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충주산성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충주시의 문화재]][[분류:충청북도의 기념물]][[분류:산성]][[분류:원삼국시대/성채]][[분류:성채/대한민국]][[분류:백제/건축]][[분류:중부내륙 산성군]] [include(틀:대한민국의 산성)] [include(틀:중부내륙 산성군)] ||<-5> [[파일:충청북도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ffffff 충청북도의 기념물}}}''' || || 30호 ||<|2> ← || '''제31호''' ||<|2> → || 32호 || || 청주 손병희 생가 || '''충주 충주산성''' ||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 ---- ||<-2> '''{{{#009a43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1호}}}''' || ||<-2> {{{#fff {{{+1 '''충주 충주산성'''}}}[br]{{{-1 忠州 忠州山城 | Chungjusanseong Fortress}}}}}}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충주 충주산성, 너비=100%, 높이=200px)]}}}|| ||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산24-1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면적''' || 1,165㎡ || || '''지정연도''' || 1980년 1월 9일 || || '''건축시기''' || [[삼국시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충주산성.jpg|width=100%]]}}} || || {{{#fff '''충주산성'''}}} || [목차] [clearfix] == 개요 == >충주산성은 충주시 안림동과 직동 및 목벌동에 걸쳐 있으며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성은 외축 내착형이며 산 정상을 이어 쌓아진 퇴뫼식 산성이다. [[대한민국]]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산성|성곽]]이다.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충주산성은 지정면적가 1.165m², 둘레가 약 1.2km, 성벽의 높이 6.5m로 경사가 급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약 300m정도이며, 일부는 최근에 복원 개축된 곳도 있다. == 역사 == 산성의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마고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충주산성은 「조선약사」의 편찬된 최초에 [[백제]] [[구이신왕]]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된다. 이와 관련된 전설도 있는데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고도 하였고 또는 475년 백제 개로왕이 성 아래 북쪽의 안림동에 이궁을 짓고 남산에 성을 쌓았다고 이야기가 있다.[*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21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후세에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그 후 이 산성이 충주산성이란 명칭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시대로 보인다. 고려의 국왕 [[고종(고려)|고종]] [[1253년]] [[9월]] 산성방호별감 김윤후가 지역 주민들과 단합하여 몽고의 4차 침공 때에 이 산성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고려가 승리하여 몽고군을 격퇴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 관련 유적 == 충북, 대전 일대는 소위 '''중원지역'''이라고 지칭되며 삼국시대 5-6세기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관방시설이 굉장히 많다. 중원지역의 삼국시대 산성들이 실제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가능성은 낮지만 '''[[중부내륙 산성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s-4.1.1|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등재''' 목록]]에 포함되었다. * 중부내륙 산성군 * [[삼년산성]] * [[상당산성]] * '''충주산성''' * [[장미산성]] * [[덕주산성]] * [[온달산성]] * [[미륵산성]] == 외부 링크 == * [[https://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https://ko.m.wikipedia.org/wiki/%25EC%25B6%25A9%25EC%25A3%25BC_%25EB%2582%25A8%25EC%2582%25B0%25EC%2584%25B1&ved=2ahUKEwiP79eky5z3AhW9yosBHRq-AWwQFnoECDkQAQ&usg=AOvVaw3J355UfLCCDRh2VfUrInbB|위키백과: 충주 남산성]] * [[https://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http://chungju.grandculture.net/chungju/toc/GC01900704&ved=2ahUKEwiP79eky5z3AhW9yosBHRq-AWwQFnoECEMQAQ&usg=AOvVaw09uNpSUt03ztIDBJGOgnAO|디지털충주문화대전: 충주 남산성]] * [[https://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3Fcontents_id%3DE0058211&ved=2ahUKEwiP79eky5z3AhW9yosBHRq-AWwQFnoECD0QAQ&usg=AOvVaw1Jt7BP66m877eTlhEmxlRJ|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주남산성(忠州南山城)]] ==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1호 ==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0310000,33&pageNo__=5_1_1_0&pageNo=1_1_2_0|문화재청 공식 홈페이지: 충주 충주산성 (忠州 忠州山城)]] || {{{#fff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31호}}} || ||충주산성은 충주시 안림동 산56-1과 직동산 24-1 및 목벌동 산54에 걸쳐 있으며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성은 외축 내착형이며 산 정상을 이어 쌓아진 테뫼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축성 재료는 석재를 고루 쌓아 전형적인 고식을 보이며 성 둘레는 1983년 충주시 조사에 의하면 1,145m이며 중간 중간이 무너지고 5개소에 775m의 성곽이 남아 있으며 성안의 넓이는 46,524㎡이고 성벽의 높이는 7∼8m에 이르고 있다. 성안에는 우물자리가 2개소 있는데 현재 물은 나지 않으며 동서의 산능선상에 문터가 있고 동쪽으로 수구가 있다. 또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조각 및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충주산성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몽고병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되며, 고려 고종 40년(1253) 9월 몽고가 제4차 침입을 감행하여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충주 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매복하여 몽고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포위당한지 70여일에 군량이 다하고 사기가 저하되자 방호별감, 승장, 김윤후가 전군과 관노까지를 격려하여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다음 해 2월에 김윤후를 감문위섭상장군으로 삼았고 4월에는 충주를 승격하여 국원경으로 하였다. 1254년 9월에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뿐 아니라 성안의 고려인이 열심히 싸우자 차라대도 물러갔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유린되었으나 충주산성은 끝내 수호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만에 축성하였다고 하며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도 한다. 개로왕이 바로 이 성 북쪽에 있는 안림동에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는 설과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된다. || == 둘러보기 == [include(틀:충청북도 충주시의 문화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