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룡(1934)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1934년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학교, 충남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이후 충남대학교 법학 강사를 역임하였다.
1963년 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민주당, 민중당 등의 야당에 몸담았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용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용태 후보와 민주통일당 박병배[2]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었다. 1977년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의 온건노선에 반발하여 신민당야당성회복투쟁위원회 공동의장 겸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해금되었으며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강창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7년 1월 홍사덕의 뒤를 이어 신한민주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통일민주당에서도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박충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참여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에 탈락하자 통일국민당 후보로 대전직할시 서구-유성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이재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사퇴한 김동주의 뒤를 이어 민주국민당 대표를 맡았으나, 득표율 미달로 인해 해산되었다.
2021년 시사오늘과 인터뷰를 가지며 정치권에서 경험한 여러 비화를 밝혔다. 그러면서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대권주자들에 대해서도 평을 내렸다. 자신이 충청 토박이임에도 윤석열 후보의 충청 대망론은 거품이라고 말했다. 이낙연 의원의 당 대표 당선에는 득 볼 게 아무것도 없다고 꼬집었고, 이재명에 대해서는 '변호사도 했고 성남시장도 했고 경기지사도 했는데, 어딘가 좀 부족하다 싶어.'라고 평했다. 한편 유승민 전 의원은 추진력 면에서 아쉽다고 평했다.#
3. 소속 정당[편집]
4. 선거 이력[편집]
5. 기타[편집]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총장을 그만둔 뒤 귀국할 때 헌정회에서 반기문이 차기 정권 잡는다고 들뜬 한편, 김태룡 의원만 유일하게 ‘거품이다’ ‘후보 등록도 못 할 거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 후에 반기문 총장이 진짜로 후보 출마를 단념하자 헌정회 내에서는 김태룡이가 점쟁이보다 낫다는 말이 돌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