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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미하일 8세의 이복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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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카이사르. 1259년 미하일 8세에 의해 카이사르를 수여받고 제국군 장성으로서 외적과 싸웠다.
2. 행적[편집]
메가스 도메스티코스(μέγας δομέστικος,: 동로마군 총사령관)를 맡았던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의 아들이자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의 이복형제다. 1258년 8월 25일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의 섭정을 맡았던 요르요스 무잘론을 살해하고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새 섭정으로 옹립되는 데 일조했다. 1259년 초 마히알 8세가 공동 황제로 등극한 뒤 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고 파플라고니아에 주둔한 니케아군 총사령관에 선임했다. 이후 1260년에 지난해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아카이아 공국-아테네 공국-시칠리아 왕국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와 함께 세바스토크라토르(sebastokrator: 황제 다음의 최고 통치자)로 선임되었다.
1263년, 황제의 명령에 따라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가 이를 철회한 아카이아 공작 기욤 2세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으나 1263년 프리니츠 전투에서 참패하고 미스트라로 피신했다. 1263년 또는 1264년 초, 그는 군대를 재집결한 뒤 아카이아 공국을 정복하고자 엘리스 북부의 세르자나로 진격하여 '메이스클리의 성 니콜라스 수도원'이 세워진 곳에 진을 쳤다. 기욤 2세는 이에 맞서고자 진군해 동로마군과 대면했다.
모레아 연대기에 따르면, 동로마 선봉장 미하일 칸타쿠지노스가 선봉대를 이끌고 달려들었다가 말이 발을 잘못 디딛는 바람에 낙마하고 말았고, 이내 아카이아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슨느 가장 용감한 부관의 허망한 죽음에 당황해 급히 퇴각하여 니키 요새로 피신했다. 이후 아카이아군에 포위된 채 농성하던 중, 1,000명의 튀르크 기병대를 이끌던 멜리크와 샬리크가 6개월치 임금이 밀렸으니 어서 지불해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적을 물리칠 생각은 안하고 돈 받을 궁리부터 하느냐!"라고 화를 내며 거부하자, 멜리크와 샬리크는 대부분의 부하들과 함께 아카이아군에 귀순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질병을 가장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고, 알렉시오스 필레스와 요안니스 마크레노스가 그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었다. 그들은 니키 요새를 지켜내어 적을 후퇴시킨 뒤 메세니아로 진군하여 가르디키 성 인근에 위치한 마크리플라기 고개로 진군했으나 아카이아군의 역습을 받고 참패했다. 이 일련의 패배로 인해 명예가 실추된 그는 말년에 수도자가 되어 칼리니코스라는 수도명을 사용했고, 1271년경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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