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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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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韓恒
생몰연도 미상

전연의 인물. 자는 경산(景山). 기주(冀州) 장락군(長樂郡) 관진현(灌津縣) 출신.[1] 명망높은 학자인 한묵(韓黙)의 아들.


2. 생애[편집]


10살이 되었을 때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어 당대 이름 날리던 문장가인 장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장재는 그를 보고 범상치 않게 여겨

"왕을 보좌할 재주로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키가 8척 1촌이나 되었고, 경전과 서적을 두루 읽어 정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후 영가의 난이 발발하자, 한항은 화를 피해 요동군으로 달아나 당시 요동을 통치하던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에게 의지하였다.

대흥 2년(319년) 12월, 최비가 모용부의 대인 모용외와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 고구려로 망명하니, 한항은 모용외에게 붙잡혀 모용부의 수도인 극성(棘城)으로 끌려갔다. 선비를 예우할 줄 알았던 모용외는 한항을 빈객으로서 예우하였고,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는 그를 마음에 들어하며 참군사로 삼았다.

함화 6년(331년) 겨울, 송해와 여러 신하들이 공동으로 모용외에게 대장군, 연왕(燕王)을 관작을 동진에 요구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때 한항이 반론을 펼치며 말했다.

"오랑캐 무리가 허술해진 틈을 타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을 주고 있으니, 제하(諸夏)가 고요해지고 기강 또한 사라졌습니다. 명공(明公)께서는 충(忠)과 무(武)를 갖추고, 성실함을 다하여 사직을 위해 부단히 힘쓰시어, 고독하고도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절개를 굽힘이 없이 만 리 먼 곳에서 공을 세우셨으니, 예로부터 근왕(勤王)의 의(義)라도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무릇 공을 세우는 자는 그 신의(信義)가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근심할 뿐이므로, 명성과 직위가 낮음을 근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환(桓)문(文)주나라 왕실의 안녕과 부흥 이루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공이 있었음에도 먼저 예명(禮命)을 요구하여 제후들을 호령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의당 갑병(甲兵)을 고쳐 기회를 기다리면서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사해(四海)를 맑게 하여, 그러한 공이 이루어지고 난 후라면 구석(九錫)에 자연히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임금에게 총작(寵爵)을 요구하는 것은 신하의 의리라 할 수 없습니다."

모용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한항을 신창(新昌)의 현령으로 내보냈다.

함화 9년(334년) 11월, 요동공 모용황이 진군대장군, 평주자사, 대선우에 임명되자 한항을 다시 불러 참군사로 삼았다. 이후 영구(營丘)태수에 임명되어 부임한 한항은 정치로 백성을 교화에 성공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영화 5년(349년) 4월, 모용준이 대장군, 연왕에 임명되자, 한항은 다시 부름을 받고 자의참군에 임명되었고, 양렬장군 직책이 더해졌다.

영화 8년(352년) 11월, 업(鄴)을 함락시킴으로써 염위를 멸한 연왕 모용준은 황제에 오르고, 국가의 5행(五行)의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 군신들과 의논하였다. 당시 한항을 병에 걸려 수도 용성(龍城)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경소제 모용준은 한항을 불러 결정케 하였다. 한항이 도착하기 전에 군신들은 연나라는 마땅히 진(晉)의 뒤를 이어 수덕(水德)을 취해야 한다 주장하여 이로 정했는데, 이윽고 도착한 한황이 경소제 모용준에게 말했다.

"조(趙: 후조)가 중원을 차지했던 것은 비단 인간의 소행만이 아니라 천명(天命)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것을 인간이 빼앗는 것은 불가하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대연(大燕)의 왕업의 자취는 진(震)으로부터 시작하였고, 《주역》에 의하면 진(震)은 청룡(靑龍)이라 하였습니다. 천명을 처음 받을 때 도읍(용성)에서 용이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용은 목덕(木德)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유계(幽契)에 부합합니다."

경소제 모용준은 비록 처음에 정한 일을 다시 고치기 어려웠으나, 한항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비서감 섭웅(聶熊)이 한항의 말을 듣고 감탄하며 말했다.

"'군자가 없다면 나라가 어찌 흥하겠는가'라는 말은 바로 한 영군(韓令君)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이후 이산(李産)과 함께 동궁(東宮)으로 들어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원새 2년(353년) 2월, 태자 모용엽(慕容曄)을 따라 입조하자, 경소제 모용준이 좌우를 향해 말했다.

"두 부(傅)는 모두 한 세대의 위인으로, 이들을 대신할 자는 없다."

한항을 향한 경소제 모용준의 총애가 이와 같았다.



[1]진서》〈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무읍왕 사마승의 유일한 아들인 사마우가 숙부 사마돈의 양자로 들어가 안평왕(安平王) 작위를 이었다가, 사마승이 죽자 무읍국도 흡수하여 장락국으로 고쳤다는 기록을 보면 무제 사마염 재위 말기에 이미 안평국은 없어졌으므로 장락군의 속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