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ay ( [0] => [include(틀:역대 명 황제)]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9d537>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선덕제 관련 틀'''}}}}}} || ||<bgcolor=#ffffff,#1f2023> [1] =>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명 황태자)] ---- [include(틀:명의 황자)] ---- [include(틀:역대 교지(명) 지배자)]}}} || ||<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f9d537><tablebgcolor=#ffffff,#1f2023><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명 제5대 황제[br]{{{+1 선종 장황제 | 宣宗 章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선덕제 어진.jpg|width=100%]]}}} || ||<width=100> '''출생''' ||[[1399년]] [[2월 25일]] || || '''사망''' ||[[1435년]] [[1월 31일]] (향년 35세) || || '''능묘''' ||[[경릉]](景陵) || ||<|6> '''재위기간''' ||<bgcolor=#f9d537>'''{{{#670000 제5대 황제}}}''' || ||[[1425년]] [[6월 27일]] ~ [[1435년]] [[1월 31일]][br],,(9년 7개월 4일),, || ||<bgcolor=#56156b>'''{{{#f9d537 명 황태자}}}''' || ||[[1424년]] [[11월 1일]] ~ [[1425년]] [[6월 27일]][br],,(약 8개월),, || ||<bgcolor=#56156b>'''{{{#f9d537 명 황태손}}}''' || ||[[1411년]] [[11월 25일]] ~ [[1424년]] [[11월 1일]][br],,(약 13년),, || ||<-2><bgcolor=#fff,#1f2023><color=#373a3c,#dd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width=100> '''성씨''' ||[[주(성씨)|주(朱)]] || || '''휘''' ||첨기(瞻基) || || '''부모''' ||부황 [[홍희제|인종 소황제]][br]모후 성효소황후 || || '''배우자''' ||공양장황후(恭讓章皇后)[* 황태손비 출신인데, 딸만 낳고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궁에서 쫓겨났다.][br]효공장황후(孝恭章皇后)[* [[정통제]]의 어머니이다. 손태후라고 불린다. 이 여자도 후궁출신인데 가장 선덕제에게 총애를 많이 받았다. 나중에는 황후가 되었다.][br]효익황태후(孝翼皇太后)[* [[주기옥]]의 어머니이다. 오태후라고 불린다. 이 여인도 후궁 출신이었는데, 나중에는 황태후가 되었지만 아들 주기옥이 폐위 당하고 나서 선묘현비로 격하되었다. 나중에 [[남명]] [[홍광제]] 때 다시 황태후로 추존하였다.] || || '''묘호''' ||'''[[선종]](宣宗)''' || || '''시호''' ||헌천숭도영명신성흠문소무관인순효장황제[br](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昭武寬仁純孝章皇帝) || || '''연호''' ||선덕(宣德) ||}}}}}}}}} || [목차] [clearfix] == 개요 == [[명나라]] 제5대 [[황제]]. 묘호는 [[선종]], 시호는 헌천숭도영명신성흠문소무관인순효장황제(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昭武寬仁純孝章皇帝). 휘는 첨기(瞻基). [[홍희제]]의 장남. 연호는 선덕(宣德). == 생애 == [[파일:external/userimage6.360doc.com/21996041_201508081955460741.jpg]] 명나라의 [[명군]]으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과감했으며 무예에도 소질이 있어서 할아버지 영락제와 아버지 홍희제의 총애를 받았다. 출생 당시에는 작위도 없던 [[영락제|연왕 주체]]의 장손이자 [[홍희제|연왕세자 주고치]]의 장남이었으나, 할아버지가 [[정난의 변]]으로 황제가 되자 황위 계승권을 얻어 [[황태손]]에까지 책봉되었다. 특히 잦은 원정을 벌였던 영락제가 어린 손자 선덕제를 원정에 자주 대동할 정도였다고. 그에 비해 아버지 [[홍희제]]는 문(文)에 치우쳤던 스타일이라 영락제는 홍희제보다 손자 선덕제를 더 후계자로서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다. 선덕제가 [[황태손]]으로 책봉되었기에 [[주객전도|황태자였던 홍희제의 제위가 보장된 것으로 보일 정도.]] === 재위 === 1424년, [[영락제]]가 죽고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이듬해 바로 죽는 바람에 27세의 나이로 명나라 5대 황제에 올랐다. 