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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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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해시로고6.png
김해시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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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운동계열생몰년도훈격
강원석의열단? ~ ?
고영건3.1운동1887 ~ 1941애족장
김두갑일본방면1922 ~ 1944애족장
김만수3.1운동? ~ ?
김석암3.1운동1891 ~ 1959대통령표창
김선오3.1운동1865 ~ 1919애국장
김성득일본방면1923 ~ 1983애족장
김승래3.1운동? ~ ?
김승태3.1운동1878 ~ 1940애족장
김양산3.1운동? ~ ?
김원수3.1운동? ~ ?
김용이3.1운동1891 ~ 1919애국장
김용주3.1운동? ~ ?
김정태3.1운동1890 ~ 1958애족장
김종훤3.1운동1893 ~ 1948애족장
김헌규의병? ~ 1916애족장
노백용국내항일1885 ~ 1961건국포장
노상익만주방면1849 ~ 1941대통령표창
노상직파리서명1855 ~ 1931건국포장
노석호국내비밀
결사조직
1916 ~ 1944애족장
류진옥파리서명1871 ~ 1928건국포장
문위동국내항일1903 ~ 1976애족장
반양환광복군1924 ~ ?
박도백3.1운동1892 ~ 1939애족장
박재홍국내항일1903 ~ 1979애족장
박정수광복군? ~ ?애족장
배덕수국내항일1895 ~ 1970대통령표창
배동석3.1운동1889 ~ 1924애족장
배종철국내항일1895 ~ ?대통령표창
배치문1890 ~ 1942애국장
서석재3.1운동? ~ ?
서진령3.1운동1899 ~ 1971대통령표창
손명조3.1운동1884 ~ 1919애국장
송기송대한통의부
송상진1887 ~ 1967대통령표창
송세탁3.1운동1884 ~ 1939대통령표창
신수명일본방면1924 ~ 2007대통령표창
안무술3.1운동? ~ ?
안효구3.1운동
안효진3.1운동1874 ~ 1946건국포장
이강석3.1운동1879 ~ 1923애족장
이윤재조선어학회1888 ~ 1943독립장
이윤희노동운동
이진석3.1운동1896 ~ 1970애족장
이차수3.1운동? ~ ?
임학찬국내항일1890 ~ 1952건국포장
조영우3.1운동1887 ~ 1923애족장
조정환대한독립단1875 ~ 1926애족장
전용헌국내항일1890 ~ 1934건국포장
정적윤3.1운동? ~ ?
조동출3.1운동? ~ ?
조용명3.1운동? ~ ?
조항래3.1운동1884 ~ 1949애족장
최여봉국내항일1899 ~ 1970애족장
최현호3.1운동1890 ~ 1974애족장
한임길의병.미상? ~ ?애국장
허 발자금지원1874 ~ 1931
허웅언어학자, 한글학자1918 ~ 2004
허윤송광복군1919 ~ 1985애족장
허 평파리서명1882 ~ 1968
황찬숙국내항일1905 ~ 1970애족장
김해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과
김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함.
파일:건국훈장애족장약장.jpg파일:건국훈장애국장약장.jpg파일:건국훈장독립장약장.jpg






파일:external/people.phinf.naver.net/yonhapnews_33608269.jpg
출생1903년 1월 18일
경상남도 김해군 활천면 남역리
(현 경상남도 김해시 삼정동)[1]
사망1979년 6월 28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의료원
묘소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오산리 크리스찬메모리얼파크
종교불교(정토종)
상훈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대단히 복합적인 삶을 산 인물로, 일제 협력 행각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피의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으나 박열을 후원하거나 일제의 징용론에 반대하여 징역살이를 하는 등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재홍은 1903년 1월 18일 경상남도 김해군 활천면 남역리(현 김해시 삼정동)에서 박윤실(朴允實)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김해군 좌부면 북내동(현 김해시 서상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으며, ■순남(■順南)과 혼인하여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2] 광복 후 국민대학교 상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타이세이(大成)중학교와 나가사키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고#, 인삼행상을 하면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하였다.# 그러던 중 아나키스트 박열에게 감화되어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재정 자금을 후원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1926년 1월 22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오사카형무소에서 미결 기간까지 총 3년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에서 닛카쓰키네마 각 본부에 근무하다가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 부산 조선방직 인사과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대구부에서 영화관 대경관(大鏡館)을 설립하여 경영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이타현 벳푸시에 일선(日鮮)무역상회를 설립하고 경영하는 한편, 벳푸시 남부여관 조합장을 역임했다.

