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빈 박씨(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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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6세기 초 조선 중종의 후궁.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의 생모이자 작서의 변으로 폐출 당한 불운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중종실록에 따르면 상주 지방의 사족 박수림(朴秀林)의 딸로 연산군 11년(1505) 채홍사 때문에 미색이 알려졌다. 그래서 이듬해(1506)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궁중에 들어와서 중종에게 총애를 받았다.
일설에는 박원종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박씨를 양녀로 삼아 후궁으로 들여보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박씨는 본관이 밀양이고 박원종은 순천이라 같은 집안도 아니었거니와, 박원종의 생질이 장경왕후였으므로 굳이 외부인을 양녀로 삼을 이유도 없었다.[1]
중종 4년(1509) 박씨는 아들 복성군[2] 을 낳았다. 중종은 여러 후궁 중에서도 첫 아들을 낳은 박씨를 총애하였다. 중종 10년(1515) 장경왕후가 미래의 인종을 낳고 엿새만에 숨을 거두자, 중종은 박씨를 새 왕비로 삼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신하들 중 정광필이 반대하고 나섰다.
정광필이 한 '미천한 출신'이라는 말부터가 경빈 박씨를 저격하는 표현이다.[3] 더군다나 이때 훗날 인종이 되는 장경왕후 소생의 원자가 있었으므로, 박씨가 왕비가 되면 원자보다 먼저 태어난 복성군과 서열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이 때문에 조정 내 분위기는 원자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미 아들을 낳은 후궁을 새 왕비로 책봉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귀결됐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경빈 박씨나 희빈 홍씨 같은 후궁들은 전부 왕비 후보에서 제외되고 중종의 계비로 문정왕후가 간택되었다.이보다 앞서 왕비 자리[坤位]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숙의 박씨(淑儀 朴氏)가 후궁 가운데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왕후[章敬]의 예를 따라 스스로 왕비 자리[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중략)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아뢰기를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 여성의 미덕)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7월 22일
중종 22년(1527) 작서의 변이 일어났을 때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고문을 동원하여 가혹하게 문초하여도 아무도 박씨가 범인이라고 증언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종은 박씨를 내치기로 결정하고 그해 4월 21일 복성군과 함께 궁궐에서 폐출하여 본가가 있는 상주로 유배를 보냈다. 아버지 박수림과 오라비 박인형(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등도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경빈이 폐출되고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그해 12월에 중종이 대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용하였다.
그러나 6년이 지나 중종 28년(1533)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그해 5월 23일 중종은 사사(賜死)를 명하였다. 이때 중종은 의녀 두 사람을 상주로 보내 사약을 내렸다. 사흘이 지나 그달 26일에는 복성군도 사사되고, 두 옹주도 작첩을 빼앗기고 서인이 되었다. 박씨의 첫째 딸 혜순옹주의 남편 김인경(金仁慶, 1515~83)은 변방으로 유배를 떠났고, 둘째 딸 혜정옹주의 남편 당성위 홍려(唐城尉 洪礪, ? ~ 1533)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복성군이 사사당한) 5월 26일에 먼저 사망했다. 작서의 변 당시 겨우 화를 피한 아버지와 오빠들도 이 때에 멀리 귀양을 떠났다.[4] 그야말로 경빈 박씨의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흐름과 변동에 대해서는 작서의 변 항목 참고.
중종 36년(1541) 세자(인종)가 중종에게 탄원하기를, "박씨가 요망한 일을 했더라도 미(복성군)가 알았겠습니까." 하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종은 미에게 복성군 신분을 되돌려주도록 허락하였고, 두 옹주 또한 신원해 주었다. 그러나 중종은 경빈 박씨-복성군 모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는 인정하지 않았고, 박씨를 공식적으로 신원해주었는지 또한 실록 상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당시 조정에서는 박씨와 복성군, 당성위 홍려 등이 억울하게 죽은 듯하긴 한데 증거는 없고, 임금의 체면 문제도 있으니 복성군과 옹주들의 신원을 되돌려주는 선에서 수습하자는 분위기였다.
3. 평가[편집]
요사이 외부에 들리는 말로는 박빈(朴嬪)이 국가에 공덕(功德)이 있지도 않으면서 지위가 1품(品)에 오르고 총애(寵愛)가 후궁들 중에 제일이라 하니, 신 등은 전하께서 사정에 치우쳐서 집안을 다스려가는 정사에 누덕(累德)이 될까 싶습니다.
