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탕카 이요탕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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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인디언 전쟁 최후의 항전을 이끈 지도자.
2. 초기 생애[편집]
수우족의 지파인 훙크파파 부족 출신이며, 1831년 다코타의 그랜드 강 유역에서 태어나 1890년에 그랜드 강변에서 사망했다. 원주민식 이름은 타탕카 이요탕카(Thatangka Iyothangka),[1] 후에 이름을 훙케슈니(Húŋkešni)[2] 로 바꾸지만 이 이름이 더 알려졌다. 별명은 슬론-헤(Slon-he). 침착하고 혈기를 자제하는 모습에서 나왔으며 영어로는 slow로 번역된다.
타탕카 이요탕카는 본래 아버지의 이름으로[3] , 억지로 번역하자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집스러운 황소[4] "를 의미한다. 보통 백인이 번역한 이름인 시팅 불(Sitting Bull)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영어 명칭대로 표기하거나, 이를 중역한 앉은 황소, 웅크린 황소, 앉은뱅이 황소 등으로 번역하여 표기한다. 그가 어찌하여 타탕카 이요탕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그가 어렸을 때 부족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들소 사냥을 할 때마다 어린 암소들을 상대로 사냥을 흉내내며 놀았는데 어느 날 덩치 큰 암소 한마리가 화가 나서 아이들을 공격했고 아이들과 같이 사냥놀이를 하던 타탕카 이요탕카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달아나지 않고 암소의 두 귀를 잡고 밀어붙여 주저앉혔다고 한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그가 소를 주저앉혔다!"라고 연호했고 그때부터 그의 이름은 타탕카 이요탕카가 되었다고 한다.
타탕카 이요탕카는 열 살에 버팔로를 사냥해 돌아왔는데, 이때 사냥에 참가하지 못 한 자나 노약자에게도 고르게 분배해 라코타족 사이에서 이름을 알렸다. 열네 살엔 주변 부족과 충돌하며 용맹함을 뽐냈다. 전사로서 용맹했기에 라코타 수족은 타탕카 이요탕카를 전투추장으로 임명했다.[5] 그리고 앞서 말했듯 우리가 알고 있는 타탕카 이요탕카는 그의 아들이다.
3. 백인과의 싸움[편집]
타탕카 이요탕카는 1863년 6월, 백인 군대와 처음 충돌했다. 샌티 수우족이 미군을 살해한 이른바 '미네소타 학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연방군이 공격을 해 오자 그는 젊은 전사들을 이끌고 그들과 맞서 싸웠다. 이후에도 수우족의 사냥지역을 침범하고 농지를 짓밟는 백인들과 잦은 싸움을 벌였고 그때마다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백인과 투쟁하며 보여 준 용기와 지혜로 1867년에 전체 수우족의 족장으로 추대되었다.
1870년대 중반 블랙힐스[6] 에서 금이 발견되자, 백인 총잡이들이 구름처럼 원주민의 땅에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이 땅을 보장한 1868년의 협약(라라미 제2차 협약)은 휴짓조각이 되고, 정부는 모든 수우족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따로 설정된 원주민 보호구역 내에 정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복하는 사람은 정부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한다는 위협성 경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추운 날씨에 노인과 어린이들을 데리고 거의 400킬로미터를 이동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타탕카 이요탕카는 정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타슝카 위트코 등 동맹자들과 함께 그들의 땅을 사수하기로 했다.
이듬해 3월, 드디어 조지 크룩 장군이 이끄는 연방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웅크린 황소'는 수우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을 몬태나 원주민 구역 내 자신의 캠프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6월 17일 크룩 장군의 부대와 로즈버드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싸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타탕카 이요탕카는 주력부대를 리틀 빅혼 강의 계곡으로 이동시켜 최후의 결전에 준비했다. 여기서 죽을 힘을 다해 '태양의 춤'을 추어 실신했는데, 수많은 군인이 하늘에서 메뚜기처럼 자신의 진영으로 뛰어 내려오는 환상을 보고 전투의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6월 25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의 지휘 아래 연방군 주력인 제7기병연대가 부대를 공격해왔다. 처절한 싸움 끝에 타탕카 이요탕카와 타슝카 위트코는 제7기병연대를 문자 그대로 전멸시켰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안타깝게도 백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정부군은 리틀 빅혼 전투 이후 더욱 거세게 공격했고, 원주민 전사들은 이에 맞서 초인적 사투를 벌였지만 점점 불리해지는 전세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정부군은 원주민들의 주식인 들소를 무차별로 죽여 그들을 굶겨 죽이는 작전을 폈다. 결국, 동료 부족들이 굶주림에 지쳐 하나 둘 정부군에 항복했고, 타탕카 이요탕카는 남은 추종자들과 함께 캐나다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캐나다 정부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7] 도주와 기아에 지쳐 도피 4년 만에 정부에 항복하고 말았다.
