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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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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인물.
2. 가족[편집]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김성립과 허난설헌의 둘째 자식이자 장남이다.
누나가 있는데 1579년에 전염병으로 일찍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3. 생애[편집]
3.1. 생애 초기[편집]
둘째 자식이므로 김성립과 허난설헌이 혼인한 1577년에서 임신 9개월 후인 1578년 즈음에 첫째 자식인 딸 김씨를 낳으면 둘째인 희윤은 1578년에서 최소 1년 후인 1579년이나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생전 외삼촌인 허봉이 귀여워했는데 단명한 후 무덤 앞 아래의 글을 새겼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의 아버지 성립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瞻(첨)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
ㅡ 《희윤의 묘비》#
3.2. 때 이른 사망[편집]
누나 김씨가 전염병으로 죽고 난후 1582년 마찬가지로 전염병으로 죽었다.
김씨와 김희윤의 모친 허난설헌은 자식들의 때 이른 죽음에 슬퍼서 시 <곡자>를 지었다.#
허경진이 옮긴 허난설헌 시집에 의하면 장녀 김씨와 김희윤이 죽었을 때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 뒷동산의 안동 김씨 선영에 무덤을 썼으며,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의 무덤 앞 산기슭인 모랏골에 거처를 옮겨서 살았다 한다. 모랏골이 김성립의 친가가 있는 한성부는 아니므로 김성립이 과거 시험 공부를 하려고 강가에 집을 지어서 지내고 있을 때 따로 살 곳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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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들의 죽음에 곡하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