대개 정배(正配)와 잉첩(媵妾), 저군(儲君)과 지서(支庶)는 상하의 구분이 하늘과 땅 같아 바꿀 수 없는 법인데, 만일 분한을 정하지 아니하여 낮은 자가 높은 이를 적대시하고 천한 자와 귀한 자를 나란하게 한다면, 능멸하고 참람한 짓을 하게 될 조짐이 이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참소하여 모함할 발단이 이로 말미암아 싹트게 되는 법이니, 진실로 나라를 가진 분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의리가 앞서면 은혜를 방치하게 되고 은혜가 지나치면 의리가 없어지는 법이니, 반드시 은혜 보이는 도리와 의리 지키는 도리를 둘다 남김없이 극진하게 해야 가법(家法)이 바로잡아지고 다스리는 도리가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중종실록》 중종 17년(1522) 6월 8일자 상소문 #
당시 대간들이나 실록을 기록한 사관이 비판할 정도로 중종에게 매우 총애받았지만, 그를 이용해 뇌물을 모으고 성품이 좋지 않아 작서의 변으로 폐출될 때에도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만 힘썼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가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시론(時論)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라고 했다.
《중종실록》 중종 22년(1527) 4월 26일 #
4. 기타[편집]
- 인터넷상에서는 흔히 작서의 변의 진범이 밝혀져 박씨와 복성군 모자가 억울함을 벗었다고 설명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을 주도하고 실행한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자(인종) 또한 중종에게 탄원하며 두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고는 설명하지 않고, 다만 미(복성군)의 딸이 불쌍하게 지내니까 자신이 바라보기 괴롭다고 중종의 동정심을 자극하고자 하였다.
- 흔히 인터넷상에서는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와 8살 차이가 난다는 설이 퍼져 있는데, 경빈의 생년이 기록에 전해지지 않아 정확하지 않은 정보이다. 경빈의 장남 복성군이 1509년생이라 1501년생인 문정왕후보다 8살 어린데, 여기에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중종반정 직후에 함께 후궁으로 입궐한 장경왕후와 희빈 홍씨가 각각 1491년, 1494년생임을 감안하다면, 경빈 또한 그들과 비슷한 또래일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다. 문정왕후는 1501년생이므로 어림 잡아서 8살 차이가 나기는 한다.
5. 자녀[편집]
- 1남: 복성군(1509년 - 1533년)
- 1녀: 혜순옹주(惠順翁主, 1512년 - 1583년).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에게 하가. 1527년 작서의 변 당시 남편과 함께 직첩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1541년에야 복위되었다. 친자녀는 없고, 시동생 김원경(金遠慶)의 아들 김호수(金虎秀)를 양자로 들였다.
- 2녀: 혜정옹주(惠靜翁主, 1514년 - 1580년).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에게 하가하여 1녀를 낳았다. 홍여는 가작인두의 변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고, 혜정옹주와 홍씨 가문도 유배되는 등 화를 당했다가 오랜 세월 후에야 복권되었다. 혜정옹주의 딸은 윤임의 손자 윤호(尹琥)와 결혼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풍란에서는 배우 나종미와 박원숙이 연기했다. 나름 포스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문정왕후(김혜자 분)와 대립한다. 여담으로 원래는 나종미가 배역을 맡았다가 중간에 박원숙으로 갑자기 배우가 바뀌었는데 이유인 즉, 나종미의 얼굴이 동안이라 노인 분장이 힘들어 김혜자가 맡은 문정왕후와 맞서는 역할로는 약하기 때문이며 나종미의 영화 촬영으로 인해 오래 지방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차 시기가 6월 초인데 경빈 박씨는 6월 말까지 출연할 예정이었기에 하차를 얼마 앞두어 교체함을 두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
- 1995년 KBS 드라마 〈조광조〉에서는 배우 김성령[5] 이 연기했다. 꽤나 앙칼지고 야심있는 후궁으로 묘사되었는데 본래 한미한 가문 출신이란 사실을 컴플렉스로 느끼고 있으며 그 때문에 본인의 친모가 본인을 만나러 궁으로 찾아와도 문전박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매우 기가 센 모양인지(...) 종종 중종을 먼저 덮치려고 할 때도 많아 중종이 굉장히 무서워하는 후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경빈에 대한 기피증때문에 한동안 중종이 경빈의 처소를 찾지 않자 오히려 문정왕후가 좀 찾아가주라고 권유해 줄 정도.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6] 에서는 배우 도지원[7] [* 대사는 아니지만 <[여인천하>의 경빈 박씨 하면 나오는 특유의 연기가 있는데 바로 손톱으로 가구를 두들기는 것. 경빈이 초조할 때면 언제나 뾰족하게 기른 손톱으로 딱- 딱- 딱- 하는 소리를 내면서 탁자나 의자 등의 가구를 찍는데 이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이후 [[엄정화]] 등의 배우가 악녀 연기를 할 때 그것을 따라하는 [[몸짓언어|제스처]]를 보였었다.]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