1931년 만주사변창춘시 거류민교포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1932년에는 제주도에 파견된 관동군에 종군하여 1등 통역관으로서 펑톈성·러허성·지린성·헤이룽장성 등 각 성을 전전했다.#[3]

이후 귀향하여 김해운수주식회사(金海運輸株式會社)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3년경 일제가 김해운수주식회사를 탈취하려 하자 그의 부당성에 항거하여 법정투쟁을 전개했으나 오히려 체포된 뒤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4년 8월 김해읍 부원리(현 김해시 부원동)에 김해주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였고#, 일선공애회(日鮮共愛會) 회장, 대일본신농회(大日本神農會) 간사장, 포크라니케나재류민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 후 1943년경 김해군에서 개최된 노무동원(勞務動員) 시국좌담회 회의장에서 한국인에 대한 강제징용안이 거론되자, 이에 분노한 그는 한국인의 강제 징용에 앞서 일본인이 먼저 징용에 솔선수범할 것을 주장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1944년 11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국가동원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8.15 광복일본으로 잠시 건너가 일본사회당 간부를 지내기도 했으나#, 귀국하고는 우익 정치인이 되어 대동청년단에 입단, 경상남도 조직부장을 역임하다가 탈단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무소속으로 경상남도 김해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후보를 사퇴하였다. 이후 대동신문사 경남지사장, 대한청년단 경남후원회 조직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2월 10일 애화회와 일선공애회 등으로, 반민특위피의자 명단에도 오르기도 했다.

道民(도민)의 視線(시선)이 集中(집중)한 가운데 活動(활동)을 開始(개시)한 反民特委(반민특위) 慶南(경남) 調査(조사)부에서는 그동안 各(각) 方面(방면)으로 銳意(예의)한 調査(조사)를 하야 오던 바 드디어 第一號(제일호) 令狀(영장)이 지난 七日(칠일) 發表(발표)되였는데 指名(지명)된 者(자)는 府內(부내) 光復洞(광복동) 二街(이가) 一二番地(일이번지) 高利貸金業者(고리대금업자)인 朴在洪(박재홍)(四七(47세))인데 同日(동일) 下午(하오) 十一時(십일시) 自宅(자택)에서 무難(난)히 逮捕(체포)하여 第十六區(제십육구) □□□ 留置場(유치장)에서 收監(수감)하얏는데 朴(박)은 日本(일본) 山口高商(야마구치고상)을 卒業(졸업) 中日戰爭時(중일전쟁시)는 倭軍(왜군)의 北支(북중국) 派遣(파견) 一等(일등) □□으로 活動(활동)하였고 그 當時(당시) □會長(회장)으로서 倭國警察(왜국경찰)의 忠實(충실)한 “압재비”였다고 하며 아즉도 日本人(일본인) 妻(처)를 다리고 있는 者(자)라 한다. #


그 해 대한국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취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국민당 최원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4]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최원호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 재직 중에 국회제출 건의서에 사용하겠다는 명목으로 동료 의원들의 날인을 받아 사적인 목적에 이용했다가 발각되어 1개월간 출석정지를 당하는 징계 처분을 받기도 했고, 대한국민당을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호헌동지회에 속하였다가 다시 무소속으로 속하였다.[5]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강종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한편 해양소년단 본부장, 대한민국민간외교협회 중앙위원, 실업동지회 경상남도 지부장, 세계연맹정치경제연구회 한국지부 이사 등을 역임하다가, 1961년 사기 혐의로 기소되었다.

1967년 민중당에 입당하여 중앙상임위원 및 김해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그해 6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후보를 사퇴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2가, 중구 중림동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 1979년 6월 28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재홍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48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갑)
무소속

후보 사퇴
1950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갑)
대한국민당

7,525표 (22.34%)낙선 (2위)
1954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갑)

12,044표 (32.93%)당선 (1위)초선
1958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갑)
무소속

2,336표 (6.04%)낙선 (3위)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후보 사퇴
[1] #[2] 장남 박정웅(朴正雄, 1926년생), 차남 박근(朴勤, 1928년생), 3남 박실(朴實, 1930년생), 4남 박방웅(朴芳雄, 1934년생).[3] 이 부분은 만주국 설립과 관동군에 일조하였으므로 친일행적이라 보아도 맞다는 시각이 있다.[4] 표차 60표에 득표율 0.18% 차이로 석패하였다.[5] 이즈음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2가로 이주하여 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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