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강점기 (문단 편집) === 1940년대 === 1940년대가 되자,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양면전쟁, 총력전의 특성상 일본군의 전력이 부족해지자[* [[태평양 전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일제는 [[중일전쟁]]을 하던 중 [[석유]]를 얻기 위해 했던 일련의 행동들이 당시 중립을 고수하던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단일전선에서 이중전선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 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이 더 부족해지게 되면서 식민지와 본토를 가리지 않고 수탈이 극에 달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당시 일본은 이미 중국 전선에서 가용가능한 청년층의 상당수를 투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서 징병에 부적합한 40% 안팎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징집대상이 되었고, 그럼에도 인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인과 대만인을 징집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은 가급적 조선인이나 식민지인에게 무기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총구가 일제 자신들에게 이어져 반란이 일어날까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초기에는 지원이었으나 1944년 이후 강제징집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외지와 내지를 완전히 통합하는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인 [[민족말살정책]]을 강제로 수행하였다.[* 사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이긴 했으나 완전한 일본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외지인이라고 해서 별도로 구분했다. (타이완의 경우는 본도인) 이 시기부터는 아예 조선인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흡수하기 위해 강압적 동화정책을 실시하고, 장기적으로 정식 일본 시민권 부여를 통해 형식상 차별은 없애는 방안이 예정되어 있었다.] 본래 일제의 통치목적은 점진적인 영구병합이었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흡수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어 일본 기업이 더 활발하게 진출함은 물론, [[한국어]]를 사용하는 매체를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시행하였으며, 징병제까지 도입했다.[* 2등 신민 대우나 강제 징용, 학병 제도, 뒤이어 이뤄진 강제 징병 등은 모두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인으로 완전히 바꿔놓기 위해 이뤄진 계획의 일환이었다. 최유리의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에 따르면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세뇌해야만 제대로 된 군인으로 징집하여 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의무교육제도를 [[1946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지식인층과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친일로 전향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한민족은 꾸준히 점진적으로 번져왔던 영구병합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당면하게 되었다. 문화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물자 부족 및 [[한국어]] 매체 금지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제의 물자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은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용이나 징병 계획[* 헌법의 법제상 징병령(徵兵令)을 실시하여 국방의 의무를 부과하게 될 대상은 시민이고, 이 시민에게는 참정의 권리도 따라온다. 의도치 않게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해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일본제국헌법]]을 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를 늘리다 생긴 허점 중 하나였다. 한국인 뿐만 아니라 [[대만인]] 등에 대해서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해야 하고 전쟁이 불리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의회에 식민지를 위한 추가 의석까지 마련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제국의회 확대안은 [[쇼와 덴노]]가 계속 미루다가 패전과 함께 무산되었다.]도 군부의 강력한 반대를 거스르고[* 당시 일본 군부는 식민지 출신 장병들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여 내각의 조선인 징병 제안을 계속 거부하였다. 안 그래도 조선 본토, 중국에서 항일운동이 계속되는데, 조선인을 징병하여 사격술을 가르치고 총기를 쥐어준다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황 악화와 병력 부족에 따라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실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쟁의 성과가 나빠지자 일제는 전쟁물자 공급에 더욱 사력을 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공출제'''를 실시한다. 부설된 [[철도]] 선로를 도로 뜯어가고[* 이때 뜯긴 것이 [[안성선]] [[안성역]]-[[장호원역]] 구간과 [[경북선]] [[점촌역]]-[[안동역]] 구간. [[광복|해방]] 후 경북선은 점촌-[[영주역]]으로 노선이 바뀌면서 다시 [[안동]]까지 이어졌으나 안성선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1980년대]] 후반 나머지 구간도 폐선된다. 오늘날 [[안성 버스 37]]이 비슷한 선형을 가지고 있다.], 금속으로 된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은 물론, 징이나 [[꽹과리]] 같은 철제 악기를 비롯하여 낫이나 호미 또는 쟁기 같은 농기구, 심지어는 [[요강]]까지 빼앗아 갔다.[* 이 당시까지는 주로 [[변기]]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집안마다 요강을 썼다.] 