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강점기 (문단 편집) === 문화 분야 === [[경술국치]] 이후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고분]]들을 상대로 [[경주시|경주]]와 [[개성시|개성]]을 중심으로 고분 [[도굴]]을 자행했다. 그들은 무리를 짓고 버젓이 고분들을 파헤쳤는데 '''특히''' 개성은 [[고려]]왕조 오백 년의 도읍인 까닭에 [[왕릉(무덤)|왕릉]]을 비롯해 고대 고분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더욱이 이 고분들은 모두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수호하고 있었던 무덤들이었다. 그렇기에 분형뿐 아니라 내부의 시설에서 고려자기 같은 부장품은 거의 틀림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고분들을 마구 파헤치고 그 속의 부장품들을 약탈하는 만행이 버젓이 행해진 것이었다. [[일본]] 도굴꾼들의 도굴 과정을 목격한 [[조선인]]들은, 그들이 대략 [[마차]] 10대 분량의 부장품들을 싣고 갔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상상도 안 될 정도의 규모의 유물들이 도굴당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에 '''"일본의 침략이 마침내 우리 선조의 백골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고려청자]]들은 국내에 있는 수량의 배 이상이 일본에 있다고 추측되며 현재 한국의 [[국보]]급 [[유물]] 중 일정 부분은 일본의 도굴꾼들이 경매에 내놓은 것을 [[조선인]]이 구매하거나 개인적으로 그러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구매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이다. [[금관]] 항목을 보면 고구려 금관 이외에 일제강점기에 도굴당한 [[금관]]들이 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정확히 어떤 [[고분]]들이 파헤쳐졌는지 어떤 [[유물]]들을 가져갔는지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진 뒤 문화재 협정을 체결했지만,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대다수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만일 일본인들이 도굴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국보]]들이 상당수 추가되었을 것이다. 비단 유물들 뿐만 아니라, 건축물 또한 훼손되거나 헐리는 등 피해를 입은 곳이 많다. 대표적인 것은 한양 도성 내 궁궐들인데, [[경복궁]]의 경우 심각한 수준으로 전각들이 팔리고 헐려나갔다. 경복궁에서 과거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건물은 [[근정전]], [[근정문]], [[경회루]] 등 몇 채 되지 않으며,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은 엉뚱한 곳으로 이전되었다. 또, 궁궐을 행사장으로 활용하며 이런저런 행사를 개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궐 전면부를 통째로 밀어버리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경복궁 내에 듬성듬성 있는 녹지는 대부분 사라진 전각들의 터라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창경궁]]의 경우에는 궁궐 부지 내부에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이 들어섰고, [[덕수궁]]의 경우 화재 사건 이후 가뜩이나 줄어든 전각들이 일제강점기 들어 또다시 훼손되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는 서로 가까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사망하자마자 '종묘 관통 도로'(現 [[율곡로(서울)|율곡로]])를 개통했다. 순종이 생전에 완강히 반대했던 것을 그가 사망하니 '옳다구나' 하고 착공해버린 것이다. 결국 두 건물 사이가 끊겨버렸고, 이러한 형태는 2022년 율곡로가 지하 차도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위의 상황은 문화 침탈을 설명한 것이고, 그외 35년간 일제시대 동안엔 전반적으로 일어난 문화의 변화는 다양하다. 도시 지역에서는 본격적으로 20세기의 풍물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영화, 극장등 문화예술 분야의 활동이 점차 늘어났으며, 그외 [[자전거]], 정구([[테니스]]) 등의 스포츠, 라디오의 본격적인 유입등 구한말부터 시작된 서구문화의 유입이 활발하게 시작된 것이 이 시기 부터이다. 문학분야에서는 항일 정신을 담은 작품들, 친일 정신을 담은 작품들등 다양한 작품들이 나타났으며 현대한국문학이라고 부를수 있는 작품들이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배달문화의 발달로 설렁탕이 인기를 끌고, [[아지노모토]]같은 새로운 조미료가 인기를 끄는등 식문화의 변화도 나타났다. 이런 문화들은 주로 친일파,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이들이 누렸지만, 완벽히 이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도시 지역의 중산층은 어느정도 이런 변화를 누릴수 있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영화)|아리랑]]이다. 이런 문화들이 오직 친일파,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반일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진정하게 조선을 위한 근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골지역은 이런 변화를 거의 겪지 않았으며, 이들의 생활은 엉망진창이었던 구한말 조선의 상황에서 별로 나아지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