '교구장 대리'(제77조~제80조)에 근거한 직책. 천주교의 '교구 총대리'에 해당하는 직위이나, 그보다는 권한이 적다. 관습상 '교구 총사제'라고도 하며, 교구 성직자원 의장이 겸직한다.[2] 대구성당 관할사제, 관구 성직자원의장 겸직[3] 교구장 주교 1명(박동신 오네시모), 은퇴주교 2명(이대용 요셉, 윤종모 솔로몬). 은퇴주교 중 초대 교구장 최철희 윌리암 주교는 해외 거주 중이므로 제외한다.[4] 은퇴사제 1명, 자급사제 1명, 수녀사제 1명 포함[5] 교적상의 교구민이다.[6] 관구[7] 교구[8] 대표적인 예로, 제주우정교회의 관리사제로 전 대전교구장 권희연 미카엘 주교를 모셔온 일.[9] 대한성공회는 천주교와 동일하게 교구에서 사제들을 각 교회에 내려보내는 파송제를 기본으로 하나, 2000년 당시 부산교구장이였던 이대용 요셉 주교의 건의로 관구헌장을 개정해 청빙제도를 추가했다.[10] 경상도는 신라부터 이어진 고찰이 많아 불교세가 강했고, 제주도는 신축민란과 4.3 사건 등을 겪으며,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불신 정서가 강해졌다.[부제] A B 부제임[협동] 협동사제임[관리] 관리사제임[자급] 자급사제임[프] 프란시스회 소속[담당] 담당사제[11] 한국명 고요한, 영국성공회 파송[12] 당시 한국성공회는 성공회 캔터베리관구 한국교구로써, 단일교구였다.[13] 1999년 시험 예식서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것으로, 대한성공회가 앵글로-가톨릭 혹은 고교회 일색이었던 시절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1999년 시험 예식서에서는 아예 주교의 관면조차 없이 평신도가 설교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