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ay ( [0] => [include(틀: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include(틀:대한민국 역대 공군참모차장)] [include(틀:공군사관학교장)] ||<tablebordercolor=#128ad0><tablebgcolor=#FFFFFF,#191919><tablealign=right><tablewidth=400><-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28ad0, #34acf1 20%, #34acf1 80%, #128ad0)"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000080 대한민국 제9대 공군참모총장}}}]][br]{{{#000080 {{{+1 장지량}}}[br]張志良 | Chang Chi-ryang}}}'''}}}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jpg|width=100%]]}}} || ||<colbgcolor=#128AD1><|2> {{{#000080 '''출생'''}}} ||<(> [[1924년]] [[12월 15일]] || ||<(> [[전라남도]] [[나주시|나주군]][br](現 전라남도 나주시) || ||<|2> {{{#000080 '''사망'''}}} ||<(> [[2015년]] [[2월 2일]] (향년 90세) || ||<(>[[서울특별시]] || || {{{#000080 '''본관'''}}} ||<(> 흥덕 장씨 || || {{{#000080 '''호'''}}} ||<(> 석은(石隱) || || {{{#000080 '''직업'''}}} ||<(> 군인, 외교관 || ||<|2> {{{#000080 '''복무'''}}} ||<#f5f5f5,#222><(> [[대한민국 공군]] || ||<(> 1948년 ~ 1968년 || ||<|2> {{{#000080 '''재임기간'''}}} ||<#f5f5f5,#222><(> 제9대 공군참모총장 || ||<(> 1966년 8월 1일 ~ 1968년 8월 1일 || ||||<:><#FFF,#191919>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tablebgcolor=#fff,#191919><tablewidth=100%><colbgcolor=#128AD1> {{{#000080 '''배우자'''}}} ||<(> 송원희 || || {{{#000080 '''자녀'''}}} ||<(> [[장대환]] 등 3남 2녀 || || {{{#000080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60기[br][[육군사관학교]] {{{-2 (5기)}}} || || {{{#000080 '''최종계급'''}}} ||<(> 중장 || || {{{#000080 '''최종보직'''}}} ||<(> 공군참모총장 || || {{{#000080 '''주요보직'''}}} ||<(> 주미대사관 공군무관[br]공군본부 인사국장[br]공군본부 작전국장[br]제11전투비행단장[br]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br]공군사관학교장[br]공군참모차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 공군]]의 장성. 육사 동기였던 [[박원석(군인)|박원석]] [[중장]]에 이어 9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회장의 부친이자 장승준 매일경제신문 및 MBN 사장의 할아버지이며, 동향인 정진기 매경 창업주와는 사돈 관계이다. == 생애 == [[1924년]] [[12월 15일]] [[전라남도]] [[나주시|나주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21회)를 졸업한 뒤[* [[조상호(1926)|조상호]]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체육부장관]]이 동기동창이며, 훗날 그의 사돈이 될 정진기 매경 창업주가 학창시절 교생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 60기로 입학했고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8.15 해방|1945년 8월 15일]]에 졸업했다.[* 패전으로 [[일본군]]으로 [[임관]]은 하지 못 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해 육군소위로 임관했고 [[공군]]이 창설되자 옮겼다. 중등학교에서 일본 육사로 직행한 수재로, 생도시절에는 독립운동가로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던 "[[김일성]]"처럼[* 이때의 김일성은 북의 그 돼지라기 보단, 일본육사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경천]] 장군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생각으로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학교 성적도 꽤 우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육사에 진학해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었다는 주장은 본인이 자신의 회고록에서만 주장한 이야기로 그 신빙성이 높지 않다.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은 아래 [[장지량#s-3|논란]] 부분 참조.] 박 전 대통령은 장지량이 초급 장교였을때부터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좋게 보았기 때문에 웬만한 사안은 경청해주며 흔쾌히 들어주었다는 후문. [[김신조]]의 서울 침투 사건 당시 美 5공군 사령관 매키 중장[* Seth Jefferson McKee(1916.11.06 – 2016.12.26) 최종 계급은 대장.]과의 인연으로 김신조의 124부대 및 김일성 숙소의 위치 같은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1102&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228|미국의 극비 정보를 공유하는데 성공]]했으며,[*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우리 전투기를 급파해준 덕분에 도움을 받게 된 매키 중장이 보답한 것이라 한다. [[SR-71]]참고] 사건 후 대노한 박정희 前 대통령이 대대적인 보복을 지시하자, 실무진들과 공격계획을 입안하였다.[*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1117&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228|푸에블로호 피랍 사태]] 및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1121&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228|베트남 전쟁 국면과 맞물려 미국측이 만류]]했다고 한다.]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제10전투비행전대장, 공군본부 인사국장, 작전국장, [[제11전투비행단]]장, 공본 작전참모부장,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차장을 거쳐 1966년에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참모총장시절에는 지방 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을 헬기에 직접 모시고 수행하면서, 참모총장의 지위를 대장(大將)으로 격상시키고(후임부터 적용), 공군의 중요한 안건을 이른 시일 내에 현안으로 올려 공군을 지원하는데에 진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경쟁자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었는데, 개중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끼고 공격한 사람까지 있었지만 신중한 처신으로 살아남았으며, 전역하는 자리에서도 이 일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군인 신분으로 대한중석 회장을 지냈다. 1968년 이임했고 후임자는 대한민국 공군의 첫 대장인 [[김성룡(공군참모총장)|김성룡]] 대장이다. 