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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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노영의 노래(일본어:
1937년 9월에 발매된 일본 컬럼비아 레코드의 레코드인 '진군의 노래(進軍の歌)'의 B면 수록곡(#)이며, 야부우치 키이치로(薮内喜一郎, 1905년-1986년)가 작사하고, 고세키 유지(古関裕而, 1909년-1989년)가 작곡한 일본 제국의 군가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사기 고취를 위해 마이니치 신문이 군가의 가사를 공모[1] 했고, 혼다 노부야스(本多信寿)와 야부우치 키이치로[2] (薮内喜一郎)의 가사[3] 가 입선되었다. 그 중 야부우치의 작품을 시인 키타하라 하쿠슈[4] 와 작가 키쿠치 칸[5] 등이 '노영[6] 의 노래(露營の歌)'라고 제목을 붙이고, 작곡가 고세키 유지(古関裕而)가 곡을 붙여서 만들었다. 이 때, 코세키가 만주에서 돌아오던 도중 특급열차 내에서 신문을 읽다가 선정된 야부우치의 가사를 보고 몹시 마음에 들어, 아직 의뢰도 받지 않은 상황임에도 작곡했고, 도쿄에 도착한 그에게 일본 컬럼비아 레코드의 사원이 작곡을 의뢰하자 "그거라면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면서 만들어 두었던 악보를 넘겨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리하여 발매된 '진군의 노래' 레코드의 A면에는 '진군의 노래[7] '가, B면에는 '노영의 노래'가 담겨있었는데, B면에 수록됨에도 불구, '진군의 노래'를 뛰어넘는 인기로, 당대의 가요곡으로 자리매김했으며, A면과 B면을 합쳐 겨우 5분에 불과한 군가 레코드임에도 60만 장 이상이라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레코드 판매고를 자랑했다.
2. 가사[편집]
露営 の歌 (로에이노 우타)
노영의 노래
1절
勝 って来 るぞと勇 ましく(캇테 쿠루조토 이사마시쿠)
이기고 오겠노라 용감하게
誓 ってくにを出 たからは(치캇테 쿠니오 데타카라와)
맹세하고 고향을 떠나온 이상
手柄立 てずに死 なりょうか(테가라타테즈니 시나료우카)
전공도 못 세우고 죽을까보냐
進軍喇叭 きくたびに(신군랏파 키쿠타비니)
진군 나팔 들릴 때마다
瞼 に浮 かぶ旗 の波 (마부타니 우카부 하타노나미)
눈꺼풀에 밀려오는 깃발의 물결
2절
土 も草木 も火 と燃 える(츠지모 쿠사키모 히토모에루)
흙도 초목도 불타고 있는
果 てなき広野 踏 みわけて(하테나키 코오야 후미와케테)
끝없는 광야를 밟아나가며
進 む日 の丸 てつかぶと(스스무 히노마루 테츠카부토)
나아간다 일장기와 철투구
馬 のたてがみなでながら(우마노타테가미 나데나가라)
말 갈기를 쓰다듬으며
明日 の命 を誰 が知 る(아스노 이노치오 다레카시루)
내일의 생사는 그 누가 알랴
3절
弾 もタンクも銃剣 も(타마모 탕쿠모 쥬켄모)
탄환도 탱크도 총검도
暫 し露営 のくさまくら(시바시 로에이노 쿠사마쿠라)
쉬고가는 노영의 풀베개
夢 に出 て来 た父上 に(유메니 데테키타 치치우에니)
꿈에 나오신 아버지께서
死 んで還 れと励 まされ(신데카에레토 하게마사레)
죽어서 돌아오라 격려하시니
覚 めて睨 むは敵 の空 (사메테 니라무와 테키노소라)
깨어나 노려보는 적국의 하늘
4절
思 えば今日 の戦 いに(오모에바 쿄오노 타타카이니)
떠올려 보면 오늘 전투에서
朱 に染 まってにっこりと(아케니소맛테 닛코리토)
시뻘겋게 물들어 생긋하고
笑 って死 んだ戦友 が(와랏테 신다 센유우가)
웃으며 죽어간 전우가
天皇陛下万歳 と(텐노헤이카반자이토)
천황 폐하 만세 라고
残 した声 が忘 らりょか(노코시타 코에가 와스라료카)
남기고 간 목소리를 잊을 소냐
5절
戦 する身 はかねてから(이쿠사스루미와 카네테카라)
전쟁하는 자는 진작부터
捨 てる覚悟 でいるものを(스테루 카쿠고데 이루모노오)
죽을 각오는 해두고 있으니
鳴 いてくれるな草 の虫 (나이테 쿠레루나 쿠사노무시)
울어주지 말거라 풀벌레들아
東洋平和 の為 ならば(토요헤이와노 타메나라바)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면
何 の命 が惜 しかろう(난노 이노치가 오시카로오)
무슨 목숨이 아까우리요
3. 영상[편집]
4. 기타 판본[편집]
그 인기에 힘입어 여러 개사곡들이 만들어졌는데, 특히 사토 소노스케(佐藤惣之助)가 개사한 속・노영의 노래(続露営の歌), 사이죠 야소(西條八十)가 개사한 사쿠라 진군(桜進軍) 등이 유명하다.
0:00~3:01까지가 노영의 노래, 3:02~6:18까지가 속・노영의 노래, 이후 사쿠라 진군.
5. 여담[편집]
- 당시 일본 내에서 가요곡으로 널리 불릴 정도로 인기 있었기에 일본 제국의 일부였던 조선, 대만 등지에도 소개되어서 제법 인지도를 쌓았으며, 특히 만주군-일본군 출신들이 즐겨 불렀다고 전해지며, 만주군 출신중 한명인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술을 마시고 기분좋게 취하면 일본 군가를 즐겨 불렀다고 하는데, 이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 곡이 발매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재향군인회, 보승회 등의 협조를 받아 1938년 7월, 쿄토 아라시야마(嵐山)에 '노영의 노래 기념비(露營の歌碑)'가 세워졌다. 서예에 소양이 있는 마쓰이 이와네 퇴역 대장[8] 이 노래의 첫 소절을 쓰고 음각해서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관리가 부실하여 이끼가 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