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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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배우.
2. 배우 활동[편집]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 태생으로[16]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이후인 1963년 동아방송 1기, 1964년 동양방송 성우 공채 1기로 데뷔하였으나[17] 1969년에 MBC가 개국한 후 특채 탤런트로 텔레비전으로 정식 데뷔했다.
주로 박근형과 비슷하게 냉철한 재벌 총수 등을 많이 맡았는데 사랑과 진실, 청춘의 덫이 대표적이다. 단 박근형이 보통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나오는데 반해 김무생은 같은 높으신 분이어도 좀 더 감정이 있는 연기를 했다는 게 차이점. 또한 박근형의 경우는 1980년대 초까지 멜로 드라마에서 주인공, 즉 청년 역을 주로 맡은 반면 김무생은 실제 연령이 박근형과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노안 덕에 꽤 젊은 나이인 1970년대부터 중년이나 노역을 맡았다는 것도 차이점이다.[18]
하지만 높으신 분만 맡은 것도 아니라 서민적인 아버지 역도 많이 맡았으며 경찰특공대에서는 테러 조직 두목 역을 맡아서 간지폭풍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사극에도 많이 출연했으며 허준, 송시열, 임해군 등 다양한 인물들을 연기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역할은 단연 용의 눈물의 이성계와 조선왕조 오백년의 이순신이다. 가히 레전설급 연기로, '용의 눈물'에서는 태종 이방원역을 맡은 유동근과 막상막하의 연기대결을 벌였다. 그리고 제2공화국, 제3공화국에서는 장면 국무총리 역을 맡기도 하였다. 용의 눈물보다 앞서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도 이성계를 연기했으며, 그 영향 탓인지 그 이후 김무생은 이성계 전문배우가 되었다. 어떤 사극을 찍든 이성계역에는 거의 무조건 김무생이 배역을 맡다시피했다.[19] 용의 눈물이 한창 진행되던 때 내가 사는 이유에서는 찌질하고 몰염치한 아버지역을 맡아 연기했는데, 근엄하고 엄격한 태조 이성계와 너무나도 명백히 대비되었으며, 이 극과 극의 연기를 동시에 둘 다 잘했다는 것이 김무생의 역량을 보여준다.
3. 출연 작품[편집]
3.1. 영화[편집]
3.2. 드라마[편집]
4. 수상[편집]
5. 사망[편집]
2005년 4월 16일 오전 3시 30분,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폐렴 악화로 인해 향년 6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워낙 노역을 많이 맡았던 배우라 사망 당시 굉장히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졌으나, 동년배의 배우들이 여전히 현직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참 안타까운 죽음이었다.[28]
사후 10년 뒤, 배우자도 2015년 7월 4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12년 뒤에는 자신의 작은 아들 김주혁도 2017년 10월 30일 향년 45세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작은 아들과 배우자와 같이 고인이 되었다.
6. 여담[편집]
- 슬하에 아들만 둘을 뒀는데, 작은 아들이 배우 김주혁이다. 김주혁은 아버지가 반대를 하는 바람에 몰래 배우를 지망했다고 하며 김주혁 본인도 배우로서 성공했다. 김무생이 사망하기 두 달 전에 김주혁은 아버지와 대한화재 하우머치 광고에 출연했는데, 이 작품은 부자가 공동 출연한 유일한 사례였다.
- 이후 김주혁은 1박 2일 시간여행 특집에서 김무생에 대해 외로움을 보이실 때쯤 돌아가셨다고 회고하면서 아버지와 무언가를 많이 해보지 못한 게 매우 후회돼서 꼭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고 젊은 시절의 김무생과 자신이 합성된 사진을 받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마저도 미혼인채 사망함으로서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1박 2일 절친노트 특집에 의하면 김무생은 김주혁의 소속사 나무엑터스 김종도 대표에게 김주혁을 친동생처럼 대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주혁과 김종도는 정말 형동생 같은 사이라고 한다.
- 생전에 수석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인 김주혁이 1박 2일에서 회고하길, 맨날 아버지를 따라서 가족여행으로 놀러가면 강에 돌을 주우러 갔었고, 어렸을 때 돌을 줍는 것이 놀이였다고 말했으며 트렁크에 돌이 가득 채우고 올 정도였다고 밝혔다. 후에 1박 2일팀이 김주혁의 집에 갔을 때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돌을 보관 중인 것을 볼 수 있다.
- 사망 1년 전 2004년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에 있는 외삼촌을 만났다.
- 1976년 <집념>이라는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여담으로 아들인 김주혁도 30년 후인 2006년, 백상예술대상에서 프라하의 연인으로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으며, 세상을 떠난 1주기를 앞둔, 2018년 제55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그의 유작인 독전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30] 이로써, 두 부자가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 생전에 가정에서는 상당히 엄한 성격이었는데, 이는 김무생의 아버지가 한자를 가르치는 훈장님이었기 때문에, 예절 교육 등을 어릴 적부터 엄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는 농담도 잘하는 분위기 메이커였다고 한다.