그러나 [[미군]]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실제 공출된 물자가 일제 본토로 이송되지는 못하였고, 더 큰 문제는 물자를 거둬들인 후 다시 마구잡이로 분배하는 통에 시장과 유통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 극심한 혼란상황이 빚어졌다. [[태평양 전쟁]] 시기는 '''독립운동사의 암흑기 그 자체'''이다. 이미 1930년대를 경유하여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관술]]의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h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position=1&levelId=hn_026_0050_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지도하에]] [[경성 트로이카]] 활동가들이 1939년 만든 항일 비밀결사 [[경성콤그룹]][* 경성콤그룹은 [[이관술]]로 대표되는 [[이재유]] 그룹 출신이 1939년 1월 만든 비밀결사다. 박헌영이 만든 단체가 아니다. 박헌영은 1939년 12월 12일에야 경성콤그룹 지도자 이관술과 처음 만났고 1940년 2월에야 들어왔다.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이 들어오기 전 이관술이 최고지도자였던 시기 이미 전국의 각 지역에 책임자를 둔 광범위한 조직이었다.]은 1941년의 대규모 검거와 [[박헌영]]과의 연락 두절에도 불구하고 조직원들은 조직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조선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광복 순간까지 항거를 계속했다.[[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56/index.html|#]]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김태준(1905)|김태준]], 연안행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56/index.html|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식민지 조선 남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꽃[* 실제로 김경일 교수가 경성트로이카에 꽃이라는 표현을 쓴다.]이 [[경성트로이카]]-[[경성콤그룹]]이라면 식민지 조선 북부에는 [[이주하(1905)|이주하]]가 지도하는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이 있었다. >원산그룹사건은 혜산사건[* 혜산사건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사건이다. 나중에 북한 갑산파가 되는 세력과 관계있다고 한다. 일제 경찰은 갑산파보다 이주하 그룹을 훨씬 높게 평가하는 게 흥미로운 부분.]과 달리 코민테른·중국공산당·일본공산당 등과 전연 연락 없이 완전히 사상적 전과자에 의한 일군의 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을 기초로 했으며, 아래로부터 시작된 점에서 현저한 특색이 있다. 테러 행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수뇌부의 높은 사회주의 의식 수준, 인민전선전술의 정확한 파악, 그 운동 전개의 교묘한 점, 특히 대중 획득을 위한 적극적인 문서 활동의 전개 등은 혜산사건에 비할 바 아니고, 그 대상이 국경 산악지대의 의식수준이 낮은 농민과 원산 같은 수준 높은 노동자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현저히 운동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으로 이 점 주목된다. 만약에 원산의 이 운동이 1, 2년 더 지속되었더라면 원산철도 2천 수백여 명의 종업원은 물론이고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어느 때고 무장봉기에 동원할 준비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 >원산그룹에 대한 일제 경찰의 기록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8900|[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8회] 역사에서 사라진 원산그룹]] 1944년에 결성되었던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도 이 시기의 몇 안 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경성 부민관 폭파사건]]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4755&cid=46623&categoryId=46623|대구 학병 거부의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1423&cid=46623&categoryId=46623|평양 학병거부의거]]도 매우 희귀한 사건에 속한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사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는 교육과정에서는 위와 같이 무조건 독립운동이 암흑기이며 희귀하다고 배우지만, 아래와 같이 미래에는 교육 내용이 바뀔 수도 있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는 일대 혁명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15후 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역량이 일제 말기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일제 말기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점차 감소 경향을 띠며 1940년에 그 최저 상태를 기록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 양상이 역전되어, 그 '''증가''' 추세는 일제의 패망 시기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스딸린단,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1936년 12월에 검거된 이재유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것으로서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자신의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직전까지 줄곧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 >----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h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position=1&levelId=hn_026_0050_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 [[일본 제국]] 자체가 자체적인 모순과 한계로 인해 문제점을 맞이했듯 식민지 조선은 조선인의 독립 요구와 저항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일제도 완벽하게 억누르지는 못했는데[* 특히 일본 제국이 조선인을 열등하게 여기고 차별했으며 처우개선을 하지않고 무자비한 탄압으로만 나간 터라 일본 제국에 대한 조선인들의 적개심은 매우 높았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점점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본 제국의 과부하가 심해지기 시작하자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는 소문[* 개중에는 실제 전쟁 진행 양상을 거의 정확하게 맞힌 내용도 존재했다.]