전역 후에 에티오피아 대사, 필리핀 대사, 덴마크 대사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대한체육회]] 부회장, [[성우회]] 회장, 한국군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전장(戰場)과 기업 경영[* 복마전 양상을 띤 대한중석의 누적된 부정적 작태를 일신하고 흑자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양 쪽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인물로 상황판단과 응용력, 처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2월 2일]] 향년 91세로 별세.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676449.html|기사]] == 논란 == 말년에 [[국방일보]]에 회고를 연재했고 2006년에는 회고록인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를 출판[*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0607071808441|장지량 前총장 회고록 발간]]]했으나 여러 사실관계의 오류와 공적 가로채기, 그리고 자기 미화들로 논란을 빚었다. 먼저 [[해인사]] 폭격과 관련하여 장지량 장군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해인사 폭격을 막은 것 처럼 서술하였으나, 이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김영환(군인)|김영환]] 장군의 공적을 가로챈 것이었다. 이는 이후 공군본부 차원의 검증 과정에서 다른 공군 창군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관계가 드러났다.[* 해인사 공습을 지시받은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은 공비는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처벌을 각오하고 명령을 거부해서 [[팔만대장경]]을 지켜냈다. 그런데 장지량 장군(당시 중령)은 자신이 미국을 설득해서 폭격을 막아낸 것이라고 회고록에서 주장했고 문화재청에서도 이게 사실이라고 속아넘어간 것. 장지량 장군이 이를 주장한 것이 2001년이었는데 김영환 장군은 1954년에 항공기 사고로 순직했고 그 형인 [[김정렬(1917)|김정렬]] 장군도 1992년에 지병으로 사망하여 직접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미국에 살던 김정렬의 장녀가 뒤늦게 이를 알아차리고 바로 잡았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3699474#home|‘해인사 팔만대장경’ 살려낸 김영환 장군, 지하에서 통곡]]][* 해인사 공습과 관련해 장지량 장군의 자서전의 오류들이 논란을 일으키자 공군은 '역사자료 발굴위원회'를 구성해 사실관계 검증에 나섰으며, 다른 공군 창군 원로들인 [[김두만]], 윤응렬 장군 등의 증언을 통해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이와 관련해 윤응렬 장군이 작성한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showDetailPopup.do?rc_code=1310377&rc_rfile_no=200902603019&rc_ritem_no=000000000001#viewer |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고찰과 소견]], 공군 역사자료 발굴위원회의 종합보고서, 그리고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 <항공 징비록>을 참조할 것. [[https://blog.naver.com/isomis/100085617311|윤응렬 장군이 장지량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 또한 장지량 장군이 [[빨간 마후라#s-2|빨간 마후라]]를 고안했다는 서술도 있었으나 이 또한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이 빚은 오류로 잘못된 서술이다. 장지량 장군은 빨간 마후라를 회고록에서 본인이 고안한 것 처럼 증언하였으나 [[김두만]], 윤응렬 장군 등 다른 공군 창군 원로들은 공군 역사자료발굴위원회에서 이를 부정한 바 있다. [* 김영환 장군과 함께 복무한 공군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환 장군이 빨간 마후라를 하고 다녔던것은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에이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을 동경하여 붉은색의 머플러를 두르고 다닌것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김영환 장군은 짧은 챙모와 가죽부츠를 신고다니는등 [[루프트바페]]의 비행사처럼 꾸미고 다녔다고 한다. ]공군에서는 [[김영환(군인)|김영환]] 장군이 빨간 마후라를 고안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동 시대에 같이 근무한 창군 멤버 이강화 장군의 회고록을 참조하면 빨간 마후라에 대한 아이디어 제기 및 지시는 김영환 장군이 한 것 같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장지량 장군인 것 같다. 두 사람이 단장-부단장으로 근무했을 때의 일화이기 때문.] [[F-4 팬텀 II|F-4]] 도입과 관련해 미국이 [[F-104]]를 한국에 판매하려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도 마음이 기울었으나 자신이 맥도널 더글러스 사에 방문, F-4를 직접 탑승한 후 그 우수성을 알아보고 F-4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성사시켰다고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교차검증이 되지 않으며 다른 정황들과 일치하지 않는 등 신뢰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F-4 팬텀 II#s-7.2|F-4]] 문서 참조. 그 밖에 F-102가 록히드사의 물건이라고 언급한다거나[* F-102는 컨베이어사의 물건이다. 아마 [[F-104]]와 헷갈린듯 하다.] 영국과 이스라엘의 [[F-4 팬텀 II|F-4]] 도입 시기를 실제보다 빠르게 이야기 하는 등 사실관계의 오류들도 여럿 발견된다. 한마디로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은 [[대한민국 공군|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원로가 공군의 초창기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교차검증]]을 통해 확인된 여러 오류들로 인해 확인되지 않은 다른 내용들까지도 신뢰하기 어렵게 된 경우로 볼 수 있다. 장지량 장군은 김영환 장군 등 다른 공군 창군 원로들과 대한민국 공군을 세운 동료들이자 [[6.25 전쟁|한국전쟁]]에 참전한 전우로 막역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회고록으로 이러한 논란을 일으킨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이 빚은 논란들을 정리한 기사: [[https://leekihwan.khan.kr/entry/%EB%B9%A8%EA%B0%84-%EB%A7%88%ED%9B%84%EB%9D%BC-%ED%95%B4%EC%9D%B8%EC%82%AC-%ED%8F%AD%EA%B2%A9%EC%9D%84-%EA%B1%B0%EB%B6%80%ED%95%98%EB%8B%A4 |'빨간 마후라' 해인사 폭격을 거부하다]]] [[분류:1924년 출생]][[분류:2015년 사망]][[분류:흥덕 장씨]][[분류:나주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제10대 국회의원]][[분류:유신정우회 국회의원]][[분류:광주제일고등학교 출신]][[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 [include(틀:포크됨2, title=장지량, d=2023-12-15 14:23:02)]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