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제강점기 (문단 편집) ==== 교육의 차별 ==== ||<-5> 1944년 교육정도별 15세 이상 인구[[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IN4406&conn_path=I2|#]][[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IN4405&conn_path=I2|#]] [[http://www.wayto1945.sakura.ne.jp/data/1944census.htm|#]] || || || [[한국인|조선인]] || % || [[히키아게샤|일본인]] || % || ||[[무학#s-2.2|불취학]] ||11,397,840 ||'''__80.28__''' ||16,533 ||3.73 || ||[[서당|간서수]] ||905,468 ||6.38 ||- ||- || ||[[국민학교|국초퇴]] ||223,649 ||1.58 ||7,231 ||1.63 || ||[[국민학교|국초졸]] ||1,393,273 ||9.81 ||99,198 ||22.37 || ||[[국민학교|국고졸]] ||48,317 ||0.34 ||138,771 ||31.30 || ||[[구제중학교|중졸]] ||199,484 ||1.41 ||155,154 ||34.99 || ||[[구제전문학교|전문학교졸]] ||22,064 ||0.16 ||19,248 ||4.34 || ||[[제국대학|대졸]] ||7,374 ||0.05 ||7,230 ||1.63 || ||합계 ||14,197,469 ||100 ||443,365 ||100 || 일제는 처음부터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처럼 문명화된 지식인 양성 교육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일제는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정도의 조선인 인력이 필요했지, 고급 조선인 인력은 오히려 독립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조선교육령]]의 반포하에 조선인들에게 초중등교육 및 실업교육을 보급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인 학제는 1차 조선교육령(1911~1922)에서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C 남학교]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 실업학교와 전문학교로 편제되어 일본 내 학제와 차별되었고,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이 배제되고 일본어 보급이 강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 교원들은 잘 알려져있듯이 제복을 입고 검을 소지해서 조선인 학생들을 위력으로 압박했다. 총독부가 세운 공교육 체제 외의 [[사립학교]]들은 이미 1908년의 사립학교령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얻은 학교들만 있었으며, 1915년의 사립학교 규칙으로 인가 조건이 더 강화되어 민족교육은 힘들어졌다.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자체 대학 설립은 이뤄질 수 없었다. 조선에 보편적으로 있던 [[서당]]의 경우 처음에는 그대로 방치하여 신교육을 방지하는 데 쓰려고 했으나, 서당들에서 근대적 교육이 일기 시작하자 1918년 서당규칙을 만들어 허가제로 운영하게 하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쓰게 하여 민족교육을 탄압했다. [[3.1운동]] 이후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시행된 2차 조선교육령(1922~1938)으로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여자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까지 수업연한은 연장되었다. 그러나 3면 1교주의를 시행해서 학교 수가 턱도 없이 부족했고, 1교실에 60명씩 우겨 넣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조선어와 조선사를 필수과목으로 돌리긴 했으나 수업 시수가 적었고, 조선사는 [[식민사관]]으로 점철된 내용이었다. 게다가 일본어와 일본사, 일본지리의 수업 시수는 더 확대되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지만 조선인은 학생 총원의 3분의 1만 입학할 수 있었고 전공도 많지 않았다. 3차 조선교육령(1938~1943)은 [[내선일체]], 일선동조, 황국신민화 선전이 일어나던 1937년 [[중일전쟁]] 후부터 시행됐다. 내선일체의 구색을 맞추고 조선인들도 전쟁에 동원해야 했으므로 종전의 분리됐던 학제를 통일시켰다. 그리고 조선어는 수의과목으로 바꾸고 조선사와 조선지리 교육은 금지됐다. 또한 이때부터 [[황국신민서사]]를 강제로 외우게 만들었고 무사도 등 일본 정신교육을 강화했다. 1941년부터 심상소학교를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의미로 [[국민학교]]로 개칭하게 되는데, 국민학교는 [[광복]] 후에도 쓰이다가 지금의 [[초등학교]]로 개칭되게 된다. 4차 조선교육령(1943~1945)은 전시체제에 맞춰 조선인 학생들을 완전히 병사와 군수인력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업연한을 [[구제중학교|(구제)중학교]][*C] 4년, [[고등여학교]] 4년으로 줄였고, 그나마 수의과목으로 남아 있던 조선어까지 완전 폐지시켰다. 목도를 들고 군사훈련을 하는 체련과가 중시됐으며 학도근로령을 내려서 학생들을 군수산업에 동원시키거나 전쟁터에 징병했다. 징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도망쳐 광복군이 된 사례로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던 고 [[김준엽]] 교수가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으로 조선인들은 우민화되다가 공장 부품과 총알받이로 쓰인 것이며, 그 피해는 [[광복]] 후까지도 이어졌다. 일제의 우민화 교육과 식민사관이 얼마나 철저하고 효과적이었는지, 광복이 되어 기뻐서 [[태극기]]를 흔드는 어른들에게 학교를 다니던 어린이들이 일본을 자기 나라로 착각하고 왜 기뻐하냐며 슬퍼했다던 일화가 있을 정도다. 교육기회의 불평등만 봐도 [[광복|해방]] 때까지 36년 동안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 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단 12명'''에 불과했으며, 내지의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불과 '''2명뿐'''이었으니 당시 조선인들이 박사 학위를 딴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한국에 거주하는 인구 중 3 %만이 일본인이었으나 종합대학 졸업자의 50%, 단과대, 사범대, 기술전문대 졸업자의 47 %, 중등학교 졸업자의 44 %, 2년제 중학교 졸업자의 73%가 일본인이었다.[*박효선 (2010년 6월 24일). 《한국군의 평생교육》 1판. 학이시습. 16쪽] 당장 초등 교원의 40% 이상, 중등 교원의 과반수가 일본인이라서 해방 직후 부족한 교원을 충원하기 위해 각종 강습과, 임시교원양성과들을 설치해서 2~12개월 만에 교원을 마구잡이로 충원하는 판이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근대화 학습'이란 '매우 극소수'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1938년까지 일제는 내지와 조선의 교육과정에 차등을 두어, '''식민지 조선인들이 엘리트 계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이러다보니 학제가 달라, [[구제중학교]]가 아닌 [[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조선인은 당시 일제 본토 기준으론 '구제중학교 졸업자 미만'이었던 게 엄연한 현실이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등 역시 전문학교라기보다 '각급학교'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은 일반대학에 설치된 '예과 과정'을 밟아야만 제대로 된 대학생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예과 과정의 경우 이 당시 [[일본제국]]의 대학 학제 시스템이 예과 3년 - 본과 3년 과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거쳐야하는 과정이었다. 