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치바나 요시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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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現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야나가와 상고 시절 2학년 때인 1975년 센바츠에 중견수로 출전했지만 초전에 패퇴했고, 같은 해 나츠 고시엔 때는 후쿠오카현 대회 결승에서 패배하면서 고시엔 출장이 좌절되었다. 3학년 때는 고시엔 출장을 이루어냈지만 3라운드에서 PL학원고등학교에 패배하면서 고교생활을 마무리했다.
프로 생활 초기 때만 해도 "좌타 하라 타츠노리"라는 호화스러운 수식어가 붙었는데, 입단 2년차인 1978년에 개막전에 19세의 나이로 3번 타순으로 데뷔전을 치러 화제를 일으켰다. 시즌 이후, 세이부 철도에 인수되기 전 크라운라이터로서 마지막 경기가 되었던, 크라운라이터+쿄진 연합군 대 신시내티 레즈의 빅 레드 머신 친선전에서 4번 오 사다하루를 이은 5번 타자로 출장하기도 했다.
세이부 철도가 인수하면서 팀은 사이타마현으로 연고이전했고, 프로 데뷔 첫 홈런을 세이부 돔 개장 첫 홈런으로 장식하면서 활약했다. 1980년에도 팀내 타율 1위인 .301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에도 훗날 세이부 왕조를 구축하는 타부치 코이치와 용병 온티베로스, 오타 타쿠지 등의 강타자가 즐비한 타선 덕분에 7번에서 쳤고, '공포의 7번 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1982년 일본시리즈와 1983년 일본시리즈의 연속 우승으로 황금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타오 야스시와 카나모리 에이지 등의 이적으로 점점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타 자원으로 활약하며 세이부 왕조 시기의 반지는 꾸역꾸역 챙겼다(...) 하지만, 1991년에는 1군 출전조차 없었고 결국에 왕조의 마지막 우승인 1992시즌을 앞두고 오프시즌에 한신 타이거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한신에서도 대타 자원으로 출전했지만 1년만에 방출, 1993년에는 대만프로야구의 신규 창단팀 쥔궈 베어스에 입단했지만 1년만에 현역생활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1998년부터 다이에 호크스의 2군 타격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세이부 라이온즈, 치바 롯데 마린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 여러 팀에서 타격코치를 맡았고, 코치 경력만 20년이 넘는 햇수를 자랑한다. 특히, 소프트뱅크 시절에는 하세가와 유야, 나카무라 아키라, 야나기타 유키 등을 지도한 경험이 있고[2] , 쿠리하라 료야나 슈토 우쿄 등에도 성장에 기여했던 바 있다. 소프트뱅크 2기(호크스 3기)에는 4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에도 공헌했다.
2023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2군 타격코치로 합류하게 되면서 야구 인생 처음으로 한국에서의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그러다가 1군 타선의 침체로 인해 코칭스태프 개편이 이뤄지면서[3] 5월 26일부로 1군 타격코치로 합류했다. 일단은 기존 1군 타격코치인 박한이 코치, 그리고 역시 타격코치 경력이 있는 이병규 수석코치와 함께 팀 타격코칭을 담당한다. 막상 타치바나 코치가 맡았던 삼성 2군 타격 지표도 퓨처스 전체 꼴찌라는 게 함정.[4]
6월 9일부로 박한이 타격코치가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 메인 타격코치를 맡게 됐다.
그러나 타치바나 코치 체제 이후 삼성 타선의 팀배팅이 도저히 되지 않으며 타치바나 코치는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
7월 들어 이것도 옛말일 뿐 팀 타선이 불을 뿜으며 급격하게 평가가 상승했으며, 앞으로도 1군 코치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 삼성 코치진 중 이병규 수석코치, 박한이 공동 타격코치와 더불어 평이 좋은 몇 안되는 코치.