그런데 선덕제가 즉위한 이듬해 숙부인 한왕(漢王) [[주고후]]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고후는 한 때 병약한 [[홍희제]] 대신 새로운 황태자가 될 뻔했으나, 성격이 너무 난폭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자칫하면 [[건문제]] 시즌 2를 맞을 뻔했으나 선덕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주고후의 반란을 진압했다. 주고후를 사로잡은 뒤에 자금성 내부에 소요성이라는 건물을 짓고 유폐해버렸다.[* 반역자를 살려둔 것 자체가 대단한 관용인데, 숙부인 것을 감안한 듯 하다. 하지만 문제는 주고후가 감사는커녕 폭력으로 대답하여 화를 초래한다.] 이후 선덕제는 자신의 숙부님의 근황이 궁금해 소요성에 행차하였는데,[* 주고후의 인성으로 황제한테 해를 끼치고도 남았으며 황제가 변을 당하는 것을 우려해 신하들이 소요성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신하들의 우려대로 주고후는 폭력을 일삼았다.] 그런데 주고후는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보는 앞에서 황제를 발로 차서 뒤로 넘어뜨렸다. 선덕제는 크게 분노하며 주고후를 붙잡아 구리 항아리에 집어넣었고, [[인간흉기]] 급으로 힘이 장사였던 숙부가 이 항아리의 뚜껑을 밀어젖히고 나오자 더욱 화가 나 다시 집어넣고 항아리를 장작 더미에 달궈 그를 [[통구이]]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주고후의 아들 10명도 모두 처형되었다. 이때 죽은 한왕 주고후의 아들은 다음과 같다. * 폐[[왕세자|세자]](廢世子) 첨기(瞻圻)[* [[홍희제|홍희]] 원년에 폐세자가 되어서 [[왕족|종실]]의 [[본관]]인 봉양(鳳陽)의 [[왕릉(무덤)|능묘]]를 [[능참봉|지키게 되었다.]]] * 세자 첨탄(瞻坦)[* 원래는 아들이 11명인데 장남 의장세자(懿莊世子) 첨학(瞻壑)이 요절해서 3남이던 첨탄이 세자로 책립되었다.] * 제양왕(濟陽王) 첨자(瞻垐) * 임치왕(臨淄王) 첨역(瞻域) * 치천왕(淄川王) 첨역(瞻墿) * 창악왕(昌樂王) 첨성(瞻垶) * 제동왕(齊東王) 첨평(瞻坪) * 임성왕(任城王) 첨도(瞻壔) * 해풍왕(海豐王) 첨장(瞻㙊)[* 土+長이며 뜻은 마당, 묏자리로 가는 길에 제사를 하다, 신을 모시는 곳이다. [[아래아 한글]]에서는 쓰여지지만 여기서는 안 쓰인다.] * 신태왕(新泰王) 첨방(瞻垹) 이들 중에 결혼하여 자손을 남긴 자들도 있지만, 아들은 두지 않았기에 그들의 자손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파일:external/a3.att.hudong.com/01300000260386123955383499820_s.jpg]] [[파일:external/a2.att.hudong.com/01300000260386123955387668516_s.jpg]] (선덕제의 그림) 재위 초반에 저런 [[막장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으나, 역시 선덕제는 뛰어났고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그는 총명했고 어린시절에 할아버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선덕제는 당시에 '3양(三楊)'이라 불렸던 양사기(楊士奇)·양영(楊榮)·양부(楊溥)를 필두로 한 명신들을 중용하여 현명하고 어진 정치를 펼쳐나갔다. 중국 황제치고는 대단히 검소하여 궁을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았고 지나친 진상 역시 금지했다. 또한 황무지 개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지원하여 농업 기술력을 발전시켰으며 많은 경작지를 확보했으며 재해가 발생한 지역은 조세를 감면해주는 조치를 해주었다. 선덕제 때 중국의 경작지와 농업 생산력이 원나라 시절의 2배로 증가했을 정도. 부정부패 척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어사 제도를 강화하여 백성에게 횡포를 일삼는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을 색출하여 처벌했다.[* 선덕제의 치세 때 관리에 대한 탄책 소추가 무려 247건이나 되었다.] 외정 면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올량합 부족[* 정확한 발음은 [[우량카이족|우량카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오랑캐]]라는 말의 어원이다. 올량합의 동태가 심상치않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석문에 나가있던 선덕제는 몸소 총으로 무장한 기병 3천을 통솔하여 올량합의 기병 1만을 격파하였다.]