다만 [[제국대학]]의 경우 예과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각 지역에 있는 [[구제고등학교]]가 [[제국대학]]의 예과 역할을 했다. 그래서 주로 이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간 조선인들의 경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구제고등학교]]나 [[일본]] 내의 사립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릿쿄대학]], [[도시샤대학]] 등의 예과에 지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독 일제강점기 시절 유학생들의 출신이 OO대학 전문부·예과가 많은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상 국내에는 [[경성제국대학]] 말고 제대로 된 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많은 이들은 [[일본]]으로의 유학을 타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본토의 대학들의 경우 조선인에게 할당되는 티오가 쥐꼬리수준이었기때문에 일본인들과 경쟁하기에 매우 불리한 환경이기도 했다. 일제가 끝난 이후 [[문맹률]][*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illiteracy.do]],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2/03/2014020300054.html]] 일본은 오히려 조선인들의 교육을 방해했다고도 한다.]도 엄청나게 높았다. 사실 일제 내내 [[일본어]]만 할 줄 아는 조선인까지 포함하여 [[문맹률]]이 80%에서 변동이 거의 없었다. 즉 일본어를 말할 줄은 알아도 읽고 쓸 줄을 몰랐단 얘기다. 심지어 일제에 의해 사적으로 조선인들을 교육하던 1910년의 2, 241개 초등학교가 1940년에는 391개교가 되어 30년 동안 82%나 되는 사립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해당 출처에 의하면 국가적으로도 조선인들이 미개하다면서 교육을 기피한 모양. 당시 [[대만]] 등 다른 식민지들도 비슷한 문맹률을 보였다.[* [[http://la.koreatimes.com/article/20160607/991981]]] 일본인들은 국가에 의해 "조선인은 미개하다"라는 차별적 교육을 강요받았다.[*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51_0040&fileName=kn_051_0040.pdf]]] 문맹이 아닌 한글 수준도 이후 조사에 따르면 이름과 숫자만 알면 통과하는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52569]] ] 주로 친일파 양반들이나 중인들이 혜택의 수혜자라 일본으로부터 독립에 실패하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문맹 상태에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민주주의와 인권의 시대가 와서 점차 개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일단 그 악명높은 중국도 소수민족들 및 광동인 등 남방 한족들에게 [[표준중국어]]를 강요하긴 하지만 명분은 '''문맹 퇴치'''인 점을 보면, 일본의 조선인 어문정책은 그냥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인은 조선인 80%가 문맹일 때 2%만이 문맹이었다.[* [[https://globe.asahi.com/article/12738692]]] 다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보급은 꽤나 했다고 하나, 같은 식민지인인 대만인 80%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고 과장한 면도 있어서 알 수 없다. 친[[대만]] 성향 [[넷 우익]]의 역사 왜곡과는 달리 당시 대만인들 다수는 일본어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아서 기준이 낮거나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경우처럼 입말만 할 줄 알고 읽고 쓰기가 불가했을 수 있다. 대만인이 공식적으로 [[일본어]]를 잘하게 된 시기는 대만이 [[민주화]]되고 난 이후, [[친일]] 성향이 늘어나게 된 이후였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위의 문맹률이 보여주듯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면 전근대 [[문어체]] 일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대다수는 귀동냥을 통해서나 소학교(혹은 국민학교)에서 배운 구어체 회화만 가능한 수준이었다.[* [[옥음방송]]을 듣고서 방송 당일에 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에 해방 및 건국 이후, 한국에서는 일본어의 잔재를 어문생활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국가 및 민간 차원의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2세대(약 60년)도 되지 않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어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 차원의 기억으로 남은 채 공용어로서 생명력을 빠르게 잃었다.[* 그나마 가족끼리 돈 이야기나 [[부부싸움]] 등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는 일본어가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오까네가 나이(お金がない - 돈이 없어)'라든가, '우루사이 온나다나(煩い女だな - 귀찮은 여편네로군)' 등 해방전후 문학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본어 문장들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기록물이 방대하게 남아 있으나, 해독 가능자의 부족으로 인해 사료화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오역]] 역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공립학교의 수와 그 수학률의 증가를 보여주는 통계만을 두고 교육의 근대화를 주장하지만 정작 그 공립학교의 운영방식이 영리적이었으며 차별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급 인재들의 격차가 컸다는 점[* 심지어 그 조선시대에도 돈만 있으면 서당에 아이들을 보내 가르칠 수 있었다.]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이시하라 신타로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일제가 의무교육을 시켰으며 그것 때문에 시부야 사관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한 적 있는데 그 이후로 인터넷 상에서 일제 때 조부모가 일제덕분에 교육을 받았다는 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시부야 사관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