- 60년대 이전 출생자 치고는 장신이었다. 그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아들인 김주혁도 키가 180으로 큰 편에 속하는데, 같이 찍은 투샷들을 보면 아들보단 작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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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동안 알려진 네이버 프로필상의 1943년 3월 16일생은 주민등록(호적)상의 생년월일인데 실제로는 1940년 3월 16일생이다. 배우 김용림이 배우 김무생과 동갑이라고 언급했다.[2] 묘에는 1943년 3월 16일 출생으로 기재되어있다.[3] 現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4] #에 따르면, 독곶리에서 태어나 대로리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대로리는 경주 김씨 집성촌이며, 인근의 대산리, 오지리, 대죽리, 화곡리 등에도 경주 김씨가 많이 산다.[5] 출신학교에서 알 수 있듯이 성장한 곳은 인천광역시 동구.[6] 차남 김주혁도 같은 자리에 안장되어 있다.[7] 묘에서 "慶州金六十二世" (경주 김씨 62대손)[8] 계성군파(鷄城君派)이다.[9] 묘: "慶州金六十世" (경주 김씨 60대손), "慶州金公東九" (경주 김공 동구), 1876년 ~ 1906년.[10] 묘: "密陽朴氏千代" (밀양 박씨 천대), 1879년 ~ 1966년.[11] 어머니의 동생이다. 현재 북한에서 거주 중.[12] 묘: "金海金氏義淑" (김해 김씨 의숙), 1947년 ~ 2015년[13] 마찬가지로 배우, 2017년 10월 30일에서 향년 45세 교통사고로 별세.[14] 現 대산초등학교[15] 아들 김주혁과 동문이다. 1박 2일에서 김주혁이 밝히길, 합격자 명단 발표 때 동행했다고 한다.[16] 태어난 것은 충남이지만 청소년기 학창시절은 인천광역시에서 보냈으며 동산고등학교 출신이다.[17] 당시 동기로는 유강진. 김종성 등이 있다. 직속 후배였던 배한성의 말로는 라디오 드라마에서 코믹한 조연 연기가 돋보였다고. 성우로서 가장 잘 알려진 배역은 TBC에서 방영한 서부극 외화 <보난자>의 '벤 카틀라이트'가 있다.[18] 사실 70년대 당시 30대부터는 중년 초입으로 여겨졌다는 걸 감안하면 김무생이 다소 노안인 것도 있지만 40대 들어서까지 미남형의 얼굴로 멜로를 소화하던 박근형이 꽤 특이한 케이스다. 75년 드라마에서 김무생이 허준 역할을 맡을 때 6살 많은 이순재가 스승 유의태 역할을 맡기도 했다.[19] 조선왕조 오백년보다도 훨씬 이전 드라마인 1967년 TBC에서 방영한 이성계(극본 신봉승)에도 김무생이 출연했지만, 이성계 역은 김성원이 연기하였다.[20] 충무로에서 오랜만에 중견~원로배우들이 주축인 영화를 제작해 화제였다.[21] 물론 여기서 이성계 배역을 맡은 게 아니다. 여기서의 이성계는 김성원이고 사람들은 이방원으로 추측 중이다. 본격적인 이성계는 16년 뒤인 1983년 MBC에서 만든 조선왕조 오백년의 첫 에피소드인 추동궁 마마에서 이성계 역을 맡았고 조선왕조 오백년. 그러나 이후 13년 뒤인 1996년 KBS에서 만든 용의 눈물에서도 같은 배역을 또 연기했다.[22] 21년 뒤, SBS 리메이크작에도 출연하여 같은 배역을 또 연기했다.[23] 김하나, 두나 자매의 할아버지. 아들(하나, 두나의 아버지) 역의 김용건보다 불과 6살 많다.[24] 용의 눈물의 조연출이었던 이교육 PD의 첫 연출작이었으며 이 인연으로 유동근도 함께 출연하였다.[25] 現 MBC 연기대상.[26] 유작이 SBS에서 방영된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였기 때문에 이를 기리며 수상.[27] 수상 당시 눈물의 수상소감을 전해 시상식장을 잠시 숙연하게 만들었다. 당해에 프라하의 연인이 흥했던 관계로 김주혁 본인도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28] 사실 용의 눈물 촬영 당시에도 건강 우려로 인해 초반만 나오기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29] 1984년 제23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사진이 걸려 있다.[30] 또한, 김주혁을 추모하는 뜻에서 특별상도 수상하였고, 이후에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도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