의 침공을 물리쳐 몽골이 명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했고, 대외 원정으로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한 영락제와는 달리 굳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내치에 올인하였기에[* 일례로 독립운동을 일으킨 베트남의 독립과 외왕내제를 묵인하며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영락제의 잦은 대외원정으로 명나라는 국가재정이 나빠지고 이에 불만을 품은 민란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사실 베트남의 독립은 명나라에서도 영토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신하들의 반대가 심하였기에 처음에는 선덕제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독립군의 저항으로 베트남에 주둔한 명군의 피해가 심각해졌고 선덕제가 보낸 토벌군이 베트남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하여 명은 더 이상 베트남을 다스릴수가 없었기에 선덕제와 신하들도 어쩔 수 없이 베트남 독립과 외왕내제를 인정하며 조공관계 형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에 끌려나가 희생되는 백성들도 적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관리들과 장군들이 백성들을 착취하고 군수품을 횡령하여 부정축재를 일삼은 사례가 대규모로 적발되었고 관련자들이 모두 처벌받는다.] 이런 선정으로 전임 홍희제의 묘호인 '인종'과 선덕제의 묘호인 '선종'을 따서 이 시대를 '인선의 치(仁宣之治)'라 부르며 명나라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하고 있다. 고구려 원정으로 말년에 실패한 당태종이나 안사의 난으로 몰락한 당현종, 내치는 좋았으나 외치는 굴욕적이던 북송과 달리 내치와 외치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기에 한족 왕조 역사상 최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예술 감각이 뛰어나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는데, 특히 그림은 전문 화가의 작품 못지 않게 생동감이 넘치는 수작(秀作)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북송]] [[송휘종|휘종]]과 쌍벽을 이룬다.[* 선덕제의 글씨와 그림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거기 보면 선덕제가 '모월 모일 '''심심해서''' 한 번 끄적여봄' 아니면 '모월 모일 '''심심해서''' 휘갈겨봄'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적어 놓곤 했다. 즉, 선덕제 본인은 자신의 작품을 '''단순한 낙서'''라 생각했는지도 모르는 대목(…). 역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송휘종|휘종]]이 예술에 심취해서 송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고평가받는다.] 그런 만큼 명나라의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재위 초 숙부 주고후 숙청 때 수 차례 숙부를 용서하려 했던 사연에서 알 수 있듯 황족들에게 기본적으로 굉장히 너그러운 편이었다. 영락제의 3남인 조왕 주고수는 둘째 형이 어찌 되었는지 듣고는 과거 백부와 숙부들이 숙청당하며 아버지가 반역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상황으로 몰렸듯 자신도 비슷한 처지로 비참한 말년을 맞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 안그래도 영락제의 노년기에 역모에 연루되어 심복들이 줄줄이 목이 달아나는 중에 큰형 주고치가 부황에게 간곡히 청하여 목숨만은 건졌던 일이 있었다. ]하였는데, 선덕제는 양사기의 조언을 따라 숙부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소인배들이 숙부를 중심으로 붕당을 결성하여 난리를 피울까 걱정된다며 관대한 처분을 보장하는 진솔한 의사를 전하며 병권을 자진 반납받음으로써 반란 우려를 없애고 숙부의 목숨도 보전할 수 있었다. 당숙 [[건문제]]가 스스로의 확고한 주관이 결여된 채 덤앤더머 총신들의 조언에 갈팡질팡하면서도 [[송양지인|필부의 인의로 어설픈 관용을 베풀다]] 숙부의 남경 한 방 러쉬에 [[인실좆]]을 당한 일에 비하면 선덕제의 대처는 [[조광윤]]의 [[배주석병권]]에 버금가는 슬기로운 일처리였다. 그러나 선덕제 역시 실책을 저질렀는데 환관을 교육시키는 내서당을 설립해 권한을 강화한 것이다. 이는 훗날 명나라에서 환관들이 나라를 좀먹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홍무제 때 환관이 글을 아는 게 보이면 축출당하거나 심지어 처형(!)까지 당했다는 것과는 180도 반대이다(…). 또 사냥과 더불어 [[귀뚜라미 싸움]]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서 싸움 잘하는 귀뚜라미를 찾으라고 내시들을 전국 각지로 보내고 이들에게 특혜를 부여한 탓에 각지에서 환관들의 횡포가 심했다. 