이 돌고 있었고 농촌, 도시 등 조선인 사회가 전시체제로 인한 징용과 물자 공출로 인해 피폐해져 가면서 붕괴 양상이 나타나는 등[* 일제 본토도 이와 비슷한 문제로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도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1945년이 되어서야 조선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을 검토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내용에 그마저도 시행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미군의 공습 역시 한반도까지 다다르기 시작했는데, 일본 본토의 대규모 전략폭격과는 달리 군수 시설이나 철도 등을 겨냥한 핀포인트 폭격이 주로 이루어졌다. 결국 [[만주 작전|만주를 넘어 현재의 북한 일부 지역에 소련군이 진격]]하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핵 두 발을 맞고]] 나서야 [[일본 제국|일본]]은 [[8월 15일]] 정오에 연합군 측에 [[옥음방송|무조건적인 항복]]을 했다. 한국은 [[8.15 광복]]을 맞았고 이 무렵 동시에 일제 치하 조선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 [[조선건국동맹]]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해 자체적으로 치안, 행정 활동에 들어갔으나,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지시로 건준에 내어주기로 되어 있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당시 경성부에서는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 지방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행정, 치안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조선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그해 9월 초 전권을 미 군정에게 이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인수하는 1945년 [[9월 8일]] 전까지 공식적으로는 계속하여 업무를 수행했고, [[존 하지]] 장군 휘하의 미군이 서울에 진공하고 [[이반 치스차코프]] 장군 휘하의 소련군이 평양에 진공하였으며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에서 조우한 이후인 9월 9일이 되고 나서야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35년간 지속되었던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잠시 동안의 신탁 통치 기간을 거쳐 비록 분단되었고 강대국들의 눈치를 봐야 했으나 한민족에 의한 자주적인 정부가 한반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일제의 수뇌부들은 이 시기에도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혼란 상태였던 [[조선]]에 위폐(가짜 화폐)를 뿌리며 인플레를 일으키는 등 조선의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었고, 일본에서 건너온 일반 일본인들을 반쯤 방기하고,[* 일본인들에 대한 과격한 폭력과 사회 혼란이 이어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광복]]의 사실을 몰랐거나 광복을 기뻐하거나 하는 국민보다 그 사실을 이용해서 득세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자와 미군정 체제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결탁한 친일파 그리고 귀국 전에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킨 일본인이 문제였다. 여러 군데서 폭력적인 일이 벌어졌을 거라 예상되지만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각각의 체제를 신봉하며 재집권하고 일본인을 공격하려기보다는 광복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농민과 인부가 대다수였다.] 미군에게는 여러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떠날 때까지도 끝까지 민폐를 끼치고 떠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일제강점기 체제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으며, 문화적, 사회적 악영향과 친일파 민족배반자에 얽힌 논란[* 특히 이 문제는 상당수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푸대접 논란과 종종 결부되기도 한다.]은 해소되기까지 갈 길이 멀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제는 황궁 이전을 포함해서, [[제국]]의 수도를 경기도 [[용인시]] 근처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 [[본토]]는 [[지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일본 제국]]의 영토였던 [[만주국]], [[조선]], [[일본 제국]]을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의 [[경기도]] 정도가 거리 관념으로 대략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수도를 용인시로 옮긴 다음, 대규모 [[인구]] 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지진에서 비교적 안전한 조선반도로 대거 이주시키고, [[조선인]]들은 [[만주]]로 강제로 추방시키는 안이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도시 건설 계획을 위한 측량 작업까지 했지만, 모두 알다시피, [[태평양 전쟁]]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자폭탄 2방을 맞고]], [[항복]]하면서 모든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되었다는 것.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pn=0&num=5375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