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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익

덤프버전 : r20210301


파일:김해시로고6.png
김해시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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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운동계열생몰년도훈격
강원석의열단? ~ ?
고영건3.1운동1887 ~ 1941애족장
김두갑일본방면1922 ~ 1944애족장
김만수3.1운동? ~ ?
김석암3.1운동1891 ~ 1959대통령표창
김선오3.1운동1865 ~ 1919애국장
김성득일본방면1923 ~ 1983애족장
김승래3.1운동? ~ ?
김승태3.1운동1878 ~ 1940애족장
김양산3.1운동? ~ ?
김원수3.1운동? ~ ?
김용이3.1운동1891 ~ 1919애국장
김용주3.1운동? ~ ?
김정태3.1운동1890 ~ 1958애족장
김종훤3.1운동1893 ~ 1948애족장
김헌규의병? ~ 1916애족장
노백용국내항일1885 ~ 1961건국포장
노상익만주방면1849 ~ 1941대통령표창
노상직파리서명1855 ~ 1931건국포장
노석호국내비밀
결사조직
1916 ~ 1944애족장
류진옥파리서명1871 ~ 1928건국포장
문위동국내항일1903 ~ 1976애족장
반양환광복군1924 ~ ?
박도백3.1운동1892 ~ 1939애족장
박재홍국내항일1903 ~ 1979애족장
박정수광복군? ~ ?애족장
배덕수국내항일1895 ~ 1970대통령표창
배동석3.1운동1889 ~ 1924애족장
배종철국내항일1895 ~ ?대통령표창
배치문1890 ~ 1942애국장
서석재3.1운동? ~ ?
서진령3.1운동1899 ~ 1971대통령표창
손명조3.1운동1884 ~ 1919애국장
송기송대한통의부
송상진1887 ~ 1967대통령표창
송세탁3.1운동1884 ~ 1939대통령표창
신수명일본방면1924 ~ 2007대통령표창
안무술3.1운동? ~ ?
안효구3.1운동
안효진3.1운동1874 ~ 1946건국포장
이강석3.1운동1879 ~ 1923애족장
이윤재조선어학회1888 ~ 1943독립장
이윤희노동운동
이진석3.1운동1896 ~ 1970애족장
이차수3.1운동? ~ ?
임학찬국내항일1890 ~ 1952건국포장
조영우3.1운동1887 ~ 1923애족장
조정환대한독립단1875 ~ 1926애족장
전용헌국내항일1890 ~ 1934건국포장
정적윤3.1운동? ~ ?
조동출3.1운동? ~ ?
조용명3.1운동? ~ ?
조항래3.1운동1884 ~ 1949애족장
최여봉국내항일1899 ~ 1970애족장
최현호3.1운동1890 ~ 1974애족장
한임길의병.미상? ~ ?애국장
허 발자금지원1874 ~ 1931
허웅언어학자, 한글학자1918 ~ 2004
허윤송광복군1919 ~ 1985애족장
허 평파리서명1882 ~ 1968
황찬숙국내항일1905 ~ 1970애족장
김해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과
김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함.
파일:건국훈장애족장약장.jpg파일:건국훈장애국장약장.jpg파일:건국훈장독립장약장.jpg



파일:노상익.jpg
성명노상익(盧相益)
이명노교리(盧校理)
자 / 호치삼(致三) / 대눌(大訥)
본관광주 노씨
생몰1849년 11월 12일 ~ 1941년 9월 16일
출생지경상도 김해도호부 생림면 금곡리
(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1]
사망지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무릉리
매장지국립서울현충원 108실 178호
추서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노상직은 그의 친동생이다.

2. 생애[편집]


노상익은 1849년 11월 12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생림면 금곡리(현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에서 노필연(盧佖淵)[2]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82년(고종 19) 34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을과 1위 아원(亞元:장원 다음)으로 급제하여#[3] 4월 7일 가주서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이듬해인 1883년 2월 27일이 되어서야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884년 6월 7일 가주서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달 30일 품계가 6품에 올랐다.# 7월 11일에는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고 8월 10일에는 부사직#에 제수되었다.

1892년 5월 2일,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고#, 그해 7월 29일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1894년에는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904년 3월 26일에는 품계가 정3품으로 올랐다.# 1905년 5월 10일 홍문관시강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6월 2일 사직하였다.#[4]

그 후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성립된 후, 일제는 그해 11월 은사금을 여러 인사들에게 나눠줬다. 이때 밀양헌병대 소장이 그를 찾아와 "그대는 많은 사람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므로 천황께서 은총을 내리셨다."며 은사금을 받을 것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는 매국노들이 받아먹는 것이지 망국의 대부(大夫)가 어찌 이에 관여할 것인가. 만약에 다시 강요한다면 죽을 뿐이다."


1911년, 노상익은 서간도의 안동현 접리수(接梨樹) 서구(西溝)[5]로 망명해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다. 그는 안효제, 신백우 등과 함께 접리수에 한인촌을 조성하고 이주 한인들의 권익 보호 및 생활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한국의 영토와 문화와 관련해 다수의 저작을 집필했다. 그가 집필한 저술로는 <통사절요(通史節要)>, <동역고(東域考)>, <동제고략(東制考略)> 등이 있다. 그리고 1913년 11월 한인공교회 창립에 참여해 유림 인사들과 교류했고, 이를 통해 독립의지를 고양하고 민족문화 확립에 노력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지낸 그는 74세 때 "내 나이 이미 80에 가깝고 여기서도 원수의 일본 관헌에게 모욕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선산 아래 내 뼈를 묻겠다"며 고향인 김해로 돌아왔다. 그는 금곡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천산재(天山齋)'를 짓고 그곳에서 두문불출하다 죽기 직전에 밀양군 단장면 무릉리로 이주했고, 1941년 9월 16일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노상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9년 국립서울현충원 108실 178호에 안장되었다.
[1] 광주 노씨 집성촌이다. 울산광역시 교육감 노옥희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이명 노준연(盧浚淵).[3] 독립유공자 서재필민종식도 이 시험에 병과로 급제했다.[4]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되었으므로 노상익의 사직과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5]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지에리슈촌(接梨樹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