어쨌든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으나, 1435년 재위 약 10년 만에 향년 35세로 아직 창창한 나이일 때 죽었다. 그가 죽은 후 명나라는 어린 [[정통제]]가 즉위하고 [[토목의 변]]을 겪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명나라 황실의 역사가 시작된다. 어진을 보면 알겠지만, 중국에서 최악의 [[관상]]으로 치는 들창코에 검은 피부를 가졌다. 고대 중국의 미의 상은 오뚝한 코에 흰 피부였고, 검은 피부는 추하다는 이미지였는데, 아버지 [[홍희제]]나, 할아버지 [[영락제]]와 달리 선덕제만 유독 피부색이 어둡다. 이후 아들인 [[정통제]]는 또 밝은 톤의 피부를 가진것을 보아 선덕제가 병을 앓고 있거나[* 특히 30대의 젊은 나이로 죽은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다. 조선의 초상화에서도 [[황달]]등으로 피부색이 거뭇거뭇하게 나온 작품이 있는 편이다.] 아니면 모계 쪽의 유전자로 보인다. 1429년, 조공관계인 [[류큐 왕국]]이 삼산을 통일하자 "내 마음에 맞는 사업이다. 자만하지 말고 나라를 안정시켜라." 는 유지를 내렸다. 서로 치고박고 싸우던 게 영 마음에 안 든 모양인 듯 하다.[* 실제로 영락제 시기에 그만 좀 싸우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 [[조명관계|조선과의 관계]] == 명군이지만 제후국인 [[조선]]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기도 하였는데, 사냥 마니아였던 그는 조선의 토종 매인 해동청을 줄기차게 요구하여 선덕제 치세에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바치기 바빴다. 또 선덕제는 조선의 [[두부]]를 유달리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 사신이 데려온 두부장인이 만든 두부를 맛본 뒤 이에 감탄하여 사신에게 벼슬을 내렸고, 몇 년 뒤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두부를 만들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때 조선 국왕은 [[세종대왕]]. 세종도 불평을 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선덕제 사후인 세종 중반에는 이런 불공평한 조공 행태가 많이 개선되었다.[* 조선이 조공무역으로 손해를 본 게 가장 두드러지는 시기는 조선 후기에 청나라에 조공할 때였지만 명나라에 대한 조공도 최소한 선덕제 때까지는 조선 측의 손해가 의외로 적지 않은 편이었다. [[조명관계]]가 한창 험악했던 [[홍무제]] 치세는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이와는 별개로 선덕제 본인은 조선에 대해 호의적이었는데 "조선이 지성으로 명을 섬겨 왔다."고 칭찬하면서 조공 품목에서 금은을 제외해달라는 세종의 요청을 들어주었고 그러면서 세종의 이복동생인 [[함녕군]]에게 도리어 은 100냥을 하사하는 등 조선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선덕제는 조선 여자를 후비로 들였는데 이 때 후비로 들어간 공신부인 한씨는[* 그녀가 죽은 후 성화제가 시호를 내리면서 쓴 묘표에는 이름이 계란(桂蘭)이라고 나온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501004_005|#]]] [[한확]]의 누이 동생으로, [[소혜왕후]]의 고모가 되며, 할아버지 [[영락제]]의 후궁 [[여비#s-2.2|강혜장숙여비 한씨]]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즉, 할아버지에게 후궁으로는 손아래 동서인 셈이다.(...) 언니가 영락제의 죽음과 함께 24살에 순장당했던 걸 아는 한씨는 누이들을 팔아 출세하려느냐면서 오빠인 한확을 원망하며 명나라로 갔다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래도 언니와 달리 오래 살아, [[토목의 변]]으로 [[성화제]]가 태자였다가 폐위되었던 시절 잘 보살펴준 공으로[[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7004_002|#]] [[성화제]]는 그녀를 극진히 모셨다. 명나라에서 수출을 금했던 활의 재료로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던 궁각(弓角)[* 물소뿔을 뜻한다. 조선에서는 물소가 자생하지 않아 전원 수입해서 썼기 때문. 당연히 군수품이다 보니 명나라가 무역 제재를 참 많이 걸었다. 그래서 사슴뿔이나 한우뿔을 쓰기도 했으며 일본이나 류큐와의 무역으로 들여오거나 아예 물소를 일본을 통해 구해와 직접 길러보기도 했다. 물소 기르기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으나 타이밍 맞춰서 조총이나 승자총통 같은 소형 화기 중시로 전략 패러다임이 바뀌며 중요도가 떨어져 버렸다.] 