4. 우리는 가난하지만 자유롭다[편집]
다음은 미국 정부가 원주민 보호 구역에 정착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타탕카 이요탕카가 한 연설이다.[8]
보면 알겠지만 대놓고 백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이 중 대다수는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요약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 백인들의 무절제한 탐욕, 양극화와 무전유죄 유전무죄 비판
- 기독교의 가르침과 원주민 전통을 모두 무시하는 백인들의 행태를 비판
- 백인이 원주민의 땅을 빼앗는 행위, 원주민에게 거짓말을 반복하는 백인들의 이중잣대 및 적반하장격 태도, 인종차별을 비판함.
- 무분별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인한 토양 산성화, 지력 저하, 환경오염, 자연 파괴, 들소 남획으로 원주민의 생존수단을 위협하는 백인에 대한 비판.[13]
- 백인들의 인디언 정책(원주민 보호구역) 비판
5. 죽음[편집]
이후 노스다코타 주에 설치된 스탠딩 락 보호구역에 정착한 그는 백인사회에 동화해 버팔로 빌로 알려진 윌리엄 프레드릭 코디의 주선으로 와일드 웨스트 쇼에 출연하는 등 한동안 평온한 삶을 누렸다(커스터로 분장한 코디와 몬트리올에서 찍은 사진 링크). 그러나 1890년에 수우족의 반란을 교사한다는 혐의로 다시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당시 보호구역에 수용된 원주민 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자들이 늘어나던 중, 파이우트족 주술사인 워보카(Wovoka)가 기독교와 원주민 종교를 섞어서 원주민 신흥종교인 유령춤교를 만들었다. 유령춤이 퍼지는 과정에서 메시아가 강림하여 백인들을 무찌르고 원주민들에게 다시 아메리카 대륙을 돌려줄 것이라는 예언도 나왔고 일부는 메시아의 강림을 기원하기도 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유령춤교를 금지했지만 춤을 추면서 정부에 대항하는 원주민이 늘자, 미국 정부는 그 배후에 타탕카 이요탕카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 따르면 그는 유령춤교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워보카의 추종자인 차는 곰(Kicking Bear, 1844~1904)이 스탠딩 록 보호구역[14] 에서 유령춤교를 원주민들에게 가르치는 걸 반대하지 않았고 묵인했다.
1890년 12월 15일에 원주민 출신 경찰들로 구성된 40명의 체포조가 한밤중에 그를 습격했고 타탕카 이요탕카는 체포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자들이 나를 끌고 가려는데 그대들은 무엇을 하는가?" 라고 외치자 주민들이 총을 들고 달려나와 경찰과 대치했다. 그러던 중 타탕카 이요탕카의 의형제인 호헤이[15] 가 경찰 한 명을 쏘아 죽이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12명이 죽었다. 이 와중에 타탕카 이요탕카는 물론 그의 의형제와 둘째아들 크로우풋도 죽었고[16] 여섯 명의 사망자를 낸 경찰들은 일단 후퇴했다가 기관총을 가져와서 마을을 모조리 파괴하고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남은 주민들을 학살했다. 결국 타탕카 이요탕카는 그랜드 강변에서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타탕카 이요탕카는 대평원의 원주민들 가운데 범상치 않은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뜨거운 동족애, 온화하고 유쾌한 성품, 종교적 신실함, 강력한 예언가적 자질, 정의감[17] , 전투할 때의 용맹성, 지도력, 거기에 뛰어난 노래 솜씨까지. 영웅의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고는 하나 그의 숭고한 투쟁은 원주민의 권리신장에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원래 노스다코타 주에 있는 포트 예이츠[18] 에 있었으나, 1953년에 사우스다코타 주의 모브리지로 이장했다.
그의 외증손자인 어니 라포인테가 2011년 기준 사우스다코타 주에 살고 있다. 기사
6. 매체[편집]
6.1. 영화[편집]
6.1.1.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2007)[편집]
말년 모습으로 등장했고, 오거스트 쉘렌버그가 연기했다.
6.1.2. 우먼웍스 어헤드(2017)[편집]
2017년 수재나 화이트 감독으로 타탕카 이요탕카의 초상화를 그렸던 여성 화가 캐롤라인 웰던(Caroline Weldon, 1844~1921)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우먼 웍스 어헤드>가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여기서 타탕가 이요탕카 역은 캐나다 출신의 북미 원주민 배우인 마이클 그레이아이스(Michael Greyeyes)가 분했다. 캐롤라인 웰던 역은 제시카 차스테인.
