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기(백제) (문서 편집) [include(틀:한국의 전근대 역사서)]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愽士髙興, 始有書記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375) 11월 書記 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책.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이 저술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교과서]] 등에서는 간단히 역사서로 설명한다. 하지만 학계에는 '서기'라고 불리는 특정한 서적을 편찬했다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문자기록을 제도화했다고 보거나([[천관우]]) 문자기록을 제대로 남기기 시작했다고([[고병익]]) 여기는 학자도 있다. 한문기록의 맥락에서는 제목이 서기(書記)인 책을 만들었단 것이 아니라 '書와 記를 갖게 되었다.', 즉 이때에 비로소 역사를 기록하는 제도를 확립했단 뜻으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저술자 고흥이 [[낙랑군]] 내지 [[동진]] 계열 인물이라고 추정하는데, 371년 혹은 372년에 백제에 왔다면 375년 백제의 역사서를 편찬하기는 너무 이르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다. 반면 역사서로 보는 주요 연구가로는 [[이기백(1924)|이기백]]과 [[이병도]], [[신형식]] 그리고 [[김두진]] 등이 있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백제삼서]]라 불리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가 많이 인용되었다. 고흥의 서기로 시작된 백제의 역사기록이 백제삼서 편찬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다만 백제삼서는 [[백제기]]를 제외하면 375년 이후 기록이 다수 실렸기 때문에 고흥의 서기가 백제삼서 중 하나일 리는 없다. [[분류:한국의 역사책]][[분류:백제의 도서]]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서기, version=6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