무역을 허락받는 데에 한씨의 도움이 있다는 실록의 기사가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12027_006|#]] == 대중매체에서 == 이 황제도 할아버지 [[영락제]]처럼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고, 즉위 초에 반란을 일으켰던 한왕 [[주고후]] 역시 [[무협지]]에 등장하는 일이 잦다. 2009년 드라마《정화하서양》에 등장한다. [[영락제]]의 등 위에서 말타기 놀이를 하며 첫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해서 영락제와 신료들에게서 기대를 받는다. 단독으로 영락제의 유언을 들었지만 [[홍희제]]가 싫어할 만한 내용이라 부자간에 다툼이 생길까 무서워 전하지 않았다. 홍희제가 [[정화(명나라)|정화]]를 암살하려 하자 선덕제는 암암리에 정화를 보호했다. 2019년 드라마《[[대명풍화]]》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말그대로 카리스마 있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걸물로 영락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 황제가 되었을 때는 카리스마와 위엄이 굉장해서 [[명군]]임을 제대로 보여주며 신하들이 무서워할 정도다. 그래서 숙부인 [[주고후]]가 그를 매우 경계하고 작중에서도 주고후와 사이가 매우 나쁘며 적대적인 관계다. 황태손이란 것을 숨기고 [[금의위]] 통령으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다만 아내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부하를 폭행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그런데 선덕제 역 배우인 [[https://www.google.com/search?q=%EC%A3%BC%EC%95%84%EB%AC%B8&rlz=1C1FHFK_koKR953KR953&oq=%EC%A3%BC%EC%95%84%EB%AC%B8+&aqs=chrome..69i57j0i512l4j0i5i30.2312j0j7&sourceid=chrome&ie=UTF-8|주야웬(주아문: 朱亚文)]]은[* 1984년생으로 상도 여러번 받은 중국의 인기 배우이다. 참고로 [[기혼자]]인데, 부인은 [[연상연하|1살 많은]] 1983년생인 중국 배우 심가니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2명의 딸을 두었다.] 위 어진에서의 퉁퉁하게 나온 실제 인물과 전혀 다르게 날씬하게 생긴 사람이다. ~~단, 성씨는 같은 朱씨다~~ 무엇보다 배우가 잘생기다보니 배역에 잘 어울린다는 호평을 받았다. 2022년 드라마《[[상식(드라마)|상식]]》에선 [[쉬카이]]가 선덕제를 맡았다. 아버지와 달리 무예가 출중하다. 2022년 드라마《산하월명》에 등장한다. 할아버지가 첨기라는 이름을 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첨기가 태자보다 훨씬 낫다."라고 평가했다. [[대체역사소설]]《[[블랙기업조선]]》에서는 조선의 카운터 파트 역으로 등장하는데, 원래 역사에서 [[만력제]]가 고려천자 소리 들었던 것과 다르게 이 소설 속에서는 선덕제가 고려천자 소리를 듣는다. 다만 게으르기로 소문났던 만력제와는 달리 세자 이향[* 훗날의 [[문종(조선)|문종]]이다.]과 [[세종대왕]]이 진행하는 국가 대개혁(경장)에 자극 받아서 여러 정책을 펼친다. 원 역사에서 검소하게 살았던 것을 반영한 듯 하다. 세자 이향의 능력을 탐내어 [[명나라]] 황실의 인척으로 혼인시키려고 슬쩍 타진하지만, 이향은 얼른 혼례를 진행하여 세자빈과 후궁 두 명까지 한꺼번에 들이게 된다.[* 후궁까지 한꺼번에 들임으로써 명나라 출신 후궁이 끼어들 자리를 원천봉쇄해 버린 것.] 그 뒤, [[조선]]의 국력이 커지자 위기 의식을 갖고 전쟁을 치르나 참패, 자신이 모든 책임을 가져가며 병으로 사망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명사)] ---- ||||||||||||<tablewidth=100%><tablebgcolor=#94153e><:> '''[[교지(명)|{{{#FFFFFF 대월 복속기의 역대 군주}}}]]''' || ||<bgcolor=#ffffff,#1f2023><:><width=30%> '''홍희 [[홍희제|주고치]]''' ||<bgcolor=#ffffff,#1f2023> {{{+1 ←}}} ||<bgcolor=#ffffff,#1f2023><:><width=30%> '''선덕 주첨기''' ||<bgcolor=#ffffff,#1f2023> {{{+1 →}}} ||<bgcolor=#ffffff,#1f2023><:><width=30%> '''[[레러이|여리]]([[대월]])''' || [[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명나라/황제]][[분류:1399년 출생]][[분류:1435년 사망]][[분류:중국의 화가]][[분류:베이징시 출신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선덕제, d=2023-12-03 06:50:33)]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