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강점기 (문단 편집) === 1930년대 === ||<-5><:> 한반도의 경제성장률[* 溝口敏行(Mizoguchi Toshiyuki)&梅村又次(Umemura Mataj), 구일본식민지경제통계 제3부 표8]|| ||<|2> 1930~1938||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전산업|| ||2.5%||13.9%||5.6%||4.9%|| 1931년 [[만주사변]]으로 촉발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되던 시기로, [[일본군]]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창설한 것이 1932년도이며 1932년에는 [[만주국]]이 수립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개시되었다. 대신 이러한 일본의 승승장구로 인해 국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가장 가혹했던 시기이기도하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국제반제동맹이 창립된 이후 반제동맹이라는 [[반제국주의]] 운동 단체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에서 반제동맹은 1930-193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반제동맹이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같은 국내 대중운동의 폭발과 일본의 만주침략에 따른 반전투쟁의 긴급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반제동맹은 주로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비밀 독서회를 만들어 활동가를 양성해 학교 단위로 반제동맹을 만든다. 학교 단위를 기초로 지역 단위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반제동맹 조선지부 학생부'를 완성하려고 했다. 학생 반제동맹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 활동가를 양성하는 훈련장이기도 했다.[* 출처: 박한용,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당대에 유명했던 반제동맹은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경성반제동맹)와 경성제대반제동맹(성대반제동맹)이 대표적이다. 경성반제동맹의 경우 [[이관술]], 이순근, 조정래가 지도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동맹활동개요.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동맹조직책동.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송국.jpg|width=100%]]}}}|| ||<-3>'''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를 보도한 기사 중 일부. 경성반제동맹은 대대적으로 대서특필된다. 최고 학부를 졸업한 엘리트가 참여했다는 점이 큰 관심을 끌었다.''' || 군국주의 특수로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과 같은 민족자본의 토양이 마련되기도 하였고[* 이 시기는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의 시대로 소위 민족말살기와 겹친다.], 총독부에 의해 [[농촌진흥운동]]과 전시체제 준비기에 남면북양 정책이 실시되고 전국적으로 농업생산량과 일본으로의 [[쌀]] 이출량이 증가하는 등 농촌과 경제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주식투자와 회사설립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 중 하나다. 물론 빈부격차가 매우 커서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 많은 건 여전했고 그에 따라서 문맹률 또한 매우 높았기에 하층민들에게는 탄압이 다소 줄어든 것을 빼면 큰 변화가 없었기는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조선의 무장 [[독립운동]]은 이제 한반도 내부와 완전히 괴리되어 1919년 수립된 [[상해임시정부]]는 1932년 [[이봉창]] 의사 의거, 제1차 상하이 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여파로 중국 내륙 깊숙한 곳인 항저우(1932)와 난징(1937)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당시 조선인은 임시정부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던 [[김학철(1916)|김학철]]은 [[임시정부]]에 합류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는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없어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했다.] 해외 무장투쟁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 1930년대 넘어오면서는 초반, [[만주사변]] 시기 [[지청천]], [[양세봉]] 등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독립군은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건국 이후 무장투쟁 활동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만주, 간도 일대 거주하던 조선인 출신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 중심으로 독립운동 전개가 되었으나, [[민생단 사건]]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30년대 후반 가면서는 간도의 조선인 출신 사회주의자들과 중국인들이 연합해 [[동북항일연군]] 결성해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이마저도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무렵 크게 타격받는다.] 반면 국내에서는 [[이재유]]의 [[경성 트로이카]]를 비롯한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을 주축으로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이 다양하게 벌어졌는데,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소작쟁의나[* 당시 지주들의 소작인 착취가 악랄할 정도로 심했으며 일본 제국도 지주들의 편을 들어 소작인을 탄압했다.], 노동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등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다. ||<:><-2>남북의 공업 생산규모(1940년기준)[* 조선경제연감 1948]|| ||<-2><:> 북한(55.9%)|| ||서부공업지대||6.1억 환|| ||북부공업지대||3.5억 환|| ||기타|| || ||<-2><:> 남한(44.1%)|| ||경인공업지대||3.5억 환|| ||영남공업지대||1.6억 환|| ||호남공업지대||1.4억 환|| ||삼척공업지대||1억 환|| ||기타|| || ||<-2><:> 6개 공업지대가 한반도 전체의 92.8%|| ||<:><-3> 1940년, 5인 이상의 공장 생산액[* 조선경제연감, 1949]|| || ||남한(47%)||북한(53%)|| ||경공업(46%)||70%||30%|| ||(요업)||20%||80%|| ||(전기가스)||36%||64%|| ||(식료품)||65%||35%|| ||(목공업)||65%||35%|| ||(기타)||72%||28%|| ||(방직공업)||85%||15%|| ||(인쇄제본)||89%||11%|| ||중화학공업(54%)||21%||79%|| ||(금속)||10%||90%|| ||(화학)||18%||20%|| ||(기계)||72%||28%|| 종업원 5인 이하의 가내공업을 모두 포함할 경우 1940년 공업 생산액의 55.9%는 북한에서 44.1%는 남한에서 생산되었으며, 1940년 일본 치하 대한민국의 산업비중은 서비스업을 제외할 때, 농업 42.8%, 공업 39.1%였다.[* 조선은행 조사부와 조선경제통계요람 1949]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무렵, 일본제국은 이듬해 4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표하여 전시체제기에 들어간다. [[초등학교]] 과정을 2년으로 압축한 형태인 [[간이학교]](簡易學校)가 이 시기에 생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