1. 개요[편집]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現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 선수 경력[편집]
2.1. 고교 시절[편집]
야나가와 상고 시절 2학년 때인 1975년 센바츠에 중견수로 출전했지만 초전에 패퇴했고, 같은 해 나츠 고시엔 때는 후쿠오카현 대회 결승에서 패배하면서 고시엔 출장이 좌절되었다. 3학년 때는 고시엔 출장을 이루어냈지만 3라운드에서 PL학원고등학교에 패배하면서 고교생활을 마무리했다.
2.2. 프로 선수 시절[편집]
프로 생활 초기 때만 해도 "좌타 하라 타츠노리"라는 호화스러운 수식어가 붙었는데, 입단 2년차인 1978년에 개막전에 19세의 나이로 3번 타순으로 데뷔전을 치러 화제를 일으켰다. 시즌 이후, 세이부 철도에 인수되기 전 크라운라이터로서 마지막 경기가 되었던, 크라운라이터+쿄진 연합군 대 신시내티 레즈의 빅 레드 머신 친선전에서 4번 오 사다하루를 이은 5번 타자로 출장하기도 했다.
세이부 철도가 인수하면서 팀은 사이타마현으로 연고이전했고, 프로 데뷔 첫 홈런을 세이부 돔 개장 첫 홈런으로 장식하면서 활약했다. 1980년에도 팀내 타율 1위인 .301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에도 훗날 세이부 왕조를 구축하는 타부치 코이치와 용병 온티베로스, 오타 타쿠지 등의 강타자가 즐비한 타선 덕분에 7번에서 쳤고, '공포의 7번 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1982년 일본시리즈와 1983년 일본시리즈의 연속 우승으로 황금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타오 야스시와 카나모리 에이지 등의 이적으로 점점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타 자원으로 활약하며 세이부 왕조 시기의 반지는 꾸역꾸역 챙겼다(...) 하지만, 1991년에는 1군 출전조차 없었고 결국에 왕조의 마지막 우승인 1992시즌을 앞두고 오프시즌에 한신 타이거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한신에서도 대타 자원으로 출전했지만 1년만에 방출, 1993년에는 대만프로야구의 신규 창단팀 쥔궈 베어스에 입단했지만 1년만에 현역생활에서 은퇴했다.
2.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1998년부터 다이에 호크스의 2군 타격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세이부 라이온즈, 치바 롯데 마린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 여러 팀에서 타격코치를 맡았고, 코치 경력만 20년이 넘는 햇수를 자랑한다. 특히, 소프트뱅크 시절에는 하세가와 유야, 나카무라 아키라, 야나기타 유키 등을 지도한 경험이 있고[2] , 쿠리하라 료야나 슈토 우쿄 등에도 성장에 기여했던 바 있다. 소프트뱅크 2기(호크스 3기)에는 4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에도 공헌했다.
2.3.1. 삼성 라이온즈 코치[편집]
2023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2군 타격코치로 합류하게 되면서 야구 인생 처음으로 한국에서의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그러다가 1군 타선의 침체로 인해 코칭스태프 개편이 이뤄지면서[3] 5월 26일부로 1군 타격코치로 합류했다. 일단은 기존 1군 타격코치인 박한이 코치, 그리고 역시 타격코치 경력이 있는 이병규 수석코치와 함께 팀 타격코칭을 담당한다. 막상 타치바나 코치가 맡았던 삼성 2군 타격 지표도 퓨처스 전체 꼴찌라는 게 함정.[4]
6월 9일부로 박한이 타격코치가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 메인 타격코치를 맡게 됐다.
그러나 타치바나 코치 체제 이후 삼성 타선의 팀배팅이 도저히 되지 않으며 타치바나 코치는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
7월 들어 이것도 옛말일 뿐 팀 타선이 불을 뿜으며 급격하게 평가가 상승했으며, 앞으로도 1군 코치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 삼성 코치진 중 이병규 수석코치, 박한이 공동 타격코치와 더불어 평이 좋은 몇 안되는 코치.
3. 여담[편집]
4. 연도별 성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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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 야나가와고등학교(柳川高等学校)[2] [3] 코치진 엔트리 확보 차원에서 권오준 불펜코치가 엔트리에서 말소됐다.[4] 다만 삼성의 타자 뎁스가 안좋은 점도 감안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