6.2. 드라마[편집]
6.2.1. 높은 성의 사나이[편집]
추축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판에서 사진으로 나온다. 주인공 중 한 명인 프링크가 은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골동품 판매상에 넘기려고 타탕카 이요탕카의 장식물 하나를 가짜로 만드는 게 나온다. 이것을 구매한 일본인 부부 중 아내가 이 짝퉁을 만지고 슬픔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이때 판매상이 동족이 멸절당한 슬픔이 있는 자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고 속였다.
6.3. 게임[편집]
6.3.1. 문명 시리즈[편집]
문명 2에서는 사카자위아와 함께 수족 문명을 이끈다. 시팅 불 자신이야 수족 지도자로 부족함이 없지만 문제는 지도자로 선정될 만한 인물인지의 여부를 떠나 수족조차 아니고 쇼숀인인 사카자위아인데, 그녀가 어쩌다 수족의 지도자가 되었는지는 항목 참고.
문명 4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종족 특성이나 지도자 특성상 근대 이전의 궁을 다루는 시기에는 우주 방어를 자랑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서 멸망하는 건 보기 어렵고, AI는 일단 친해지면 세계의 적이 돼도 따를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아군이 되어 주기도 한다. 친해지는 게 꽤 어렵지만.
6.3.2.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대전사[편집]
구판에서는 체이튼 블랙과 커스터의 대화 중에 '앉은뱅이 황소'로 이름만 언급된다.
6.3.3. 도미네이션즈[편집]
시팅 불의 뿔 곤봉이 유물로 등장한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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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탕카 요탕카 혹은 타탕카 이요타케(Thatangka Iyotake)로 표기하기도 한다. 원어인 라코타어 정서법대로 쓰면 타탕카 이요타케(Tȟatȟáŋka Íyotake)이다.[2] 느림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신중한 그의 성격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한다.[3] 그의 아버지도 유명한 전사였고 크로우족의 족장과 싸우다 전사했다 한다.[4] 타탕카(Thatangka)라는 단어가 수우족 언어로 수컷 들소를 뜻하며 이를 번역한 황소(Bull)는 거세하지 않은 수소를 뜻한다.[5] 사람들은 흔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추장을 중심으로 부족 사회를 이루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간접민주주의 정책을 펼쳤다. 추장은 단지 무리를 대표하는 사람일 뿐이었고 전투추장, 위차샤 와칸 등이 사실상 지도자였다. 자세한 건 아메리카 원주민 문서를 참고.[6] Black Hills. 수우족 언어인 Paha Sapa(검은 언덕)을 번역한 지명이다.[7] 캐나다 역시 원주민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심했고 받아주면 미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했기에 거절한것이다.[8] 다만 타탕카 이요탕카뿐 아닌 많은 원주민들이 이런 식의 명연설을 남기곤 했다. 이 원주민들의 명연설들만 모은 책이 따로 있을 정도.[9] 담배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인해 토질이 악화된 것과 그럼에도 계속 농사를 짓는 (그들 눈에는) 한심한 작태를 꼬집어 얘기한 것 같다.[10] 이 말은 결국 예언이 되었다. 현재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100% 맞는 말이라 할 순 없을 것이나 과거 수십 년 전까지는 거의 그래왔다. 하다못해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할리우드에서는 서부극 찍을 때 인디언을 악역으로 설정하다시피 해 두 번 죽였으니 말이다.[11] 실제로 유목민이나 수렵채집민들은 농경민족들이나 정주민들을 땅에 묶인 노예처럼 생각했다. 농노제처럼 실제로 비슷하게 그런 일이 있기도 했으니 영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12] 연설 출처,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김영사, 류시화 저작.[13] 결국 아메리카들소는 멸종 직전까지 갔다가 뒤늦게 미국 정부가 보호에 나섰고, 겨우 수만 마리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수천만에 달했던 과거에 비하면 한 줌.[14] 노스다코타 주에 있으며 훙크파파족과 시하사파족(라코타), 양크톤족(다코타 수우족)이 정착했다.[15] 아시니보족으로 타탕카 이요탕카가 젊을 적에 포로로 잡은 소년이었는데 살려 줌은 물론이고 자신의 의형제로 삼았다.[16] 큰아들인 원 불은 1853년생이며 1947년에 죽었다.[17] 한 가지 일화로 그가 크로우족의 한 전사와 결투하다가 상대방의 총알이 떨어진 것을 눈치채고 자신의 총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전사라면 무기가 없는 상대와 싸우지 않는다' 였다고. 어쨌거나 타탕카 이요탕카는 총을 상대에 맞서 막대창 하나로 맞섰고 이기긴 했으나 크게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총 준다고 받질 않나 또 좋다고 창든 상대에게 총 쏴대는 걸 보면 상대는 어지간히 비겁한 놈이었나 보다[18] 원주민 대학인 시팅불 대학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